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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현실과 신앙사이 (창 25: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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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신앙사이 (창 25:27-34) 

 
인류 역사는 위대한 신앙과 함께 그 신앙이 삶 속으로 깊게 들어간 두 수레바퀴에 의해 움직여나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새까만 숯에 불을 가져다 붙이면 숯 속으로 불이 들어가서 새빨간 불덩어리가 되고 이렇게 새빨간 불덩어리가 된 숯을 모아놓으면 굉장한 일을 해 내는 것입니다. 불이 숯 속으로 들어갔는가 하면 숯이 불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처음에는 둘이었지만 나중에는 하나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나누어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둘이 하나가 되어 버리면 굉장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과 믿음이 따로 있으면 그 믿음은 쓸모가 없고 믿음 없는 생활은 하나님 앞에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에 출석을 잘 한다고 할지라도 불신자의 생활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활 속으로 들어가고 생활이 믿음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가 되면 굉장한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믿는 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믿음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우리의 믿음은 생활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만큼 치사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부도위기를 만난 사람을 이용하여 등쳐먹고, 실직한 자들을 이용하고, 노인들을 이용하여 사기 치는 사람들은 정말 치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이라는 인간이 그런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자기 형이 배가 고파 허기져 있을 때 그것을 이용하여 장남의 명분을 요구한 파렴치한 자입니다. 남도 아니고 혈육을 나눈 친 형에게 어찌 그럴 수 있는지요! 요구할게 따로 있지 어찌 죽 한 그릇 주고 동생이 형이 되려고 하는지, 그것도 형의 배고픔이라는 약점을 이용해서, 형제의 의리는 눈꼽만큼도 없는 인정머리 없고, 사람으로서 있을 수 없는 天下에 나쁜 인간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이나 에서 두 형제는 모두 실패한 인간상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서 교훈을 받고자 하는 것은 에서의 경우입니다. 에서의 행동이 경솔한데가 있지만 그의 형편을 우리가 살펴볼 때 당장에 배고픔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지금 그에게는 당장에 눈앞에 벌어진 현실이 더 중요했습니다. 내게 주어진 현실과 그리스도인의 명분이라는 것 때문에 오는 갈등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럴 때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다 이해하시지!' '설마 하나님께서 그것까지고 책망이야 하시겠나!'하면서 적당히 넘어간 적은 없는지요? 에서의 경우를 볼 때 그런 현실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결과는 에서가 땅을 치며 통곡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창세기27:38). 

오늘 본문에서는 에서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서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음을 찾아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절대로 바꾸면 안 되는 것을 말씀하신다. 아무리 현실이 어렵더라도 그리스도인이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에서가 가지고 있는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 축복의 조상으로 선정하시고,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에서로 이어지는 믿음의 계보이기에 그의 장남의 명분은 일반 장남의 명분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절대로 가볍게 여기거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보였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계보로 이어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이 굶어 죽을 지라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설 수는 없습니다. 

어떤 분은 내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신앙을 포기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또 다른 어떤 것을 찾아가는 것은, 에서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이해하시는 폭이 우리보다 훨씬 크지만 우리가 현실의 문제 때문에 믿음의 계보를 가볍게 여기는 자에게는 후회와 통곡밖에 돌아 올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현실의 문제 해결을 위해 절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신앙의 계보를 가볍게 여기거나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확실히 보장된 미래가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히브리서12:2 "믿음의 주요 도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보좌 우편에 않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가 그에게 너무 힘들고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현실은 곧 괴로움이었습니다. 십자가를 팽개치고 싶은 마음이 한 두 번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미래에 보장된 영광의 보좌를 바라보며 끝까지 참고 나아감으로 지금 그 영광에 보좌에 계십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償)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3:14) 요셉은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신 미래를 바라보며 그 많은 시련과 고통과 모함을 견뎌낼 수 있었고, 결국 그는 그 미래가 현실에 이루어지는 복을 누렸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확실히 보장된 복된 미래가 있습니다. 현재의 고통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끝맺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로마서8:28) 

여러분! 현실과 신앙 간에 오는 갈등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겪은 것이고 유명한 우리의 믿음의 모든 선배들이 겪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사도들도 승리한 믿음의 선배들도 절대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보장된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실을 극복하여 승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어야 합니다. 때로는 외적인 면으로 우리의 신앙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인 신앙이 온전하지 못하면 아무리 외적인 신앙이 좋아 보일지라도 위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신앙이 참되고 진실 된 신앙인지 분별하기 쉽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좋아 보이는 신앙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외식적인 경우도 있을 것이고, 또한 별 볼일이 없는 신앙인 것 같아도 진실 된 신앙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현실과 연결되게 하라. 우리는 분명 예수 믿는 크리스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믿음은 느낌이 아니다. 감정이 충만하다고 믿음도 충만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말만을 앞세운 믿음은 요란한 빈 수레이기 쉽습니다. 또한 믿음을 하나의 사상이나 정신세계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믿음에 대한 많은 지식이나 이해 자체가 믿음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성경이 증거 하는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나 자신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믿음은 행함을 통해 훈련되고 성장합니다. 운동선수가 한 팀에 소속되면 그 소속의 의미로 유니폼을 입게 됩니다. 그러나 유니폼을 입은 것이 곧 훌륭한 선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소속이 인정되어 그리스도인이라는 유니폼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거듭되는 훈련과 실전을 통해 선수로서의 실력이 쌓아져야 합니다. 행함 없는 믿음이란 경기에 출전하거나 훈련을 받는 일없이 유니폼만 입고 다니는 운동선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동할 때 개발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고여 있는 물이 썩고, 사용되지 않는 기계에 녹이 슬듯이 행함 없는 믿음은 쇠퇴하고 연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행함을 통해 쓰여지고 활용되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값진 보물을 창고에 쌓아두고서도 행함이 없기 때문에 가난한 생활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한 믿음은 이 같은 훈련과 검증의 과정을 통과할 때 참으로 자기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믿음의 은혜와 능력이 증거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행동은 말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합니다. 우리는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신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행동합니다. 기도만 하고 그만이어서는 곤란합니다. 믿는다고 외치는 데에만 그쳐서도 안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믿고 생각하되, 모든 것이 내게 달려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행함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도 인정하시지 않으시고, 나에게는 성장이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너무나 열심히 목회하면서 자기 건강을 돌보지 않다가 큰 병에 걸려 수술을 여러 차례 하신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질병을 낫게 하시는 치유의 하나님, 고치시고 채우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지만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손 댈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잠도 자지 않고 쉬지도 않는 사람은 절대로 고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고 자기 노력도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간섭과 능력이 나타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네 종류의 사람 

카네기는 네 종류의 사람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 네 종류의 사람이란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무지한 사람,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보통의 사람,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나태한 사람, 마지막으로 아는 것을 행하지 않는 자기 기만적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서도 이를 행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21:22)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말씀을 지키고 믿음을 행하는 일에 자주 실패합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실천적인 적용의지는 전혀 없이 그저 말씀을 듣는 것 자체만을 기뻐하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의 무능력과 한계를 핑계대면서 말씀대로 살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을 말합니다. 세 째는 말씀을 듣거나 읽는 것을 하나의 의무나 형식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열심히 듣고 읽은 후에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착각하며 스스로 만족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분명히 장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장애요인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믿음을 생활에 적용하고 행동화할 수 있을까요? 믿음을 의식화하고 생활화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믿음의 습관을 가지는 것입니다. 몸과 생활에 배어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반복되어 나오는 행동을 우리는 흔히 습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습관은 제 2의 천성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모든 면에서 항상 습관처럼 저절로 우러나올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에 따라 판명된 존재이다. 따라서 우수성이란 단일 행동이 아니라 바로 습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말씀묵상이나 기도와 봉사와 섬김 등을 일정한 기간을 정해놓고 그 기간에만 열심히 하고 그 다음에는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거룩한 습관으로 할 수 있을 때 많은 열매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성품은 습관의 복합체 

사람의 성품은 근본적으로 습관의 복합체라고도 표현됩니다. 또한 행복과 성공의 근거가 되는 올바른 원칙을 내면화한 것이 바로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의 씨앗을 뿌리면 행동의 열매를 얻게 되고, 행동의 씨앗을 뿌리면 습관의 열매를 얻게 됩니다. 

또한 습관의 씨앗은 성품을 얻게 하고, 성품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습관화의 위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습관이라는 밧줄을 매일같이 짜고 있으며 일단 짜여진 밧줄은 쉽게 풀어지지 않습니다. 습관을 정복하면 인생을 정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습관을 믿음으로 정복할 때 믿음의 행동화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우리 생활 가운데 습관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로 관점을 바꾸라. 
우리는 종종 "믿습니다" 하고 교회 문을 나서면서 바로 염려와 근심으로 불안해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믿음은 환경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마음과 감정을 믿음으로 다스리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음을 행동화, 습관화하는 데에 결정적인 장애가 되는 것은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일단 낙심이 되고 불안해지기 시작하면 믿음을 행동화한다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이 점에 있어서 우리의 관점의 변화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보통 감정에 지배당하기 쉽습니다. 마음이 우울해지고 걱정이 되면 표정과 말, 행동까지도 우울하고 절망적인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행동이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입니다. 시시 때때로 찾아드는 부정적인 감정에 우리의 믿음을 내어 주어서는 안 됩니다. 감정과 환경을 극복하고 믿음을 살리는 길은 먼저 믿음의 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들수록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행동을 유도하도록 하십시오. 가만히 앉아서 감정과의 싸움만 할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행동해야 합니다. 믿음의 말을 공언하고 믿음의 찬양을 드리고 웃고 기뻐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또 할 수만 있으면 남을 도와야 합니다. 믿음의 행동이 믿음을 낳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적극적인 믿음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회복시키고 지켜 나가도록 하십시오. 여러분! 믿음이 현실과 연결되고 습관화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부정적인 감정을 접고 무슨 일을 하든지 동기를 나의 이기적인 모습을 채우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어 보십시오. 그러면 진정 믿음의 성공자가 될 것입니다. 

 
인생의 표지판인 행동원칙을 만들라.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 잭 웰치 회장은 경영철학과 행동원칙이 분명함으로 성공한 분인데 그의 행동원칙과 경영철학 몇가 지를 소개합니다. 먼저 종업원들의 팔, 다리만 아니라 그들의 두뇌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고 두 번째는 기업가는 자신의 '열차'에 탄 종업원들에게 종착역에 꿈이 있음을 확신시켜 주어야 하고 세 번째는 부서 간, 조직 간의 벽을 없애고 학습의 분위기를 만들어 거기서 나오는 아이디어를 이용, 신속히 실행에 옮겨야만 미래시대에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뚜렷한 가치관 없이 아랫사람을 압박해 목표 수치 달성에만 얽매이는 사람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원칙에 따라 삶이 습관화됨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모델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에 대한 원칙을 가질 때 우리 행동은 정확성과 일관성을 갖게 됩니다. 행동원칙은 어려운 상황이나 흥분된 감정 속에서 주요한 결정을 할 때 혹은 어떤 일을 판단할 때 소중한 가치와 기준이 되어줍니다. 그래서 혼란이나 갈등의 범위를 줄이게 하고 목표를 향하여 명확히 나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들은 얘기로만 길을 찾아가는 것과 정확하게 그려진 약도를 가지고 길을 가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다릅니다. 또 표지판 없는 길을 간다면 만나는 사람마다 길을 묻고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곳곳에 표지판을 세워두면 우리는 손쉽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행동의 원칙은 이렇게 우리 인생의 약도이자 표지판 역할을 해줍니다. 

우리 행동의 근본적인 원칙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고유한 원칙을 세워놓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인생의 행동원칙만 철저하더라도 우리는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행동원칙을 세우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인생철학 신조를 자기 사명선언서로 작성하는 일입니다. 자기 사명선언문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하는 성품적인 면과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가' 하는 업적에 관한 사항이 기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와 행동이 바탕을 두고 있는 가치와 원칙에 초점을 두고 있어야 합니다. 문서화된 개인헌법이라 할 수 있는 자기 선언문을 갖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하려하며, 무엇을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변함없는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진리와 원칙이 습관적으로 자리를 잡을 때 다양한 상황에도 믿음의 행동으로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시험을 마치고 대학을 꿈꾸는 수험생은 더더욱 이러한 자기 사명선언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믿는 자로서 자기 사명선언서가 있습니까? 없다면 이 기회에 인생의 약도이자 표지판인 행동원칙을 만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마치 비전에 따라 움직여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과 생활이 만나는 자리로 오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신앙은 실제적이기보다는 관념적이며, 생활적이기보다는 이론적입니다. 그래서 가슴보다는 머리로서 자기의 신앙을 확인하려 합니다. 행함보다는 믿음의 세계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갈등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문제는 바로 신앙이 생활의 자리에까지 이르지 못한 데 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졌던 목회적 갈등도 이와 비슷합니다. 처음에 우리는 열심히 성경 공부했고 제자 훈련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성장도 했고 열매도 많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도달했을 때 한계를 느꼈습니다. 날지 못하는 새라고 할까, 열매 없는 무성한 나무라 할까, 그런 것입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다 된 것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공허하고 실제적이 아니었습니다. 그 원인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날개는 있었지만 날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 우리의 신앙은 절름발이에 불과한가요?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믿음이 생활화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성령이 임하듯이 우리의 생활 현주소에 행동하는 믿음이 던져질 때 초자연적인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그 동안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세상을 사셨습니까? 여러분들의 관심은 무엇이었고 그 동안 무엇을 얻으려고 그렇게 분주하게 살았으며 여러분들이 그 동안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 시간을 가장 많이 들였던 것, 그리고 여러분들이 얻으려고 했던 것, 잃으려고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무슨 생각을 가지고 무슨 가치관을 가지고 인생을 살았습니까? 하는 일이 무엇이었고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마실까 그런 것이었습니까? 

땅만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 나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지금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야 말로 에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에서가 누구입니까? 팥죽을 선택한 에서의 결정은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데, 추상적인 것, 그거 가져봐야 무슨 유익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것, 그것보다는 지금 당장 배고픈 나에게 필요한 이 팥죽 한 그릇 이것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실용주의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까? 


항해와 표류
 
잠시 눈을 감고, 망망한 바다 위에 떠 있는 두 척의 배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 배는 파도와 싸우고 바람을 헤치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히 돌아가는 엔진, 선장의 지시에 따라 묵묵히 일하는 선원들... 언뜻 볼 때 두 배는 다를 바가 없지만 두 배중 한 척은 ‘항해’를 하고 있고, 다른 한 척은‘표류’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같게만 보이는 두 배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두 배의 목적입니다. 같게 보이지만 두 배는 목적지가 서로 다릅니다. 배 한 척은 정박하기로 예정된 항구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또 다른 배는 아무런 기약 없이 그저 물길을 따라 떠다니는 것입니다. 요컨대 ‘항해’는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만 ‘표류’는 “목적지가 분명치 않은, 정처 없이 떠다니는 것” 입니다.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두 배는 이렇게나 분명히 다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자신의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은 ‘항해’중인가, ‘표류’중인가? 혹시 먹고 살기가 바쁘다는 핑계로 지금까지 ‘표류’ 하며 살아오지 않았는지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든, 살아갈 계획이든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게 확인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 즉 목적지를 향해 나가갈 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현실과 신앙 사이에서의 갈등과 고민을 끝내시고 새까만 숯 속에 성령의 불을 집어넣어 힘 있는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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