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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땅의 터가 흔들리는 이유 (시 82:1-5, 마 27:5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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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터가 흔들리는 이유 (시 82:1-5, 마 27:51-53) 


2008년 5월 중국 쓰촨성에서 있었던 지진은 진도가 7.9로 가깝고 먼 나라들에게 큰 공포감을 주었습니다. 2010년 1월의 아이티 지진은 진도가 7이었고, 2010년 2월 칠레 콘셉시온의 지진은 진도가 무려 8.8이었습니다. 최근에 와서 점점 진도가 강한 지진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지진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의 진도가 6.2이었는데 이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지진들입니다. 
  
화산의 활동도 빈번해졌습니다. 얼마 전의 아이슬란드 화산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특히 유럽의 항공 대란이 일어날 만큼 화산은 많은 피해를 준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볼 때 이곳저곳에 활화산이 즐비합니다. 세계에는 활화산이 무려 850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80%가 태평양 연안에 있다고 하니 우리나라도 화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소원주라는 분이 쓴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백두산이 10세기에 대폭발을 했다고 합니다. 한반도 전체가 1미터 높이의 화산분출물로 덮일 만큼 큰 폭발이었습니다. 백두산 폭발로 인한 화산재가 일본에까지 날아갔다고 하며, 심지어 발해의 멸망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기 79년 폼페이를 멸망하게 했던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은 백두산 화산폭발에 비하면 장난이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세계적 재난이 있지만 점점 강한 화산폭발과 지진은 가장 위협적이 될 것입니다. 지구의 화산폭발과 지진은 지구온난화의 영향이라고 합니다. 세계적인 환경변화에 따른 이상 징후들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백두산의 화산폭발 징후는 여러 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진회수가 이전보다 10배가량 증가하였습니다. 천지의 지형이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화산가스의 분출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2014년에서 2015년 사이에 백두산이 폭발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를 태평양 시대라고 합니다. ‘아시아 태평양 경제기구’(APEC)가 가장 각광받는 시대입니다. 환태평양이란 결국 지진과 화산대가 있는 지역입니다. 태평양 시대에 세계가 번창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번창한 태평양 연안국들이 재해로 멸망하는 것이 이것이 종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태평양 연안국인 한국도 지진과 화산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성경에도 지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열왕기상서 19:11에는 호렙산의 엘리야가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고,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아모스 1:1에는 웃시야 시대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4:7에는 마지막 때의 징조로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7:51에는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6:26에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있을 때에 “이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때에 지진과 기근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땅의 흔들림은 말세의 징조로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편 82편의 주제는 불의한 재판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재판장은 공의로워야 합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불의하고 공의롭지 못합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땅의 터가  흔들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땅이 흔들리는 것은 땅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불의하고 공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관동대지진을 아실 것입니다. 1923년 9월 1일에 발생한 지진입니다. 그 때 얼마나 큰 규모의 지진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모릅니다. 어느 시인은 대지진을 보고 ‘어머니 같은 대지의 반역’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관동대지진은 우리 민족에게도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유언비어를 퍼트려 재일동포 6,661명을 학살하였습니다. 땅이 흔들리면 사회가 불안합니다. 땅은 우리 생명의 근거입니다. 삶의 근거입니다. 이런 땅이 왜 흔들립니까? 

첫째, 공의를 베풀지 않으므로 땅의 터가 흔들립니다. 

시편 82:3에는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여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라고 합니다. 이것이 땅의 터가 흔들리는 이유입니다. 2절에는 “불공평한 판단”이란 말이 있습니다. 재판의 본질은 공정성입니다. 재판의 공정성은 모든 권위와 공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판장들이 공정성을 왜곡합니다. 이런 재판장들의 자세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격이 되었습니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이 지금도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작은 차를 타고 가면 냉대를 받으므로 가급적 큰 차를 타고 가라고 합니다. 관공서에 갈 때는 꼭 양복을 입고 가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에나 사람이 사는 곳이면 신분이나, 인종이나, 성별이나, 학력이나, 계급의 차이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성별의 차별보다 비만의 차별이 더 심하다고 합니다. 비만 여성들이 차별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별 것이 다 공의롭지 못한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모세가 지도자를 세울 때의 일입니다. 출애굽기 8:21에 보면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울 때에  그 자격이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라고 합니다. 불의한 이익이란 무엇입니까? 뇌물입니다. 공정하지 못한 재물을 바라는 사람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재판을 담당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공의롭게 못하고, 뇌물을 받고, 차별의식을 가진 자는 재판관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이런 자격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은 참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아들들인 요엘과 아비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뇌물을 받고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하였습니다. 그 아버지 같지 않아서 지금도 그들은 타락한 지도자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잠언 24:24에는 “악인에게 네가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고 합니다. 공의롭지 못한 재판은 저주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는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약한 사람에게는 죄가 되고, 강한 사람에게는 죄가 안 되는 고무줄 잣대는 결코 공의로운 사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공자는 3,000제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하여 공자의 열 명의 수제자가 있었습니다. 수제자 중에 하나인 자공이 한번은 스승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나라가 잘 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공자는 ‘족식’(足食), ‘족병’(足兵), ‘신’(信)이라고 하였습니다. 족식이란 풍족한 식사를 말하며 생활의 안정을 뜻합니다. 족병이란 풍족한 병사로 자주국방을 뜻합니다. 신이란 믿음 즉 국가의 공신력을 뜻합니다. 

자공은 다시 묻습니다. “세 가지 중 하나를 버린다면 무엇을 버리시겠습니까?” “병을 버리겠다”. “나머지 둘 중 하나를 버린다면 무엇을 버리시겠습니까?” “식을 버리겠다. 신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공신력, 믿음, 공의가 없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공의가 없는 나라는 바로 서지 못합니다. 
  
해방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구티에레즈는 건강한 영성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영혼을 세 가지로 먹여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공의의 실천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 영혼을 원만하게 해주고 감사로 지켜 나가게 해주는 우리 삶의 여러 가지를 통해서 건강한 영성을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공의의 실천은 건강한 영성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보세요. 복을 주겠다고 하셨으면 반드시 복을 주십니다. 야곱도 약은 데가 있고 바르지 못한 성품도 있지만 하나님은 약속대로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신대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기에 반드시 죽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이는 것을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아니지만 공의로움은 그 약속을 지키고 죽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노니 라고 하셨는데 복 받을 만하면 반드시 복을 주십니다. 저주를 받을만하면 반드시 저주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0에는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초를 두어 견고하게 하신 땅이 왜 흔들립니까? 인간이 불의하고 공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땅을 흔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옳으심입니다. 하나님의 질서이며 공정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합니다. 마구 세상을 훼손하고 파괴하고 오용합니다. 이런 인간의 잘못은 결국 우리 지구의 땅이 흔들리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므로 받는 대가입니다. 땅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배워 살아야 합니다. 

  
둘째,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터가 흔들립니다. 

시편 82:5에는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라고 합니다. 땅의 터가 흔들리는 까닭은 백성들이 흑암 중에 왕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나 다 알고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저주받은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만물에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는 것은 저주받은 것입니다. 이전 성경에는 ‘저희는 무지무각(無知無覺)하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뜻과 말씀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 것입니다. 
  
땅의 터가 흔들리는 것은 ‘흑암 중에 왕래하니’라는 말로 묘사합니다. ‘흑암’은 무지(無知)나 불의, 또는 도덕적인 어두움을 비유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고, 의로운데 둔하고, 도덕적인 기준을 상실하여 사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이 어두움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사회의 ‘안전 불감증’을 많이 얘기합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안전사고는 반복됩니다. 우리 사회의 ‘도덕적 해이’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마비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도덕불감증’이란 말을 쓰고 싶습니다. 우리 시대가 도덕적으로 불감증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덕적 흑암 속에 살면서 도덕적 해이를 가지고 도덕적 불감증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의 상태는 무질서했습니다. 왜 무질서했습니까? 흑암 때문입니다. 온 천지가 깜깜하니 질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창조질서는 흑암을 몰아냈습니다. 혼돈과 흑암이 창조 이전의 상태입니다. 창조 후에는 질서와 밝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므로 다시 혼돈과 흑암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최근의 성폭행 사건을 보세요. 나영이 사건과 같은 끔찍한 사건도 있습니다. 김길태 사건처럼 파렴치한 사건도 있습니다. 김수철 사건과 같이 철면피한 사건도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10대 남자아이들이 여자 초등학생을 성폭행했다고 합니다. 아직도 어린 아이들이 왜 이런 범죄를 저지를까요? 왜 이렇게 많은 사건들이 줄을 잇는지요? 인터넷 음란 사이트와 케이블 TV 등의 노출된 영상들을 통하여 아이들이 알 볼 것을 다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호기심과 모방심에서 그렇게 따라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추행범들은 아무리 잡아넣어도 안 됩니다. 화학적 거세로 해결될까요? 제가 볼 때는 근본적인 치유는 힘들다고 봅니다. 
  
도덕의 붕괴는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나타납니다. 젊은이들이 어른에 대한 공경심도 없습니다. 스승에 대한 공경심도 사라졌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배려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무질서와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아프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도 없습니다. 사회의 전반적인 도덕적 기준이 무너졌습니다. 
  
조나단 글로버의 ‘인류: 20세기의 도덕사’에 보면 20세기의 역사는 현대악의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도덕적 고독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즉 의식 있는 소수가 되는 것, 다시 말하면 지배적 양심으로 우뚝 서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에서 도덕적 양심을 지킨다는 것은 때로는 외로운 싸움입니다. 
  
시편 11:3에는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고 합니다. 악인 때문에 터가 무너지고, 무너지면 의인이 할 일이 없습니다. 의인들이 터가 무너지기 전에 터를, 기초를, 땅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가 자기별을 떠나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임금님의 별이었습니다. 임금은 ‘내 가신이 왔다’고 좋아했지만 어린 왕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의 생활이 따분해졌고 이내 작별인사를 합니다. 그러자 임금은 어린 왕자를 법무장관으로 임명할 테니 자기별에 더 머물러 달라고 간청합니다. 어린 왕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데 법무장관이 왜 필요한가요?” “그렇다면 너 자신을 재판해라. 남을 재판하는 것보다 자기를 재판하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다. 만약에 네가 훌륭히 자기를 재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네가 참으로 현명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는 내적 도덕률이 이 땅의 기초를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말세의 징조가 기록된 마태복음 24:7에는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합니다. 기근과 지진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세의 징조입니다. 우리 시대를 보는 눈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결론 

갈릴레오가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교황청에 잡혀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교황이 직접 갈릴레오를 재판하였습니다. 교황은 시편 93: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라는 말씀을 들고 지동설이 성경에 비차된다고 하여 파문하였고 후에 사형하였습니다. 과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이 증명되자 교황청에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구는 돌고 있고, 갈릴레오는 이미 죽었고, 교황은 잘못이 없다는 ‘교황무오설’이라는 교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 세 가지를 다 충족시킬 수 있는 좋은 방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머리가 좋은 추기경이 교황에게 얘기하여 이렇게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제부터 지구는 돌아도 괜찮다는 허락을 교황으로부터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당시로는 통했던 이야기입니다. 
 
땅이 흔들린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불안입니다. 인간의 삶의 터전이 요동한다는 것은 사회적, 종교적 생존의 문제입니다. 지금도 땅이 흔들리는 것은 심리적 불안의 요소입니다. 땅이 흔들리는 것은 사회가 소요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땅이 흔들리면 약탈과 방화와 신앙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땅의 터가 흔들리는 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인간이 공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흑암 가운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마음을 회복하여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이 땅의 터를 만드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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