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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심판과 우리의 할 일 (롬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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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과 우리의 할 일 (롬 2:1-11)

하버드 대학 정문에 서 있는 비석
미국 동부 보스턴에는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알려진 하버드대학이 있습니다. 하버드대학의 정문에 비석이 하나 놓여 있고 비석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고 합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말라.’ 오늘 우리가 읽은 롬 2:11의 말씀입니다. 이 말이 비석에 쓰이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답니다. 

빛바랜 줄무늬의 드레스를 입은 부인과 올이 다 드러나 보이는 허름한 양복을 입은 남편이 약속도 없이 하버드 대학교 총장의 사무실로 들어갔습니다.
총장 비서는 이 사람들을 보자마자 볼일 없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총장님을 뵙고 싶다는 말에 "총장님은 하루 종일 바쁘실 것입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기다려 총장을 만났습니다. 

부인이 말을 꺼냈습니다. "우리에겐 하버드에 1년을 다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애는 하버드를 대단히 사랑하였고, 여기에서 무척 행복해 했습니다. 그런데 1년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제 남편과 저는 캠퍼스 내에 그 애를 위한 기념물을 하나 세웠으면 합니다."
총장은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버드에 다니다 죽은 사람 모두를 위해 동상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다면 이곳은 아마 공동묘지 같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아니에요. 총장님 그게 아닙니다." 부인은 얼른 설명을 하였습니다.  "동상을 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버드에 건물을 하나 기증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총장은 눈을 굴리며 낡은 줄무늬 옷과 낡은 양복을 번갈아 보고 나서, 소리를 높여 말을 하였습니다.
"건물이라고요? 건물 하나가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알고나 하시는 말입니까? 현재 하버드에는 750만 달러가 넘는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 차 있습니다."

두 부부는 잠시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인은 남편에게로 얼굴을 돌리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대학교 하나 설립하는데 비용이 그것 밖에 안 드는가보죠. 그러지 말고 우리들의 대학교를 새로 하나 세우죠?"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릴런드 스탠포드’였습니다. 캘리포니아로 돌아 온 이들은 아들 이름을 딴 ‘릴런드 스탠퍼드 주니어 대학교’를 세웠습니다.
하버드는 엄청난 투자자가 놓쳤고 미국의 새로운 명문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하버드 총장은 이 일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정문에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말라’는 비석을 세웠답니다. 

인간의 죄성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인간의 죄성을 말합니다. 1장 이방인의 죄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합니다. 2장은 유대인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부심도 있지만, 이를 가지고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라고 우리 안의 죄성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실, 조금 더 많이 배웠다고, 조금 더 많이 가졌다고 다른 사람들을 얕잡아 보려는 죄성을 우리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먼저 가르치는 것은 ‘비판 정신’입니다. 논문을 써 다른 사람들의 이론을 뛰어 넘으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찾아 내야합니다.  세상의 선생은 비판 정신이 더 좋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약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본문 9절, 10절에서도 환난과 곤고 영광과 존귀가 다 더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 먼저 시작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믿는 우리들이 더 잘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1.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마 7:1-5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오늘 본문 1절에도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고 했고 3절에는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고 했습니다. 

또한 갈 6:1-4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우리가 각자 자신을 돌아 보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2절에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하면서 6절부터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롬 2:6-8)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혹 판단할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자신은 어떠한지를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2. 그리고 그 다음에 분별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은 분별하라고 하십니다. 롬 12:2을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분별이라 함은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내는 것과 함께,  옳고 그름을 자신과 타인에게 어떻게 적용할지도 아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정의에 사도가 때로는 많습니다.  이들은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진정 필요합니다. 그러나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하는 사람 때문에 문제가 더 복잡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옳고 그른 것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비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까닭은 감정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사실보다, 옳고 그름보다 감정이 더 앞설 때가 많습니다.  감정이 뒤틀리면 사리를 판단하는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분별이 필요합니다.  말하는 사람은  옳고 그른 내용을 잘 알아듣도록 전달할 지혜가 필요하고, 듣는 사람은 그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을 잘 새겨 듣는 훈련도 필요합니다. 
다윗의 훌륭한 점은 죄를 드러내는 나단 선지자의 말을 잘 받아들인 것에 있고요,  헤롯 왕의 부족한 것은 잘못된 것을 말하는 세례요한을 옥에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죽인 것에 있습니다. 

다시 갈 6:1을 보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에서 ‘바로 잡는다(카탈티조)’라는 말은 성경에서 회복의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막1,19에 “그물을 깁고”에 같은 단어를 씁니다.  망가지고 뜯어진 것을 수선하여 다시 쓸 수 있도록 고치는 것입니다.  또한 고전1,10에 “분쟁을... 온전히 합하라”에도 같은 단어를 씁니다.  우리들의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회복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별의 지혜가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3.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십시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우리 주님의 마음은 인자하심입니다. 용납하심입니다. 그리고 오래 참으심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풍성한지 모릅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비판 중독이 되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캐내는 데는 너나 할 것 없이 천재같습니다. 지능지수와 상관없이 너도 나도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끌을 귀신 같이 찾아냅니다.  
지방 서기를 하면서 회의록을 작성했습니다.  딴에는 틀린 곳 없이 잘 했다고 만족스러운데도 감수하는 이에게 넘기면 영락없이 틀린 곳을 여기저기 많이도 찾아 냅니다. 

한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사람들은 여인을 잡으려고 한 것도 있지만, 예수님을 더욱 잡으려고,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땅에 글을 쓰시더니, 일어서서 말씀을 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십니다.
무슨 글을 쓰셨는지 성경은 알려주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돌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의 죄목을 조목조목 적고 계시지 않았나, 주석가들은 생각했습니다.   하여간 성경은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다 물러갔다’고 했습니다. 
돌은 든 사람들이 다 물러간 후에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주석가들은 바로 이 여인이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여인의 잘못을 바로잡고 가장 귀한 헌신을 하게 한 것은 주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 그리고 오래 참으심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도 그랬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이 물질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어 동족인 유대인에게 로마를 위해 일하는 매국노로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 일을 그만두지 못했습니다. 
여리고 마을에 예수님이 지나가신 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뽕나무 아래에 왔을 때, 이웃에게 욕을 많이 먹어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는 책망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예수님의 눈과 삭개오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순간 예수님의 입이 열었습니다.  책망하고 꾸짖는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뜻밖의 말씀을 듣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것도 째려 보거나 없신 여긴 눈 빛이 아니라, “우러러 보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더 이상의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벼락 맞은 사람처럼 단번에 거듭났습니다.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옳은 말 한마디가 아닙니다. 인간의 죄성은 지적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숨고 교묘해질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로 세상을 바로 잡고 구원하셨습니다.  
인간의 죄로 시작하는 로마서 1-3장의 결론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롬 3:23-24, 개정)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들 모두가 더 잘 살기를 축원합니다. 

(서연교회 이명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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