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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와 명철을 얻는 법 (욥 28:23-28, 고전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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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명철을 얻는 법 (욥 28:23-28, 고전 14:20)


우리가 걸어 다닐 때 발을 디딘 땅만 두고 나머지 땅을 없앤다면 걸어 다닐 수 없습니다. 발로 디딘 땅은 작은 부분이지만 모든 땅을 걸어 다니는데 다 사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발이 닿지 않은 부분 없이는 발이 닿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지혜를 얻는 것은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모든 부분이 다 필요합니다. 지식도 필요하고, 경륜도 필요하고, 나이도 필요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하나로 모아져서 지혜가 됩니다. 지혜는 통전적인 인생의 결과를 말합니다. 
  
‘지혜지수’(Brilliant Quotient)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혜지수는 두뇌(Brain)와 아름다움(Beauty)과 행동(Behaviour) 이 셋을 함께 계산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머리도 필요하고, 아름다움도 필요하고 행동도 필요합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배운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지식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플라톤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 네 가지 덕을 강조하였습니다. 중세의 믿음의 선조들은 여기에 신앙의 세 가지 덕인 믿음, 소망, 사랑을 더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덕이란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지혜, 용기, 절제, 정의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예수를 믿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참 지혜나 참 명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잠언 9;10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3:8에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어떤 지식, 누구의 지혜도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비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면 참 지식도 될 수 없고, 참 지혜도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는 “최고의 지혜, 참 지혜는 자신과 하나님을 참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가련하고 상실된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을 열망하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아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오래 전 그리스를 여행할 때에 고대 데살로니가에 가 보았습니다. 요즘에는 그 도시의 이름이 ‘데살로니끼’라고 합니다. 그 도시에 성 디메트리우스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지혜(소피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답은 지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참 지혜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된 은혜를 은혜로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으면 지혜도 없습니다(No God, No wisdom). 
  
그리스인들은 두 두개의 생일을 지킨다고 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날이 생일이고, 자신이 세례를 받고 이름 받은 날(named day)이 다른 생일입니다. 이름 받은 날에는 세 가지 선물을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투구입니다. 지혜를 잘 보존하라는 의미에서 투구를 줍니다. 둘째는 올빼미입니다. 밤의 동물처럼 지혜를 잘 찾으라고 올빼미를 줍니다. 셋째는 지구본입니다. 세계를 알고 세계를 지배하라는 뜻으로 지구본을 줍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지혜란 분별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명철은 무엇입니까? 명철이 무슨 말인가 어려운데 영어 성경에는 명철을 ‘understanding’이라고 합니다. 명철이란 이해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하지만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도무지 말이 안 통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명철이 없기에 말이 이해가 안 되고 말이 안 통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는 지혜와 명철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을 통하여 지혜와 명철을 바르게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주를 경외함이 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The fear of the Lord is true wisdom)이라고 합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두려워하고 존경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지혜입니다. 
  
시편 111:10에는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라고 합니다. 경외는 신앙의 첫걸음이며 동시에 신앙의 마침입니다. 
  
영성가 토마스 머턴은 “지혜의 시작은 죄의 고백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죄를 고백하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참 지혜로운 사람은 죄를 짓지 않고 죄를 고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애굽왕 바로는 히브리 사람들이 점점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바로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에게 히브리 여인들이 아기를 낳을 때에 남자이면 다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17에는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고 합니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아는 것이 지혜이며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 결과가 어떻습니까? 출애굽기 1:20에는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1:21에는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 결과는 백성이 번성하고 강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납게 짖는 개는 무섭지 않습니다. ‘무는 개는 짖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받는 소는 소리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함부로 칼을 빼드는 자의 칼은 무디다’고 합니다. ‘김 안 나는 숭늉이 더 뜨겁다’고 합니다. 요란하지 않고, 소리 나지 않고, 침묵하고, 길이 참으시지만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십니다. 경외할 분이십니다. 
  
누가복음 18:2에는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을 무시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태도가 다 잘 못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사람도 존경할 줄 아는 것이 옳은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람도 무시하게 되는 법입니다. 
  
사극을 보세요. 사람이 순리로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없는 말을 지어내어 모함해서 죽이고, 자기 꾀로 사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바르게 살지 못하면 하늘이 두렵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은 신앙의 첫 걸음일 뿐만 아니라 바른 인간의 도리의 첫 걸음입니다. 
  
바로의 말로를 보세요. 자신의 군사력을 앞세워 하나님의 백성을 쫓고 죽이려고 했다가 자신의 모든 병사가 홍해에 빠져 죽고, 완전히 몰락하였습니다. 엘리의 가문을 보세요. 하나님의 제사장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성전을 섬기는 아들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온갖 죄를 범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완전히 멸망시키셨습니다. 

헤롯의 가문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살다가 벌레가 먹어 죽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하나님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지만 두려운 하나님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3,4대까지 갚으시는 무서운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은 돈도 많이 벌고 자녀들도 다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으로 잘 된 것이 아니라 세상적으로 잘 된 것입니다. 장로님이 교회에서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고 목사님께도 가시처럼 변했습니다. 장로님의 딸이 주일날 호텔에서 호화결혼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나오지 않고 마구 살았습니다. 그 후에 장로님의 사업도 내리막이 되고 자녀들도 어려워지고 딸과 사위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연히 생긴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한번 그렇게 살아보실래요? 하나님은 참 무서운 분이십니다. 참으신다고 해서 잊으신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는 절대 잊지 않으시고,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무엘상서 2:3에는 “지식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21에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합니다. 로마서 11:33에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할 때 지식이 풍성해지고 참 삶의 지혜를 얻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가지세요. 하나님을 모르면 꾀만 부리지 지혜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하늘나라 똑똑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악을 떠남이 명철입니다. 

오늘 본문은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to forsake evil is understanding)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악이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악은 우리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악은 우리와 한 지붕 아래에 있습니다. 악은 보잘 것 없는 데다 언제나 인간적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악과 쉽게 친해질 수 있고 쉽게 빠질 수 있습니다. 악은 때로 가장 친근한 우리 이웃처럼 다가옵니다. 그래서 악을 떠나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악을 떠나는 의지가 명철입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악행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해로운 것이 아니라 해롭기 때문에 금지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악은 해롭기 때문에 금지되었습니다. 그래서 떠나야 합니다. 악과 함께 살면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마귀와 함께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악을 과감하게 떠나는 것이 가장 큰 선입니다. 
  
시편 1편에는 의인과 악인, 두 길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악인들의 지혜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악인에게는 지혜가 없습니다. 성경도 악인은 꾀가 있다고 합니다. 의인은 세상의 꾀를 물리쳐야 합니다. 의인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과감하게 물리치고 떠날 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의 명철입니다. 
  
시편 1:4을 보세요. 악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악인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명철은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이 이해하는 능력이 없으니 아무데나 이리저리 휩쓸립니다. 갈 자리 안 갈 자리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할 일과 안 할 일을 분별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할 말과 안 할 말을 가리지 못하고 마구 내뱉습니다. 
  
악의 본성은 자기 스스로 패망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누구 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망합니다. 자기 꾀에 자기 스스로가 올무에 걸립니다. 성경에도 이런 악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을 버리고 미신을 좇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자신의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하여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는 머리카락을 늘 자랑했는데 숲 속에서 자랑하던 머리카락이 나무에 걸려 다윗의 병사의 칼에 죽었습니다. 

성경의 악한 여인의 대명사 이세벨은 자기가 가장 믿던 호위병들이 들어 창밖에 던져 죽었습니다. 에스더시대에 바사의 고관이었던 하만은 자기에게 절을 하지 않는 유대인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자기 집 마당에 세운 장대에 자기가 매달려 죽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절하러 온 박사들을 속이려 했지만 박사들이 속지 않았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량에 팔고 자기 분에 못 이겨 스스로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악한 자들은 자기 스스로가 패망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망하게 만드십니다. 
  
고린도전서 14:20에는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때 묻기 전 순진무구한 상태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악을 떠난 상태가 되라고 권하십니다.  
  
C. S. 루이스는 “모든 악당들 중에 종교적인 악당이 최악이다. 모든 피조물 중 최악은 원래는 하나님의 전에 서 있었던 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상가 파스칼은 “인간은 종교적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가장 철저하고 신명나게 악을 저지른다”고 하였습니다. 종교인들도 신앙이라는 미명으로 엄청난 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유럽의 종교전쟁이라는 30년 전쟁도 종교개혁에 대한 구교의 반발로 일어난 전쟁입니다. 독일의 농민전쟁도 종교를 앞세워 일어난 전쟁입니다. 십자군전쟁도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신앙 때문에 일어난 전쟁입니다. 최근까지 계속되었던 아일랜드의 신구교의 전쟁이 그렇습니다. 이슬람의 지하드라고 하는 알라를 위한 전쟁은 지금 지구촌의 최악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인간적이지만 죄에 머무는 것은 악마적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루터는 “새가 내 머리 위에 날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내 머리에 둥지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악은 언제나 우리 주위에 있지만 악에 빠지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도 주기도문에서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이 기도야 말로 우리에게 절실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시험은 있지만 시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셔야 악을 떠나 살 수 있습니다. 
  
다윗은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간음죄는 간음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고 속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은 살인하고 살인을 은폐합니다. 죄는 죄를 낳고 악은 악을 낳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어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하십니다. 다윗은 다른 때 같으면 나단을 죽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나단의 말을 듣고 회개합니다. 회개는 떠나게 합니다. 회개하기 전에 악에서 떠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은 악에서 떠남으로 성군이 되었습니다. 악에서 떠남으로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악에서 떠남으로 명철한 성군이 되었습니다. 시편 103:12에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하십니다. 죄를 멀리하고 악에서 떠나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하십니다. 

  
결론 

신라의 김유신이 젊은 날 화류계 절세미인인 천관의 술집에 자주 갔습니다. 오랫동안 사귀는 가운데 천관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발길을 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어느 날 술에 만취되어 말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애마가 만취한 그를 태우고 천관녀의 집으로 갔습니다. 술에서 깨어난 김유신은 말이 천관녀의 집에 와 있는 것을 보고  애마의 목을 쳤습니다. 애마의 목을 자르면서까지 악을 떠나는 과단성을 가진 김유신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어야 명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청소부 밥’에는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지침들이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지쳤을 때 재충전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가족은 짐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투덜대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배운 것을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소비하지 말고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삶의 지혜를 후대에게 물려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 악을 떠나는 명철이 있으면 참 인생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명철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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