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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 (삼상 12:1-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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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 (삼상 12:1~5,16~18) 
  

성경에 보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여러분, 혹시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저는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이럴 때 뭐라고 대답하면 되죠? 셀 수 없이 많다! 이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인물들 가운데 가장 고상하고 품위 있게 살았던 사람이 누구일까요? 요즘 잘 쓰는 말로 표현하면, 가장 쿨(cool)~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사무엘을 꼽고 싶습니다. 기도하는 어머니 한나에게서 태어나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평생 동안 정말 신실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사사 시대의 인물입니다. 사사시대는 여호수아의 죽음(B.C. 1390) 이후 사울 왕의 등극(B.C. 1050) 직전까지 약 340년 동안입니다. 그 때는 왕이 없었고, 하나님이 사사를 통해 직접 통치하는 신정정치의 시대였습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로 B.C. 11세기 사람입니다. 그는 사사(Judge)일 뿐만 아니라, 선지자(Prophet)와 제사장(Priest)이기도 했습니다. 사사시대는 신정정치 시대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아주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흔히 영적인 암흑시대라고 부르기도 하죠. 

사무엘이 이렇게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도 쿨~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사무엘의 퇴임 장면의 기록입니다. 사울이 왕으로 등극하자 그는 사사 직에서 퇴임합니다. 그 때 이렇게 고별사를 시작합니다. 

3절(상).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in the presence of the LORD)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 ”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순간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죠. 그의 평생 지켜온 인생의 원칙이요 신앙의 모토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데, 라틴어로 ‘코람 데오’(Coram Deo)입니다. ‘코람 데오’는 장로교의 창시자 쟝 깔뱅이 신앙의 모토로 삼은 말이기도 합니다. 한자어로는 신전의식(神前意識)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앞에서”라는 말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의 작품「모나리자」가 있습니다. 신비의 미소로 유명한 그림이죠. 미소도 미소지만, 특이한 화법(키아로스쿠로=명암대조법)으로 그려서 어느 방향에서 봐도 시선이 관람자와 마주칩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디로 가든지 모나리자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꼭 이와 그렇습니다.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나를 향해 보고 계십니다. 사무엘은 평생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았고, 그로 인해 승리했습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도 오늘 말씀을 통해 사무엘 같이 ‘코람 데오’의 신앙을 배워 쿨~한 인생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세 가지로 말씀드립니다. 

[1] 사랑의 하나님 앞에서 : 평안한 삶

사무엘은 사랑의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늘 사랑의 시선을 받으며 평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젖을 떼자마자 부모에게서 떨어졌습니다. 한나가 자식이 없을 때 아들 주시면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했던 대로 실행한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아주 일찍이 조기 유학을 보낸 겁니다. 엘리 제사장에게 보내진 사무엘은 제사장 수업을 받으며 잘 자랍니다. 그 때 그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삼상2:21 “ ...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에게서 사랑의 시선을 받으며 자랐다는 뜻입니다. 삼상2:26 보면, 그 의미를 잘 설명해 줍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어린 사무엘은 비록 부모를 멀리 떠나 있었지만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 잘 성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평생 그런 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늘 평안한 모습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향해 사랑의 시선을 놓지 않습니다. 시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하나님이 매 순간마다 나를 지켜보시니까 안심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은 불안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시선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이 그랬죠. 

창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하나님 앞에서 떠났다는 것은 사랑의 시선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가 간 곳이 놋 땅인데, ‘놋’이란 이름이 왜 붙여졌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놋’(d/n)은 히브리어로 ‘유리’ 혹은 ‘방황’(wandering)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불안한 마음을 암시합니다.

사람이 사랑의 시선을 받으면 정서가 안정되고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반대로 사랑 받지 못하면 불안해집니다. 미국의 뉴 호우프 커뮤니티 교회 부설 학교에 여교사 톰슨이 있었습니다. 5학년 담임을 맡았는데, 테디라는 학생을 만났습니다. 그는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자주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습니다. 또 시험을 보면 죄다 틀렸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채점을 하다 이상한 생각 들어 생활기록부 자세히 들춰보았습니다. 

“1학년 : 착한 아이이고, 장래성이 있어 보입니다. 2학년 : 조용한 아이인데, 조금 폐쇄적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불치병을 앓고 있습니다. 3학년 : 학업 성취도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4학년 : 이 아이는 장래성이 없어 보입니다. 아버지는 가출했고, 이모가 양육하는데 학대를 받는 듯합니다.” 이런 기록을 보는 순간 선생님은 주르륵 눈물을 흘렸고, 그 날부터 방과 후에 개인 지도를 해 줍니다. 

사랑의 시선을 주자 아이는 조금씩 안정되었고 얼굴도 평안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성탄절이 다가왔습니다. 그 아이는 선생님에게 선물 2개를 갖고 왔습니다. 가짜 다이아 목걸이와 쓰다 남은 향수였습니다. 옆에서 보던 아이들이 놀려댑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고맙다며 목걸이를 직접 걸어봅니다. 향수도 뿌려 봅니다. 그러자 아이는 선생님 품안에 안겨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이 목걸이는 우리 엄마가 걸던 거예요. 

그리고 이 향수도 엄마가 쓰던 거예요. 선생님에게서 우리 엄마 냄새가 나서 너무 좋아요!” 그 후 선생님과 아이는 헤어졌는데, 이따금 편지가 왔습니다. 7년 후에 이런 편지가 왔습니다. “선생님,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데 2등을 했어요.” 그로부터 4년 후에는 이런 편지가 왔습니다. “선생님, 제가 대학을 졸업하는데, 과에서 수석을 했어요.” 또 4년 후에 편지가 왔습니다. “선생님, 제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됐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합니다. 결혼식 날 어머니 좌석에 앉아주시겠습니까? 선생님은 저에게 어머니 같은 분이거든요.” 여러분, 이 아이의 마음에 평안을 주고 그 인생을 변화시킨 게 과연 무엇입니까? 사랑의 시선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시선은 사람을 평안하게 해 주고 인생에 새 힘을 줌으로 승리하게 만듭니다. 가장 강렬한 사랑의 시선은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늘 평안한 모습으로 승리했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사랑의 하나님 앞에서 평안한 삶을 누림으로 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2] 권능의 하나님 앞에서 : 담대한 삶

사무엘은 권능의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권능의 시선을 의식함으로 담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사무엘은 ‘지는 해’였습니다. 반면에 사울 왕은 ‘뜨는 해’였습니다. 살아있는 권력입니다. 그래도 그는 사울 왕과 백성들 앞에서 담대히 외칩니다. 그들이 왕정 정치를 요구한 것은 하나님을 배반한 행위였으니 이제라도 회개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 사울 왕이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큰 징계를 당할 줄 알라고 경고합니다. 

그 증표로 무엇을 보여줍니까? 17절~18절. “17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레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서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에게 밝히 알게 하시리라 18 이에 사무엘이 여호와께 아뢰매 여호와께서 그 날에 우레와 비를 보내시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와 사무엘을 크게 두려워하니라” 밀 베는 추수기는 건기입니다.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우레가 치고 비가 쏟아집니다. 백성들이 두려워합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위로하면 앞으로 잘 하라고 권면합니다. 

여러분, 사무엘이 어떻게 이처럼 담대할 수 있었을까요?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권능의 하나님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잠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 앞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겁을 먹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칩니다. 양심이 찔려 통곡했지만, 아직은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 후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성령강림으로 성령 충만해집니다. 이제 베드로는 권능의 하나님을 의식하게 됩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수도 없이 붙잡혀 핍박을 당해도 담대합니다. 행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종교개혁 시대의 순교 사화입니다. 구교도에게 핍박을 받아 화형에 처해진 스위스의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맨발로 장작더미 위에 달렸습니다. 화형 집행 직전, 감독하던 치안판사에게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판사님! 내 가슴에 손 얹어보세요! 평소보다 맥박이 더 빨리 뛰면 하나님과 기독교 부인해도 좋소.” 그는 마치 침대에 누워 잠들려는 사람처럼 태연했습니다. 권능의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확신하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험합니다. 순간순간 어려운 위기 상황이 닥쳐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권능의 하나님 앞에서 살면 담대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담대함으로 늘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 정직한 삶

사무엘은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했기에 정직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남이보든 안 보든 차이가 없습니다. 당연히 정직하게 살게 됩니다. 사무엘은 일평생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그 당시 사사,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으로 절대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왜 그렇게 될까요? 눈에 뵈는 게 없어서 그럽니다. 사람들을 무시하니까 함부로 행동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했기에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3절을 보세요.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다그칩니다. 자기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대 보라고 ... 그러자 백성들이 뭐라고 반응합니까? 4절. “그들이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것도 빼앗은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 백성 중 그 누구도 사무엘의 비리를 대지 못합니다. 이구동성으로 그의 정직성을 증거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찰하십니다. 시11:4 “ ...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영국의 뉴 캐슬대의 한 연구소가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캠퍼스 내에 커피 자율 판매대가 있는데, 돈 안 내고 가져가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판매대 앞에 붙어 있던 ‘꽃’ 그림을 떼고 그 대신 ‘사람의 눈’ 그림을 부착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수입이 3배나 증가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 정직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림 속에 있는 사람의 시선도 이렇게 무서운데 하물며 불꽃같은 하나님의 시선은 어떻겠습니까? 사람들이 죄를 저지르고 부정직해지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안 봐도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보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 저절로 정직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 정직한 삶(Simple Life)을 살게 되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않으면 죄악된 삶(Sinful Life)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직하게 살면 손해 본다는 허위의식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남들이 모두 부정직하게 사는데, 나만 정직하가 살면 손해가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부정직에 대해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이 세상에서 예비 심판을 하시고, 장차 최후의 심판 때 완전한 심판을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삶을 살면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서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 그 부인이 유혹하잖아요. 그 때 그가 어떻게 거절합니까? 창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그는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더러운 짓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호히 거절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원한을 품고 모함을 해서 감옥에 가지만 하나님이 다 보고 계셨습니다. 그를 인정하시고, 나중에 감옥에서 만난 관원을 통해 애굽의 총리가 되지 않습니까? 

「한국유리」창업자인 고 최태섭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정직한 기업을 경영하고 기부도 많이 한 기업인으로 유명했습니다. 6.25 전쟁 당시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아군이 1.4 후퇴를 할 때 모두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도 피난을 가야 되는데,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이 있어서 얼른 가고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급히 은행에 가서 직원에게 대출금을 갚겠다고 했더니, 대출 장부도 없고 피난가야 되니까 돈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받으라고 하니까 하는 수 없이 영수증을 떼어주고 받았습니다. 그 후 제주도로 피난 가서 사업을 했는데, 군 부대에 식료품을 납품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단장이 그의 정직성을 보고 생선 납품을 요청합니다. 주문 물량이 자꾸 늘어서 부득이 큰 배를 구입해야 되는데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산에 있는 은행으로 가서 대출을 요청합니다. 담보도 없고 전쟁 통이라 돈을 못 빌려준다는 답변이었습니다. 

포기하고 나오려다가 혹시 하는 마음에 1.4 후퇴 당시 대출금 갚은 것이 잘 정리됐는지 확인해 봅니다. 영수증을 제시했더니 은행원이 깜짝 놀랍니다. 반가워하면서 “바로 그 분이군요! 선생님은 은행가에서 전설 같은 인물이 되었어요. 은행장님을 만나게 해 드릴게요!” 은행장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무담보로 거액을 대출해 줍니다. 그 돈을 갖고 사업에 크게 성공을 거둡니다. 이렇게 해서「한국유리」창업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최 장로님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분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에 정직한 삶을 살았고, 이를 기억하신 하나님이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삶을 살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사무엘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면 우리도 쿨~하게 살 수 있습니다. 행복해집니다. 승리합니다. 부디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평안한 삶, 담대한 삶, 그리고 정직한 삶으로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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