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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와 아들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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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눅 15:11-24)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는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이 세 가지 비유는 당시 유대사회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예수님을 향한 원망에 대한 대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러 그에게 나아옴을 용납할 뿐 아니라, 심지어 이 사람(예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까지 함께 먹는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눅 15:1-2).
  
저들의 원망과 불평은 예수님이 죄인의 친구요 죄인을 구하러 오신 죄인의 구세주이심을 까마득하게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막 2:17).
이때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로(눅 15:3-7),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가정주부의 비유로(눅 15:8-10), 그리고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아버지의 비유로(눅 15:11-32) 자신의 강세의미와 내용과 목적을 알려 주었습니다.
  
말하자면 나(예수)는 죄인들이 나에게 나아와 말씀을 듣는 일을 환영해야 하고, 나는 죄인들과 친구가 되어야 하고, 나는 죄인들과 함께 먹고 즐겨야 할 죄인들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주장하신 비유입니다. 우리는 그 세 번째 비유인 '아버지와 아들'을 만나보기 원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고 '두 아들'은 크게 나누면 '유대인과 이방인', 혹은 '바리새인?사두개인과 죄인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아들의 비유 중에 '그 둘째'(아들)에 대한 주님의 비유를 생각합니다.

Ⅰ. 그 둘째는 자율 방종하는 탕자였습니다(눅 15:11-16).

1) 그 둘째는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요구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에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여기 '내게 주소서'라는 말 '도스모이'(δ??μοι)는 청원이 아니고 일종의 명령적 어투의 강요를 의미합니다.
  
그는 구약 신명기 21장 17절에서 명한 자기의 분깃을 요구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아버지의 재산 중 2/3는 장자의 몫이고, 1/3은 차자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마음껏 자유하고, 독립하고, 자주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반역적 어투로 아버지께 감히 강요를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 하반절에 보면 이에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의 몫을 떼면 나머지는 자연히 맏아들(눅 15:31)의 것이었습니다. 

2) 그 둘째는 먼 나라로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3절에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라고 하였습니다. 
'재산을 다 모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다'는 '무엇이든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가 다시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먼 나라(distant country)! 
그곳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상거가 먼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을 등진 죄인들의 거처는 언제 어디서나 먼 나라입니다. 영적으로 애굽이라고도 하고, 소돔이라고도 하고, 바벨이라고도 하는 이 세상은 실로 하나님 편에서 먼 나라들입니다. 무신론의 나라, 유물론의 나라, 우상숭배의 나라,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는 하나님 앞에서 실로 멀고 먼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집 교회가 바로 자기 옆에 있지만 사탄의 지배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하나님 떠난 인생(죄인)들은 실로 멀고도 먼 나라입니다. 암흑의 권세가 주장하는 이 세상 나라입니다.

3) 그 둘째는 허랑방탕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3절 하반절에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허랑방탕'은 어떤 기준의 한계를 넘어서 버린 낭비생활을 뜻합니다. 나중에 집에 있던 큰아들은 그 둘째의 허랑방탕을 설명하기를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눅 15:30)이라고 그 동생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 떠난 인생의 영적, 육적 타락의 생활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지위와 신분과 달란트들을 모조리 사탄에게 빼앗겨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그야말로 그 둘째는 '탕자'였습니다.

4) 그 둘째는 기생(寄生)하는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4절에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라고 하였습니다.
「다 없이한 후」라고 하였습니다.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설상가상의 비운을 맞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더 가난하고, 더 어렵게 되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는 할 수 없이 남에게 붙어살아야만 하는 기생(寄生)하는 인생의 걸음을 걷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오라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찾아갔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어떤 필요에 따라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고 말았습니다. '붙어산다'는 말은 주인에게 있어서는 귀찮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기생하는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돼지에게 붙어사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 하반절부터 16절에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쥐엄열매'는 돼지의 사료입니다. 결코 사람의 식료품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주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그 둘째는 육체의 마지막을 만나는 저주의 상태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결코 인생은 떡으로만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복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입니다(마 4:4). 
그 둘째!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절망과 싸움을 하는 탕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둘째! 그는 아버지(하나님)를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고', 결국 육체의 상징인 돼지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Ⅱ. 그 둘째에게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키다'라는 말은 '자기 자신에 와서 보니'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내 아버지'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절에 보면 '아버지'란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20절에는 '아버지'란 말이 두 번 나옵니다. 21절에는 또 다시 '아버지'란 말이 세 번 나옵니다. 22절에도 '아버지'란 말이 나옵니다. 

그 아버지는,

1) 「내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 상반절에 「내 아버지에게는」이라고 하였습니다. 결정적인 부자관계(父子關係)를 뜻합니다. 

2) 양식이 풍족한 품꾼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7절 하반절에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3) 그 아버지는 탕자의 소망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8-20절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곧 탕자의 소망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부요한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탕자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힘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의 모든 재활의 힘이요 용기요 소망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였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실로 위대한 회개와 재기와 재생의 힘이 아버지였습니다. 

4) 선수적(先手的) 사랑의 아버지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에 선수적(先手的) 아버지의 사랑을 봅니다.
①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먼저 보고 마중을 나갔습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을 떠나 버린 '그 둘째를 잊지 않고 늘 고대하며 기다린 사랑의 표'입니다.
  
② 측은히 여겼습니다.
이는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를 보여 줍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자식의 죄와 죄로 인해 입은 상처는 보이지 않고 오직 '그 둘째만', 자식만 보인 결과입니다.
③ 달려갔습니다. 
바로 사랑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입니다(요일 4:10, 요 3:16).
  
④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견딜 수 없는 사랑의 폭발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선수적 사랑(initiative love)입니다.
저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과 그 아버지 야곱이 30년 세월 후에 만났을 때, 그 부자(父子)도 이렇게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5) 온전한 회복의 아버지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1절에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습니다.
  
①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라고 하였습니다(눅 15:22). 
'제일 좋은 옷'이란 잔치나 연회 때 입는 고가(高價)의 옷을 말합니다. 이는 '신분회복'을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칭의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는 신분을 받게 되는 은총입니다. 
② 손에 가락지를 끼우라고 하였습니다(눅 15:22). 
이는 부와 영화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언약'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불변적 사랑의 언약이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③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하였습니다(눅 15:22). 
이는 그 둘째가 누리는 '자유'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당시 종들에게는 상상도 못하는 명예였습니다.

6) 즐거워하며 잔치하는 아버지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3-24절에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기독교가 소망의 종교인가?
과연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인가?
과연 기독교가 복음의 종교인가?
과연 기독교가 영생의 종교인가?
과연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요, 복음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해 주셨습니다. 
기독교는 죄인들을 위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앞에서 죄인들을 환영해야 되겠다고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어야 되겠다고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 분 앞에 사랑과 영접과 축복을 누리고 있게 되었습니다. 

- 아 멘 -  (석원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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