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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 그 첫 번째 말씀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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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그 첫 번째 말씀 (왕상 19:1-8) 
 
 
❚위로가 되는 말씀

해마다 대입수능을 보고 나면 수석을 차지한 학생이 인터뷰를 할 때 꼭 이런 말을 합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자기는 과외도 안 하고 학원도 다녀본 적이 없답니다. 그저 학교에서 하는 수업에만 충실했을 뿐인데 성적이 이렇게 잘 나온 것이랍니다. 제가 대입수험생일 때도 이런 인터뷰가 나오면 약이 오르더니 30년 세월이 지나 고3 학부모가 된 지금도 이런 말을 들으면 너무 약이 오릅니다. 어떻게 공부가 제일 쉬울 수 있다는 말입니까? 과연 그 인터뷰를 보면서 감동을 받아 “나도 저렇게 해야지”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겠지요. “그거야 너처럼 공부 잘하는 사람이나 하는 소리지 나처럼 아무리 공부해도 성적이 안 올라가는 사람은 어떻게 살라는 말이야?”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나와 너무 동떨어진 말을 들을 때 절망하게 됩니다. 너무 뛰어난 사람, 너무 잘 난 사람을 보면 마치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나는 결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낙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반응이 “그래, 너 참 잘났다”입니다.

예수님도 얼마든지 이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외아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얼마든지 저 높은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쟤네들 참 불쌍하다. 저렇게 죄 때문에 죽어가는구나. 내가 도와줘야지” 하시며 얼마든지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이가 어찌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겠지요. “인간들 구원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쉬웠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히브리서 4:1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얼마든지 쉽게 하늘나라에서 구원하실 수도 있는 분이, 얼마든지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도 하실 수 있는데 친히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연약함도 지니고, 배고 고프시고, 힘들면 피곤해 하시고, 아픈 것 힘든 것 다 체험하신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왜요? 그래야 우리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인간으로, 우리와 똑같은 한계와 아픔을 다 체험하면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을 믿고 따르는 것이지 저 높은 곳에서, 우리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분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 했다면 우리는 아마 위로와 소망은커녕 나와 전혀 상관없는 분으로 여겨져 좌절하고 절망만 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또 하나의 위로가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몇 주 전에 “기도의 프로가 됩시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인용한 야고보서 5:17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인데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고 했지요? 그 때 말씀드린 것처럼 엘리야가 우리와 전혀 다른 특별한 사람이었다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전혀 소망이나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말씀을 보면서 “그래, 나도 기도해야지” 하고 결심하겠습니까? 틀림없이 “엘리야 참 잘났어, 그런데 나하고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하고 반응하겠지요.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사람, 우리와 똑같은 체질의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 나도 기도하면 이렇게 응답 받겠구나”하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탈진

바로 이 엘리야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옵니다. 여기 나오는 엘리야는 위대한 선지자, 능력의 사람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우리와 똑같이 어려운 일 닥치면 한없이 낙담하고 힘든 일 생기면 한없이 무너지는 우리와 너무도 닮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다는 이 말씀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너무나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엘리야가 너무 위대해서 아무리 어려운 일 생겨도 끄떡도 안 하고, 어떤 시련과 고통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절망하고 좌절했을 텐데 반대로 우리와 너무도 흡사한, 아니 오히려 우리보다 더 흔들리고 동요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우리는 엘리야를 통해 큰 위로를 받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엘리야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는 전무후무한 능력의 선지자였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선지자’ 하면 엘리야가 생각날 정도로 말씀이면 말씀, 능력이면 능력 모든 면에서 위대한 능력을 발휘한 대표적인 선지자입니다.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한판 승부를 벌여 단번에 케이오 승을 거둔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고(왕상 17장), 기도로 이스라엘 땅에 3년 반 동안 비가 안 오게 하다가 비가 다시 오게도 하고, 하늘로서 불을 내려 아하시야 임금이 보낸 오십부장 둘과 그 부하들을 불살라 죽이기도 하더니(왕하 1장) 결국 후계자인 엘리사가 지켜보는 앞에서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승천합니다. 이 권능의 종이 엘리야입니다.

그러데 만약 이대로 끝난다면 엘리야는 선망의 대상이 될지는 몰라도 결코 우리에게 소망을 주거나 위로를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 너 잘났어” 정도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성경은 이런 위대한 하나님의 종, 능력의 선지자도 어려움이 닥치니까 좌절하고 넘어지고 탈진했다고 말씀합니다. 보세요. 얼마나 엘리야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인지 말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온 열왕기상 18장 45절과 46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이 말씀 바로 앞에 보면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바알 아세라 선지자 850명에게 승리한 이야기가 나오고 바로 그 후 엘리야가 기도하니 3년 반 동안이나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45절에도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렸다고 했지요? 패배를 직감한 아합 왕은 마차를 타고 도망가듯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 이스르엘로 갑니다. 

그런데 이 때 엘리야는 어떻게 합니까? 46절에 보면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사람이 마차보다 빠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임해서 엘리야가 아합이 탄 마차보다 앞서 갔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때 엘리야는 정말 날듯이 뛰어갔을 것입니다. 위대한 승리에 도취해 뛸 듯이 기뻐하며 의기양양하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보세요. 엘리야가 우리하고 똑같지 않습니까? 우리도 좀 잘된다 싶으면 엘리야처럼 행동합니다. 좀 성공했다, 잘 나간다 싶으면 얼마나 의기양양합니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너무 신이 나서 방방 뜁니다. 엘리야쯤 되면 이럴 때 좀 절제하며 점잖게 굴 것 같은데 어린아이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19장에 들어서자마자 이렇게 의기양양하던 엘리야가 순식간에 다운 됩니다. 한순간에 좌절하고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집니다. 마치 우리가 좀 잘 나간다 싶을 때, 잘 풀린다 싶을 때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의기양양 잘 난 체 하다가 조금만 일이 꼬이고 힘들면 금세 풀이 죽고 좌절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와 똑같네요?

오늘 본문 1절부터 봅니다. 남편 아합이 이스르엘에 있는 궁전에 도착해 이세벨 왕비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보고합니다. 엘리야가 한판승을 거두고 이세벨 왕비가 그토록 애지중지 후원하던 바알 선지자 450명을 한 자리에서 죽였다고 보고하자 이세벨 왕비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치를 떱니다. 엘리야에게 사람을 보내 이렇게 호언장담 합니다. “내일 이맘때에는 너도 반드시 네가 죽인 바알 선지자들처럼 죽을 것이다. 내가 만약 너를 못 죽이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려도 좋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엘리야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는 엘리야쯤 되면 이 정도 위협에 절대 굴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위협에도 끄떡하지 않았고 850명과의 대결에서도 그토록 의연했던 엘리야인데 이 정도 위협에 흔들리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야는 우리의 기대를 무참하게 깨고 맙니다. 엘리야는 이 말을 듣자마자 생명의 큰 위험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요? 3절에 보면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라고 했습니다.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친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구하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르엘에서 220km정도나 떨어진 유다의 브엘세바까지 도망을 갑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다스리는 북 왕국 이스라엘을 떠나 남 왕국 유다로 넘어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월남(越南) 망명한 것이지요. 정말 실망입니다. 그런데 한 술 더 떠서 엘리야가 어떻게 한지 아십니까? 4절을 함께 읽을까요?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사환 보고는 여기 기다리라고 해놓고 자기는 광야로 더 들어갑니다. 저 혼자 살겠다고 무책임하게 더 광야 깊숙이, 이세벨이 못 따라올 곳까지 도망한 것이지요. 도망가다가 지쳐 광야의 로뎀 나무 그늘 아래 털썩 주저앉고 맙니다. 그리고는 한다는 소리 좀 보세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여기서 ‘넉넉하다’는 말은 이만하면 됐다,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이만큼 나를 괴롭히셨으면 됐고 이제 그만 나를 죽여 달라는 말입니다. 나 살만큼 살았으니까 이제 죽이시라는 것입니다. 거의 협박 수준이지요. 이게 어디 선지자가, 엘리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가 입에 담을 소리란 말입니까? 도대체 왜 엘리야 같은 선지자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왔을까요? 왜 엘리야 같은 위대한 사람이 고작 이세벨의 위협 따위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하고 비굴하게 도망한 것일까요? 거기에는 세 가지 까닭이 있습니다.

❚탈진의 이유

‘탈진증후군’(脫盡症候群)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burnout syndrome’이라고 부릅니다. 그 뜻은 이러합니다. “일에만 열중하는 사람에게 발생하기 쉬운 병으로 이상이나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사람이 자신의 한계나 현실의 벽을 느껴 마치 다 타버린 것 같이 우울상태에 빠지는 증상.” 우리 교회도 평생 일하던 직장에서 퇴직한 분들이 계십니다. 그 중에는 그동안 너무 힘들고 바빴는데 이제 일을 내려놓고 좀 쉬게 되었으니 다행이라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상당수가 금세 이 ‘탈진증후군’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남들보다 더 직장생활 열심히 하고 열심히 일한 분은 증세가 더 심합니다. 갑자기 공허하고 우울해집니다. 좌절하고 힘이 빠집니다. 영어에서 이런 증세를 ‘burnout’이라고 부르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마치 불이 활활 타오르다가 다 타면 급작스럽게 사그라지는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은퇴한 어떤 원로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30년 가까이 목회하느라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은퇴하고 나니 한동안 무기력해져서 견딜 수가 없더랍니다. 이게 바로 burnout syndrome, 즉 탈진증후군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엄청나게 큰일을 치렀습니다. 갈멜 산에서 850명의 우상선지자와 한판 대결을 케이오로 승리하고 바알 선지자 450명을 기손 시냇가에서 다 쳐 죽이고, 그러고 나서 기도하니 3년 반이나 안 오던 비가 내립니다. 신이 나서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마치 아합 왕이 탄 마차 앞에서 달려간 것처럼 그렇게 달려온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 대단한 일을 마치자 엘리야는 burnout 되고 만 것입니다. 너무 큰일을 한꺼번에 치루고, 너무 큰 승리와 성공을 거두고 나니 모든 에너지가 불에 타버린 것처럼 빠져나가고 탈진에 시달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이세벨과 맞설 힘도 의욕도 다 잃고 모든 것을 피해 도망한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야가 그토록 좌절하고 탈진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이해가 갑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이런 경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큰일을 치렀는데, 그것도 내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했는데 그 다음에 바로 찾아오는 것이 기쁨이나 보람이 아니라 허탈과 탈진인 것입니다. 교사들은 여름성경학교를 치르느라 모든 에너지를 다 쓰고 나서 한동안 이 burnout, 탈진을 겪게 됩니다. 교회에서 큰 행사를 치르고 나서도 이런 증세가 나타납니다. 너무 당황스럽지요.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했는데 기쁘고 뿌듯해야 하는데 오히려 탈진하고 허무하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음 주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하십시오.

엘리야가 심한 탈진을 겪은 두 번째 원인은 인간관계입니다. 다른 사람의 끈질긴 공격을 받고 탈진한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엘리야가 너무 미웠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을 사사건건 반대하고 맞서는 엘리야가 너무 싫어서 벼르고 있다가 850명의 우상선지자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한판 승부를 벌였는데 그만 보기 좋게 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깨끗하게 승복하지 않고 오히려 더 이를 갈며 엘리야를 죽이려 듭니다. 인간관계가 틀어졌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를 공격하고 매도합니다. 나를 왕따 시킵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내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나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사람들도 수군거립니다. “저렇게까지 당하는 걸 보니 저 사람 뭔가 문제가 있는 거 같다”고 말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다 막혀버린 느낌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엘리야처럼 크게 낙심하고 탈진하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도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이런 일을 겪지는 않으시는지요. 차라리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면 나을 텐데 가족끼리 갈등이 생기면 정말 괴롭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끼리 갈등 생기면 정말 힘듭니다. 집에 들어가기도 싫어집니다. 교회도 가기 싫고 심지어 예수 믿기도 싫어지기도 싫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답은 다음 주 설교를 통해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탈진의 원인은 엘리야의 마음입니다. 앞서 말한 탈진증후군이나 인간관계 문제는 외부적인 원인이지만 이 세 번째 원인은 내부, 즉 마음속에서 온 원인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엘리야의 마음속에는 지금 세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두려움, 비교의식, 그리고 외로움입니다. 우선 엘리야는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세벨 왕비 말입니다. 불의 종, 능력의 종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를 그토록 강하게 체험했던 엘리야인데도 사람을 두려워 하니까 이렇게 비겁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체험을 하고 아무리 하나님의 귀한 사명을 감당하더라도 사람을 두려워하면 이렇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만 두려워하기 바랍니다. 또한 엘리야의 마음속에는 비교의식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4절에 보면 엘리야는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불평하면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아무리 큰일을 했어도 조상들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 죽어도 싸다는 것입니다. 남과 자신을 비교해 자신을 깎아내리고 좌절하게 만드는 것은 마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귀하게 보십니다. 함부로 남과 비교해 나 자신을 자학하고 비하하게 만들고 “나는 죽어도 싸” 하게 만드는 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야는 14절에서 “다른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다 죽고 오직 나만 남았다”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좌절한 이유는 죽고 없어진 사람만 생각하고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를 도와준 아합의 신하 오바댜가 있었습니다. 오바댜가 숨겨둔 백 명의 선지자와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두셨습니다(18절). 그런데도 엘리야는 나 혼자만 남았다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없는 것, 부족한 것만 보고, 떠난 사람만 보면 탈진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아직도 남아 있는 것, 하나님이 남겨두신 희망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엘리야처럼 위대한 선지자도 얼마든지 탈진이나 좌절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가 겪은 탈진이나 좌절을 우리도 얼마든지 겪을 수 있고, 그가 탈진을 겪은 원인을 우리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엘리야가 그 탈진과 좌절을 극복하여 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처럼 우리도 얼마든지 우리에게 닥쳐온 모든 좌절과 그로 인한 탈진을 극복하여 하나님이 더 귀히 쓰시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박지성, 박찬호 같이 제아무리 훌륭한 운동선수도 슬럼프를 겪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그 슬럼프를 어떻게 견뎌내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정말 위대한 선수가 되느냐 못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현재 여러분이 겪고 있는 힘겨운 문제들, 좌절과 고통들은 결코 나를 넘어뜨릴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욥기 23:10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여러분, 탈진이나 좌절의 진짜 이유는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이 아닙니다. 내 마음자세와 태도에 달린 것입니다. 성도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이 좌절과 탈진을 우리가 굳센 믿음으로 두려움, 걱정 근심, 외로움, 비교의식 다 극복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순금 같은, 정금 같은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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