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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은 어떻게 오는가? (롬 10: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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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어떻게 오는가? (롬 10:13-17)


미국에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기도하는 도시가 어딘 줄 아십니까. 라스베가스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우리 마음이 좀 뜨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경우에 기도하는 동기가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결국은 이기적인 소원을 따라서 구한다는 얘기이기 때문에. 경건이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의 욕심을 포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찌를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이루리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에요. 그런데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뜻이라면 구태여 그걸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어차피 이루어질 텐데.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구하는 이유는 아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구함으로 당신의 마음을 바꿔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용돈을 줄 계획이라면 자식이 그걸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자식이 용돈을 달라고 할 때는 부모의 계획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구함으로써 부모가 마음을 바꿔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러한 면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기도를 하시고 기도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그 말씀들의 내용이 서로 상충되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다른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한편으로는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면서 기도하는데 너희 천부께서는 이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아주 중요한 말씀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종류의 말씀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대단한 말씀이에요. 이것은 백지수표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이와 비슷한 말씀으로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시리라’ 이 말씀도 사람이 믿음으로 합심하여 구하면 무엇이든지 자기의 소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그런 백지수표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는 뭐라고 기도하셨느냐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그러니까 예수님의 교훈과 말씀을 보면 적어도 세 종류의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 다른 내용이에요.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느냐. 일치시킬 수 없습니다. 일치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왜 사람들은 일치시킬 수 없는 것을 억지로 그렇게 하려고 하느냐. 왜 서로 모순되게 보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억지로 그것을 짜 맞추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와 같이 서로 긴장상태에 놓여있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확실하게 알게 하는 말씀도 있지만 ‘너희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진리입니까. 둘 다 진리에요. 한편으로는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도 있고 구원의 즐거움을 맛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나님 앞에 내 멋대로 경솔하게 행동할 수가 없고 때로는 구원의 즐거움을 노래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룰 수밖에 없는 그런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게 다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제가 오래전에 신문의 신앙섹션에 어떤 나이든 목사님이 쓰신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제가 어린 나이에 그것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동의하고 한편으로는 반발을 하는 면도 있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분의 말씀에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분이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갔을 때 과연 ‘하나님, 내가 믿었으니 나에게 구원을 주옵소서.’라고 주장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느냐. 그 자리에 가서는 아마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경적인 말씀입니다마는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자기의 믿음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구원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얘기인데 그러니까 우리가 일평생 믿고 수고하고 많은 일을 하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 섰을 때는 하나님께 내보일 것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우리가 수리를 할 때 여러 연장이 필요한 것처럼 기도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 용도에 따라서 그 기도의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헌신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항복한다는 뜻입니다. 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우선순위. 또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리라’ 이것은 합심기도의 능력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이것은 믿음의 위대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도대체 이런 믿음, 기적을 낳는 믿음, 능력의 믿음은 무엇이고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 먼저 믿음이 아닌 것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한 소원은 그 자체가 믿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강한 소원을 갖고 있기만 하면 이루어질 줄로 생각하는데 강한 소원이 유익할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가 믿음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과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또한 긍정적인 사고 그 자체가 믿음인 것은 아니에요. 긍정적인 사고를 가르치는 교회도 많습니다. 유리잔에 물이 반이 있을 때 반이 비었다고 하지 말고 물이 반이나 있다고 생각하라. 그건 우리 삶에 유익한 상식적인 인생의 지혜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믿음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이냐. 믿음은 우리의 의지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믿고 싶어 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내가 기적을 낳을 믿음을 원한다고 해서 당장 그런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사람의 의지에 좌우되는 게 아니고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무엇을 통해서 주시느냐. 말씀을 들음으로써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바울이 믿음이 어떻게 오느냐 하는 원리를 말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전하는 사람이 없이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이걸 말하기 위해서 본문을 썼는데 바울의 성격대로 아주 치밀하고 합리적으로 논리를 전개하다 보니까 전해주는 사람이 없이는 어떻게 들을 수가 있으며 또 가는 사람이 없이는 누가 전할 수 있으며 보내는 일이 없이 어떻게 갈 수 있느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faith cometh by hearing.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라고 되어 있고 ‘나며’라는 말은 작은 글씨로 되어 있습니다. 그건 원문에는 없는 것이라는 얘기에요. 그냥 ‘믿음은 들음에서’라고 써요. 그런데 그 문장을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편집자들이 ‘나며’라는 단어를 삽입한 것입니다. 그러나 뜻은 마찬가지에요. 믿음의 소스는 어디냐. 들음. 듣는 데에서 믿음이 생성됩니다. 그리고 그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비롯될 수 있다는 놀라운 원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듣고 믿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기적을 보면 믿겠다고 생각하지만 보는 데에서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보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도 보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도 봤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 모든 사람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어요. 보는 데에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적을 봐도 그것은 사람들은 놀라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게 반드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병에서 나았다고 가정해 보세요.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구나! 라고 생각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저거 가짜 아냐 ? 연기하는 거 아냐? 아니면 저건 암시에 의한 걸 거야. 심지어 원래 안 아팠을 거야. 이런 식으로 사람마다 해석이 다릅니다. 보는 데에서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기적을 보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믿음이 있어야 기적이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믿음이 있고 기적을 기대해야지 내가 기적을 보면 믿음이 생길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지 가서 기적을 행해서 믿게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잘 보여주는 한 사건이 있지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사건입니다. 밤중에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느냐면 ‘주님, 주님이시면 나를 명하여 물 위를 걸어 주님께 오게 하소서’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오라고 말씀하셨어요. come이라고 명령하셨어요. 그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냐.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믿음이 어디서 왔느냐. 예수님이 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라고 하신 그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권세와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오라고 말씀하지 않았는데 베드로가 지레 배에서 내렸다면 물에 빠져 죽었을 것입니다. 

믿음과 믿음이 아닌 것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은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도를 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아는 데에서 우리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믿음이 우리가 원할 때 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우리가 원하고 기대할 때 오는 게 아니고 언제 올지는 모릅니다. 하나님의 때에 옵니다. 내가 필요할 때 오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필요할 때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정한 때에 하나님이 정하는 방법으로 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믿음으로 기다려야 됩니다. 은혜의 때를 사모하고 기다려야 됩니다. 낮잠 자다가 은혜 받았다는 사람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은혜를 사모하고 말씀이 있는 곳을 사모하고 모이기에 힘쓰고 그러는 중에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야곱의 경우를 보면 야곱이 벧엘에서 해가 져서 돌을 베개로 하고 자는 중에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장차 그에게 행할 모든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그 장소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야곱이 돌을 베개로 하고 잤다는 말은, 돌이 상징하는 것은 고생과 고독함과 미래에 대한 염려입니다. 그의 인생의 가장 어두운 순간, 가장 고독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일생에 걸쳐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언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실지 알 수 없어요. 다만 내가 행복하고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이 있고 그럴 때보다는 내가 외롭고 고독하고 힘들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어느 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장막 밖으로 불러내셔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게 하시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느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첫 번째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첫 번째 사람. 이 믿음이 어디서 났느냐.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말씀에서 난 것입니다. 들음으로써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보면 그가 젊은 날에 많이 방황하다가 어떻게 회심하게 됐는지를 말하고 있는데 어느 날 낮에 어거스틴이 침상에 누워 있다가 창밖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 가사가 마치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렸어요. 그 가사 내용이 일어나서 읽으라는 내용이었어요. 일어나 읽어라. 아니,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그런 가사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려고 하니까 그런 노래를 부르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침상에서 일어나서 성경책을 펼쳤는데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성경구절이 그의 눈에 비쳤어요.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이 말씀을 읽는 순간에 어거스틴의 마음에 믿음이 생겼어요. 그리고 회심했어요. 어거스틴이 성자가 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도 비슷합니다. 요한 웨슬리도 신앙생활을 한지는 오래됐지만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하고 있었던 중에 어느 날 올더스게이트라는 곳의 예배당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자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읽더랍니다. 그 주석을 듣는 중에 요한 웨슬리의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하고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요한 웨슬리가 회심해서 장차 영국의 위대한 부흥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경험의 공통점은 말씀을 듣는 중에 신비한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이에요.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열일곱 살에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겠다고 했다가 그것을 보류하고 십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어요. 이제 나이 스물여섯에 진로에 대해서 고민하게 됐는데 어느 날 우연히 성경책을 펼쳤는데 로마서 11장에 있는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구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그 말씀이 요즘 말로 하면 필이 꽂혔어요. 그 말씀이 저에게 확 다가오면서 아, 주님이 나를 목사로 부르셨구나 하는 것을 확신하게 돼서 그게 계기가 돼서 제가 신학교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제 개인의 신상에 대해서 이런 경험을 한 것은 한 열 번도 되지 않는다고 보지만 그러나 저는 설교 준비할 때마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영감을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저의 바람은 여러분의 삶에 이런 경험이 더 많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성도들은 교회 나온 지 얼마 안됐는데도 불구하고 ‘목사님, 저는 설교 들을 때마다 제 얘기를 하는 것같이 들립니다.’ 이런 말씀하는 분이 있고 어떤 분은 심지어 ‘누가 내 얘기를 목사님께 전해드렸나?’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아무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제가 듣지도 않거니와 누가 할 일 없이 아무개 집사님이 요즘에 남편이 속을 썩인다느니 사업이 어렵다느니 누가 그런 얘기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분은 설교를 들을 때마다 주님의 품에서 주무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떻게 똑같은 상황에서 그럴 수가 있는지. 하나님의 은혜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TV 보다가 은혜 받는 경우 별로 없구요, 또 밥 먹다가 은혜 받는 사람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설교를 듣든 성경을 읽든 성도와 믿음에 대해서 대화를 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중에 신비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우리는 모릅니다. 마치 신랑이 언제 올 줄 모르는 것처럼. 그러나 신랑이 언제 올 줄 모르기 때문에 다섯 명의 지혜로운 처녀가 무엇을 준비했습니까. 기름을 준비했지요. 등에 기름을 준비한 이유는 신랑이 언제 올 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언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지, 언제 말씀하실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깨어서 기도하고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행을 가기 위해서 준비해야 하고 시험을 보기 위해서도 준비해야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든 하나님을 만나든 하나님의 사명을 받기 위해서도 준비해야 됩니다. 준비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준비했어요. 그 준비라는 것이 반드시 부동산을 찾아가서 건물을 계약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준비하고 믿음을 준비하고 제 신앙을 준비하고 경험을 쌓고 이런 게 다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 준비가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꿈이 클수록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정치든 사업이든 교육이든 큰 뜻을 품은 사람은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십년, 이십년, 오십년, 백년 앞을 내다보고 내가 직접 하지 못할지라도 내 후손과 후손의 후손이 할지라도 누군가가 준비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백 년 전에 고속도로를 닦은 것을 지금 후손들이 이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우리 국가를 위해서도 지금 당장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고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것이 우리가 살 길이요 민족이 살 길입니다. 우리 후손이 살 길은 부모가 지혜롭게 앞날을 내다보고 기도로 준비하고 지혜와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으로 준비할 때 앞으로 우리의 후손들이 두고두고 풍성한 열매를 따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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