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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동행 (히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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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동행 (히 11:5)


창세기에 나타난 계보는 아담의 장자 가인의 계보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벨이 죽고 난 다음에 다시 얻은 셋의 계보로 나타납니다. 아담의 계보 중에 의로운 자손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아담의 7대 자손 에녹이라는 인물입니다. 
에녹이란 이름의 뜻은 '시작하는 자'입니다. 에녹은 야렛의 아들이자 므두셀라의 부친으로 신실한 삶을 살다가 죽음 없이 산 채로 승천한 사람입니다. 
아벨에게서는 믿음의 예배를, 에녹에게서는 믿음의 생활을, 노아에게서는 공개적이고 간증적인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에녹은 노아에 앞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혹은 동행할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체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간을 무시하고 입교 하자마자 교회에서 곧 바로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직무를 맡는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로 입교한 자에게 무엇을 맡기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6절에 『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라고 했습니다. 

Ⅰ. 에녹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었습니다. 

창세기 5장 22절에 『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라고 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심으로 그가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고 했습니다. 
여기에 '동행하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할라크( )는 '걷다'라는 뜻입니다. to walked 거닐다, 혹은 산책하다는 뜻도 있습니다(삼하 11:2). 또 미가서 6장 8절에 『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할 때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창세기 6장 9절에 『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라고 할 때도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윗도 시편 16편 8절에 『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뜻대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느냐고 할 때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와 함께 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구에 의해 함께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에 의해서 산다는 말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에녹의 삶이 하나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곧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만을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의 품속에서 생활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동안 어려움도 많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곳에는 악이 관영하기 때문입니다. 
노아 홍수 전에 사람들의 죄가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이러한 죄악의 창궐함 속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300년 동안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에녹과 함께 했기 때문에 에녹의 삶이 의로운 삶이 된 것입니다. 

Ⅱ. 에녹의 삶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 시게 하는 삶이었습니다. 

본문 11장 5절에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 '보다'(see)라는 단어는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가 죽음을 보지 않았다는 것은 무덤으로부터 탈출한 것 그 이상을 말합니다. 
죽음은 죄의 값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법을 거역한 것에 대한 저주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더 나은 미래를 확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녹이 죽음 없이 산 채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의 권세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믿음의 생활입니다. 좀 어렵게 말하면 보이는 사물 위로 옮기어져 보이지 않는 사물에 의해 점령되어진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라고 했습니다. 
에녹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했습니다. 

생명의 떡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8절에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고 했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로 오시는(고전 15:12-20) 이것입니다. 이것을 에녹은 믿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이것을 믿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아니합니다. 이 믿음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변함없는 동일한 미래적 가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에녹이 하늘로 옮겨진 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적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영의 역사로 말미암아 황홀경( 惚境)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옮겨진 삶, 보이는 것으로부터 옮겨진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11장 6절에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철저히 무관심할 때 그는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고 증가시키지 않습니다. 따라서 타계에 의해 옮기워진 생활을 경험해야 합니다. 

에녹이 예언하기를 유다서 1장 14-15절에 『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생활은 시간적으로 갭(gap)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거룩한 인간의 삶이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에녹에게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기를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존중히 여기십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 『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워졌습니다. 믿음은 항상 계시를 전제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은 것은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댓가입니다. 그는 하나님만으로 즐거웠습니다. 그러면 여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히 11:6).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충족성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은 피조물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속성이 모든 것에 완전하시고 충족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 찾는다는 말은 간절한 기도를 말합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으로 인해서 어떤 일을 도모하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사정을 모르시는 것도 아니며 인간들에 의해 어떠한 정보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 응답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사상에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신의 능력을 철저히 부정하고 하나님 자신의 전능을 인정하고 무엇을 요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셋째는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문맥상으로 보아 상은 기도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기도할 때 응답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자 구원 완성, 즉 교회 운동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충족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8절에 『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시도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가인입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동력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구원을 이루게 하고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고 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에 『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고 했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에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아더 핑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네 가지를 협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신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4장 4절에 『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 『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고 했습니다. 

②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21절에 『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라고 했습니다. 

③ 행하는 방법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겸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 했습니다. 
진실함입니다. 이사야 38장 3절에 『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즐거이 행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④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 했습니다. 
믿음은 이 네 가지의 요구가 일치해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고 했습니다. 

Ⅲ. 에녹의 삶은 세상 끝 날의 일을 증거 하는 삶이었습니다. 

본문 11장 5절에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에녹은 노아 홍수 심판 전에 승천했습니다. 에녹의 승천은 심판과 함께 죽은 자의 부활이 먼저 있고 마지막 때 살아 있는 성도는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는 사실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0-41절에 『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메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① 구원 받을 자와 구원 받지 못할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② 두 종류의 사람들이 육신의 사업을 서로 섞여서 한다는 의미입니다. ③ 예고되지 아니한 돌발적인 재림이라는 말입니다. 

에녹의 삶은 예수님의 생애의 예표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어 구원받을 성도들의 예표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였던 삶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이 지상의 삶 자체가 곧 죄악을 책망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살아나시므로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승천하시면서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했습니다(요 14:2).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했습니다(요 14:2). 그리고 산 채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행 1:9).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므로(히 12:2)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와 함께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요 5:22; 살전 4: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걷는다는 말입니다. 생각만 해도 감격적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동행(同行)이라는 말은 동업(同業), 동역(同役), 동사(同事), 동지(同志), 동맹(同盟)과는 전혀 다르지 않지만 이보다는 철저하고 친근감 있는, 일체성을 보여주는 근원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내가 지배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생활에서 그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교회적 삶, 곧 교회중심의 삶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환경적인 일체의 것들을 초월합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인간의 최고의 목적인 동시에 삶의 의의이자 미래적 가치입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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