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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직한 농부처럼 (갈 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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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농부처럼 (갈 6:6-9)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나라와 필립핀의 농구 시합이 있었습니다. 중계를 들으며 하나님께 우리나라가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치자마자 하나님이 곤란하시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틀림없이 필립핀에서도 나 같은 놈이 하나님께 필립핀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터인데 하나님은 누구 기도를 들어 주셔야 할까를 고민하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실력이 조금이라도 나은 팀이 이기게 해 주세요.” 그게 공정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우리 팀 이기게 해 주세요’ 식의 기도를 잘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고 3 수능시험일이 되어도 특별기도회를 잘 하지 않는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공정하다’는 말이 좋습니다.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30대 어린 아들들에게 세습하려고 할 때 좀 도가 지나치다싶으리만큼 반대를 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그것이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교회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그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였다고 할지라도 상식적으로 30대 나이에 그만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동안교회에서 목회할 때 둘째가 군대를 갔습니다. 둘째가 배치 받은 부대에 아주 믿음 좋은 소령이 있었습니다. 부대의 교회가 낡아서 새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일 년 동안을 작정하며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제 둘째가 부대 배치를 받았을 때 그 분은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아들 면회를 갔을 때 정중히 예배당을 지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참 마음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군부대에 예배당을 건축하여야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제 아들이 있는 곳에 짓지 않고 우리 교회 출신 군목이 있는 곳에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아들 부대에 예배당을 지을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왠지 공정한 일이 아닌 것 같아 보여서였습니다. 일을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옳아보였던지 집사님 한 분이 헌금하여 둘째 아들 있는 부대에 예배당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때 참 신났습니다. 

저는 우리 하나님이 공정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신다는 것도 너무 좋습니다. 저는 그것이 공정하신 하나님의 성품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 중에 시편 128편의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128편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 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복 하면 수고하지 않고 횡재하는 것으로 보통 이해합니다. 수고하여 먹는 것은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 128편이 말씀하시는 복은 그런 횡재성 복이 아닙니다. 손이 수고한대로 먹는 것을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복 중에는 우리의 수고와 행위와 관계없이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특별한 것이고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수고하지 않았는데 무조건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복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약하게 만들고 게으르게 만들고 은혜를 모르게 하는 등 부작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가 이상적인 것 같아 보이면서도 사람과 사회를 나약하게 하고 부패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똑같이 분배 즉 복을 받는다는 것은 불공평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가장 소중한 가치가 공평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회주의는 세상에서 가장 제일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이념입니다. 

제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농사가 제일 공정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식과 정신과 가장 잘 맞는 일 중에 하나가 농사인 것 같습니다. 심어야만 나고, 심은 대로 나고, 땀 흘리고 수고한 만큼 얻습니다. 땀을 흘렸는데도 못 얻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농사는 하늘 즉 하나님과 동업이라는 말이 나왔을 것입니다. 땀을 흘리고 노력하면 언제나 성공하고 실패하지 않는다면 복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시나 마나한 존재가 되실 것입니다. 땀 흘려 노력해도 그것만으로는 우리 인생의 문제를 풀어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것입니다. 시편 128편의 말씀이 옳습니다. 땀 흘리고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입니다.(시 127편)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고 수고한대로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복입니다.

분명한 것은 물론 땀을 흘렸는데도 못 얻는 경우도 있지만 땀을 안 흘렸는데 얻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땀을 안 흘리고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기도를 열심히 했더니 성공하더라’ 그런 일은 원칙적으로 없습니다. 그것은 무당들이나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그것은 미신적인 종교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생각들이 우리 기독교 안에도 있습니다. 경계해야만 할 위험한 생각입니다.

서울대학교에 갈 실력이 없는데 열심히 기도했더니 서울대에 합격하였다고 하십시다. 그게 과연 복일까요? 아니요. 화입니다. 화 중에도 큰 화가 될 것입니다. 그 아이는 서울대에 가서 도저히 그 과정을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극도로 열등의식에 빠지게 되고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실력 없는 아이가 서울대에 가는 것은 복이 아니라 화입니다. 

서울대에 가서 충분히 공부하고 따라갈 실력이 있는데도 떨어지는 것은 화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고 이야기하지만 여러분은 공든 탑 무너지는 것 못 보셨습니까? 공들이지 않은 탑이 무너지는 것은 우리에게 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여 공을 들였는데 그게 무너지면 인생이 함께 무너질 수 있습니다. 화입니다. 그러므로 복은 우리가 최선을 다하였을 때 그 최선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그 최선을 지켜주셔서, 쉽게 말해 복을 받아 성공했어도 그것이 다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심어 많은 것을 추수하는 복을 받으려는 목적이 육체 즉 개인 자신 뿐이면 그 복이 결국 썩어 없어질 것이고, 심어 많은 것을 추수하려는 목적이 성령 즉 하나님이면 그 복은 영원할 것이며 영원히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성실한 사람이 많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성공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함으로 그 성공의 목적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대부분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육체입니다. 그런 사람은 소명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야망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렇게 많은 복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돈만해도 그렇습니다. 돈이 없으면 참 어려워지고 곤란해지지만 무조건 돈이 많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소위 크게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상상이 안가는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짓을 하고 살아도 다 쓰지 못할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사람들의 욕심은 무슨 짓을 하고 살아도 다 쓰지 못할 돈을 모으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피가 고여 흐르지 않으면 죽습니다. 돈이 오직 자신의 육체가 목적인 사람의 성공으로 한 쪽으로 지나치게 고이게 되면 자연 돈은 정상적으로 흐르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문제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욕심 때문에 그것을 나누지 못합니다. 소통시키지 못합니다. 흐르지 않는 모든 것은 썩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위하여 심는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둘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자기 육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욕심이 없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위하여 그것을 다시 심습니다. 

세상이 성공했으나 그 성공의 목적이 오직 자기 자신의 육체 뿐인 사람들에 의하여 썩어져 가고 있습니다. 신음하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9절에 보면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아니라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를 의미합니다. 

성령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이 악하고 그 결국이 썩어짐이라고 아예 심는 것과 많이 거두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많이 거두는 것이 악한 것이 아닙니다. 성공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목적이 자기 자신의 육체가 되는 것이 나쁘고 잘못된 것입니다. 그 목적이 성령이라면 많이 심을수록 좋고, 더 많이 거둘수록 좋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사이의 사람이 있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도 아니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도 아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냥 의와 정의를 위하여 심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성공과 부를 자신만을 위하여 가두어두지 않고 세상에 흘려 보내는 훌륭한 부자들이 세상에는 제법 있습니다. 공의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평화를 위하여 자신의 성공과 부를 잘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런 훌륭한 사람이 세상에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양식이 없어 굶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공적으로 탈북하여 남한에 온 탈북자들은 아무리 어려워도 밥을 굶지는 않습니다. 굶어 죽을 상황에서 굶지 않고 하루 세끼 밥을 먹는다고 사람이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 세 끼 밥을 먹지 못하고 굶고, 심지어는 죽는 것은 화입니다. 그러나 복은 화의 단순한 반대가 아닙니다. 밥 세끼를 못 먹는 것이 화라고 밥 세끼만 먹게 되면 그 화가 변하여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빈곤의 문제는 중요하지만 빈곤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화와 복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훌륭한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훌륭한 사람이 성령을 위하여 심는 성령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면 저들의 훌륭한 삶을 통하여 세상적인 복만 흐를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영적인 복이 함께 흐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사탄에 대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인간을 복되게 하는 것은 떡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육체를 위하여도 심지 않고, 성령을 위하여서도 심지 않고, 오직 그냥 의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심는 훌륭한 사람들은 떡 즉 빈곤의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빈곤의 문제가 해결 된 이후에 격어야 할 인간과 세상의 불행과 화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빌게이츠나 워렌 버핏과 같은 훌륭한 사람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자신들의 복과 성공을 나눔으로 그 복과 성공이 없어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은 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저들의 의가 믿음에 까지 이르지 못하여 저들의 그 훌륭한 삶이 또 역시 썩어 없어질 육체를 잠시 살리는데에만 쓰여지고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행복을 위하여 쓰여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얼마나 속상하고 안타까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속상하고 안타까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성령에 속하였다고 하는 세상의 수 많은 크리스천들의 삶이 그 세상적으로 훌륭한 사람들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사는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사람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 빌게이츠가 나오면 좋겠습니다. 성령 충만한 워렌 버핏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저들의 복과 성공이 세상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육적으로만이 아닌 영적으로 살리는 역사를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높은 뜻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를 표방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목적이 우리 자신 즉 우리 육체가 아니라 하나님 즉 성령임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만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높은 뜻 교회는 한국은행과 같은 교회를 표방합니다. 우리 높은 뜻 교회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성공한 교회입니다. 복 받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그 성공과 복을 우리 높은 뜻의 육체를 위하여 심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공이 우리의 복이 아닌 세상의 복이 되게 하기 위하여 부족하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설교하고 있는 높은 뜻 푸른 교회는 예배 처소가 아직도 확정되지 않아 주일 마다 음향 장비들을 뜯었다 붙였다하며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공을 우리의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우리도 얼마든지 편하고 좋은 곳에서 예배할 수 있을 터이지만 우리는 불편과 고생을 감내하면서 피조물이 고대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공과 복을 우리의 육체가 아닌 성령을 위하여 심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와 같은 수고와 노력이 썩어질 것이 아닌 영생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푸른 교회가 우리 높은 뜻 교회의 희년 정신과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 정신을 아주 잘 이어가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성장한 교회입니다. 성공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우리 한국 교회는 교회의 성공을 보다 나은 교회의 성공만을 위하여 투자합니다. 어리석은 농부 같아 보입니다. 그게 저는 참 많이 속상합니다. 세상의 훌륭한 사람들만도 못한 교회가 되어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점점 썩어져가고 쇠퇴해져 가는 것이 정말로 속상하고 안타깝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작든 크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성공과 복들이 오로지 여러분의 육체만을 위하여 심어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귀한 성공과 축복이 생명력을 잃어버린 채 여러분의 욕심 때문에 썩어져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사람들이십니까?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사람들이십니까? 

육체를 위하여 심는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욕심을 버리고 성령에 속한 자가 되어 자신의 성공과 축복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다시 심을 줄 아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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