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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잠자는 요나 (욘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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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요나 (욘 1:1-10)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을 가리켜서 질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질그릇은 조금만 닿아도 소리가 납니다.  어떤 사람은 생리적으로 자신의 옆에 어떤 사람이 앉는 것을 절대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만 오면 매 번 옆으로 피해 앉습니다.  또 어떤 질그릇들은 조금만 건드려도 깨지기를 잘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데 깨집니다.  쉽게 아파하고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질그릇은 쉽게 더러워집니다.  우리는 다 더러운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모두가 보잘 것 없습니다.  서로가 잘난 척하지만 사실은 별 것 아닙니다.  또 우리 그릇들이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풀도 마르고 꽃도 시들고 다 말라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그릇의 용도가 문제입니다.  그릇은 다 깨어지고 넘어지지만 그 그릇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에 따라서 그릇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좋은 것이 담겨 있으면 다 보배입니다.  나쁜 것이 담겨 있으면 쓸모 없는 쓰레기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배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금은보화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예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지식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런 것도 맞는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저는 인생의 보배에 대한 확실한 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의 질그릇에 제일 위대한 보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 이상의 보배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질그릇과 같은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질그릇과 같은 한 인생이 나옵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있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시작해서 요나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요나서를 살펴보는 가운데 현재 자신의 신앙 상태를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그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열린 귀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그렇습니다.  모든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그 심령에는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민족은 살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그 영혼은 살아있는 영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다시 살아나 회복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절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에 보면, 중요한 세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 "가서", "외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주신 선교의 사명입니다.

첫째,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부정적인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소극적인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안일한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구경꾼으로서 방관자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명령 앞에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일어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위대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누워서 절망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가만히 앉아서 구경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게으름에 뒹구는 종교는 더더욱 아닙니다.  죄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질병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사명을 향해서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신앙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무관심의 자리에서 팔짱끼고 구경하듯이 신앙 생활을 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나밖에 모르는 이기심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냄새나는 죄악의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을 붙잡고 일어나십시오.  일어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번째 명령은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라."  어디로 가라고 하십니까?  니느웨로 가라고 하십니다.  니느웨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원수의 나라입니다.  니느웨는 죄악이 가득한 도성입니다.  도저히 나와는 상관이 없는, 그리고 결코 가고 싶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은 내 뜻과는 정반대의 장소가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내 생각대로라면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가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아골 골짜기로 가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내 생각은 그것이 아닌데, 나는 그곳으로 가기가 싫은데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가라고 하십니다.  내가 그렇게 항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곳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는 두 가지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이는 교회가 있고, 또 하나는 흩어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흩어져 있다가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세상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생명을 걸고 성전에 모이는 시간을 지켰습니다.  예배 시간을 위해서 순교를 각오하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가정으로 흩어졌습니다.  직장으로 흩어졌습니다.  작은 공동체가 흩어져 모였습니다.  세상을 전도했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두 개의 구조가 잘 조화를 이루는 것이 교회의 능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한 교회는 모이기도 잘해야 하지만 흩어지기도 잘해야만 합니다.  미국 이스트 할렘가에서 목회를 하는 혹켄케이크라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 "The church in side out"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흩어지는 교회"라고 번역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안쪽이 바깥쪽으로 바뀌어 진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와서 받은 은혜가 뒤집어져서 세상에 나누는 것입니다.  뒤집어지는 교회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받은 능력이 복음을 전하는 현장으로 뒤집어져야 합니다.  교회의 은혜가 가정의 행복으로 뒤집어져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교회에서의 성령 충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뒤집어질 때에 거기에 참된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밀림에 삐릭 삐릭 소리를 내는 집바귀라는 벌레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집바귀라는 한 마리의 풀벌레가 사자에게 내기를 청했습니다.  "사자 임금님, 임금님의 목소리하고 내 목소리하고 누구의 목소리가 더 멀리 퍼지나 내기를 합시다."  사자가 가소롭기 짝이 없어서 콧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집바귀가 하도 보채니까 "그럼 한번 하자."  사자가 으르렁대며 쩌렁 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작은 풀벌레 집바귀도 삐릭 삐릭 소리를 냈습니다.

누구의 소리가 더 멀리 갔을까?  언덕 위에 올라가서 달려가는 토끼를 세워놓고 물었습니다.  "사자 소리 들었느냐구."  "잘 들었다구."  "집바귀 소리 들리느냐구."  "집바귀 소리 잘 들었다구."  골짜기 하나를 지나서 또 언덕 위에 올라가 나무 위에 매달려있는 다람쥐에게 물었습니다.  "사자 소리 들었느냐구."  "글쎄, 사자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고 안 들린 것 같기도 하구."  "집바귀 소리는 들었냐구."  "아, 집바귀 소리 잘 들었다구."  또 골짜기를 지나 언덕 몇 개를 넘어서 물었습니다.  "사자 소리 들었냐구."  "못 들었다구."  "집바귀 소리 들었느냐구."  "아, 지금 삐릭 삐릭 울지 않았느냐구."

한 마리 사자가 울면 다른 사자는 다 숨을 죽입니다.  그러나 집바귀란 놈은 한 마리가 울면 그 소리를 들었던 다른 집바귀가 울기 시작합니다.  이쪽 나무에서 집바귀가 울면 저쪽 나무에서 집바귀가 웁니다.  골짜기에서 집바귀 소리를 듣고 언덕 위에 집바귀가 웁니다.  또 저 너머 골짜기에서 집바귀가 웁니다.  순식간에 아프리카 밀림은 집바귀 소리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동안 하나님께서 한국교회 안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통하여 많은 영광을 거두셨습니다.  영광스러운 찬양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예배를 통하여, 한국교회에 몰려오는 수많은 영혼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거두셨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서의 영광이 이 벽을 뚫고 저 세상으로 외쳐지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이 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성도는 늘어났는데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여기서 들었던 말씀이 집바귀처럼 우리가 울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받았던 은혜와 영광이 우리 가정과 세상 속에서, 우리들의 직장 속에서, 우리들의 학교 속에서 나누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은 여전히 썩어가고 있고 변화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적극적인 종교입니다.  가는 종교입니다.  능동적인 종교입니다.  전진하는 종교입니다.  진취의 종교입니다.  창조의 종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결코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도 중요하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명은 한 사람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요,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죄악의 도성으로 가라.  썩어 냄새나는 멸망의 도성으로 가라.

세 번째, "외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잠든 영혼을 깨우고 죽은 영혼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자장가를 부르지 말고 크게 나팔을 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냥 외치지 말고 그곳을 향하여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멸망의 길로 향하여 치닫고 있습니다.  그 앞길을 가로막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이 길로 가면 망합니다.  거슬러 외치라는 말입니다.  썩은 물결이 굽이치며 내려갈 때에 역사를 거슬러서 복음의 뜻을 외치라는 것입니다.  죄악으로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저 세상을 향해 생명의 말씀을 외치라는 것입니다.  박수가 없어도, 갈채가 없어도, 때로는 조롱을 받아도, 비웃음을 받아도 외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자장가를 부르는 일이 아닙니다.  잠든 영혼을 깨우는 나팔이 되어야 합니다.  죽은 심령을 살리는 외침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인 저는 교인들에게 평안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싶은데 가끔은 하나님께서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설교를 하라는 음성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죄악에 신음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외치라는 음성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을 향하여 외치라고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사실 그럴 때에 저도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솔직히 저는 한 주간 동안 세상을 살면서 상처받고 외로워서 울며 나오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설교를 하고 싶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과 사람의 소리 가운데 갈등을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하여 외쳐야 합니다.  그곳을 향하여, 그 대상을 향하여 외쳐야 합니다.  물론 그럴 때마다 교인들이 아파합니다.  그 설교가 교인의 가슴에 부딪쳐서 되돌아옵니다.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해서 교인들의 가슴속에서 피가 나오는 설교를 접할 때면 얼마나 외로운지 모릅니다.  설교가로서 얼마나 고독에 겨운지 모릅니다.

아무런 아픔도 도전도 없는 단지 당신을 위로해 주고, 축복해 주는 설교만을 좋아하는 이 땅의 교인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내 잠을 깨우는 메시지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자장가와 거짓된 평안만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필시 하나님의 교회는 아닐 것입니다.  지옥으로 인도하는 파멸의 공동체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던 요나, 그러나 요나는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본문 3절을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기에서 "그러나" 라고 시작하는 시작의 첫 마디는 역적이라고 우리가 국어시간에 배웠습니다.  역적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앞에 있는 이야기를 뒤집는 이야기입니다.  앞에 있는 모든 내용을 반대하는 내용입니다.  앞에 있는 모든 내용을 거부하는 내용입니다.  3절에서 "그러나" 라고 시작하는 것에 요나의 비극이 있고 오늘 우리의 불행이 있습니다.

"그러나" 라는 단어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반역할 때 항상 쓰는 단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만 형편이 형편이라서 불순종합니다.  "그러나"는 불행입니다.  "그러나"는 유혹입니다.  주일마다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그러나"라고 응답하면 나는 망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나"는 조건부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니느웨만은 안됩니다.  일찍이 요나는 북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니느웨는 회개할 필요도 없이 망해도 싸다고 생각한 도시였습니다.  요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니느웨 성이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죄악의 도성, 그건 망해도 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니느웨 성을 향하여 외치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12만 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곳에 모인 우리들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 세상에서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무수한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오늘 본문 3절은 요나의 불행을 이렇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하려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내려갔다."  한 마디로 요나가 간 그 길은 도망가는 길이요, 내려가는 길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내려갔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지리적인 뜻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두더지처럼 내려가는 삶이 아니고 독수리처럼 올라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욥바로 내려갔고 배 밑에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망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러나"의 길은 낭비하는 길이지 절대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불순종의 길은 망하는 길이지 절대로 행복의 길에 도착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가 무엇을 낭비했습니까?  배 삯을 지불했습니다.  돈을 낭비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 돌아와 꼬꾸라졌습니다.  순종했습니다.  그는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사명을 낭비했습니다.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결국 불순종의 길은 낭비하는 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면 내려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낭비하는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이라면 필시 연단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때를 기다리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채워 주실 것입니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승전가를 부르도록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다가 당하는 일이라면 돌아오십시오.  지금 돌아오십시오.  속히 돌아오십시오.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십시오.  그 길만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이 사는 길입니다.

본문 3절에서 우리를 주목시키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마침"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내려가는데 마침 유혹의 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원하는 대로 길이 활짝 열렸다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타락의 길에도 준비된 배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걸어가는 길에도, 잘못된 욕망을 안고 살아가는 길에도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침 내 앞에 배가 준비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나를 영원히 멸망의 길로 인도하려고 준비된 배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계속 읽어 내려가다 보면 17절에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게 마침이란 단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대적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침 길이 열려서 그 길을 달려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고 입벌리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마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물고기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도망갔다.  배를 탔다.  그리고 요 자리에서 요나의 인생을 문닫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있을까요?  요나의 인생이 1절 2절과 3절에서 그의 인생이 끝장났다고 할지라도 할 말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요나를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아셔야 하는 것은 요나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통하여 니느웨성을 회개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게 그 기회를 주지 아니하고 다시 요나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당신의 가족과 이웃들을 구원하는 그 소중한 일들을 감당함에 있어서 내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하여 얼마든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연약한 성도들과 이웃들을 격려하는 일에 있어서 내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얼마든지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순종하지 않을 때 다시 기회를 주시고 또 기회를 주시고 또 들어서 이 시간에 나를 쓰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풍랑도 축복이었습니다.  대풍도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거친 파도 소리는 요나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요, 나가 진정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사랑의 음성입니다.  보십시오.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해 보려고 했습니다.  엉뚱한 곳으로 도망해 보려고 했습니다.  다시스로 가려고 안락의 길을 선택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이 세 가지 시도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달려가면 하나님이 앞에서 길을 막습니다.  뒤에서 당깁니다.  수많은 풍랑이 옆에서 나를 찌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가면 하나님이 앞장 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내 곁에서 나와 동행해 주십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의 보증이 되어 주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기 위해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옵니다.  지중해에는 언제나 있었던 바람이니 그냥 그러다가 그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부니까 시원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풍이 일어납니다.  배가 금방이라도 뒤집혀 질 듯 깨질 듯 요동을 칩니다.  조그마한 어려움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늘 있던 인생의 어려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점점 거세어 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도록 맞고 새벽에 얻어터진 다음에 돌아오지 말고 산들바람이 불 때 주님 앞에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먹장구름을 만나서 만신창이가 된 다음에 돌아오지 말고 산들바람이 불 때 주님 앞에 속히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풍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당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금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요나를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절대로 여러분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뜨겁게 고백해 놓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신앙생활이 냉랭해져서 싸늘한 고드름처럼 식어진 가슴을 안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헌신해야겠습니다."  그렇게 작정해 놓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게으름 속에 빠져 있는 분이 계십니까?
젊은 시절의 서원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분이 계십니까?

그때 일어나는 풍랑 앞에서 이제 더는 고집을 부리지 마십시오.  흔들거리는 인생의 배 안에서 무릎을 꿇으십시오.  건강의 적신호가 오는 인생의 배 안에서 부르짖어 보십시오.  가정에 우환의 비바람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보십시오.  "아버지, 나를 살려주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 보십시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요나가 탄 배가 깨어져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거의 깨지게 된지라."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고통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거친 풍랑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풍랑을 통하여 더 큰 축복으로 나아가는 성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회개하지 않는다면 당신 때문에 당신과 함께 인생의 항해를 하고 있는 주변의 사람들이 극심한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풍랑 앞에서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을 거의 초죽음에 이르도록 하실 수도 있습니다.

신하들은 처절히 피를 흘리며 전쟁터에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낮잠을 즐기고 두 눈을 뜨고 보니 유혹의 그림이 앞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무서운 유혹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또 어떠했습니까?  나라를 살리라고 그에게 능력을 주었습니다.  긴 머리에 힘을 주었습니다.  나실인으로 살았습니다.  성령이 감동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품에서 잠들어 있다가 삼손은 두 눈이 빠지고 멸망해 갔습니다.  은혜로운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가슴이 벅차기 시작했습니다.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시간에 유두고는 창틀에 걸터앉아 졸고 있었습니다.  창틀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는 사람의 영혼을 아무런 감각이 없도록 만듭니다.  우리의 양심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보십시오.  지금 배 위에서는 태풍 때문에 모두가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양심을 마비시켜 버리고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지금 다윗의 부하들은 전쟁터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데 그는 양심을 버리고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부하의 아내를 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지금은 자다가 깰 때라고 했습니다.  영혼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죄악된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십시오.  우리가 외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입니다.

본문 6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선장이 잠자는 요나를 깨우고 있습니다.  잠자는 성도를 불신자들이 흔들어 깨우고 있습니다.  잠자는 세상을 깨워야 할 성도들이 졸고 있을 때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절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가끔 민족 앞에 기도하도록 요청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온 민족이 기도해야 될 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끔은 한 공동체에 기도하도록 요청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그 공동체가 기도해야 될 때이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교회가 함께 기도하자고 선포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향하여 준비해 놓으신 신령한 은혜와 넘치는 풍성한 축복이 있기 때문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자리에 모이면 기도하는 자리에서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는 그 자리에서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심령이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사업이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요청할 때는 함께 기도를 해야 살아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도다.  사랑하는 자여, 이제 잠에서 깨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으로부터 약속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도무지 그것을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감격과 기쁨의 눈물이 없습니다.  왭니까?  우리도 요나처럼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중요한 것은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오십시오.  영혼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기도의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사명의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그리고 아직도 포기할 수 없는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 보십시오.  그러면 새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축복의 잠이 깨어날 것입니다.  은혜의 잠이 깨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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