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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가 은혜되게 하라 (창 3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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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은혜되게 하라 (창 33:1-11)


휴가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한 사건이 있습니다. 가족들을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일어난 사고 때문에 중앙분리대 위의 직사각형 철조망들이 넘어와 바퀴가 그 철조망 위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타이어가 찢어져 브레이크도, 핸들조작도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아,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 입에서 절로 “주여!”라는 절규가 터져 나왔습니다. 한참 후, 어떻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살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곧 기적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기적의 연속이요, 은혜의 연속입니다.

우리 앞에는 위험과 어려움이 수없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야곱이 그러했습니다. 그가 지금 큰 문제 앞에 봉착해 있습니다. 에서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에 야곱은 두려움으로 벌벌 떨고 있습니다(창 32:6-7). 에서가 자기를 만나기 위해 온다는 말 한마디에 간담이 녹아내렸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그는 혼자 쓸쓸히 얍복 나루터에 앉아있습니다. 이런 그에게 갑자기 한 낯선 사람이 나타나더니 느닷없이 씨름을 거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야곱은 살기 위해서 그 사람과 맞잡고 밤새도록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 사람을 이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밤새 싸웠던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습니다. 드디어 문제의 에서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오던 에서가 오히려 그를 안고 눈물로 포옹하는 것이 아닙니까?(창 33:4) 진정 이것은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달려오던 에서의 마음이 어떻게 이렇게 돌변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진정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사실을 안 야곱의 입에서는 ‘은혜’라는 단어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믿을 수 없는 꿈만 같은 일을 경험하면서 ‘은혜’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창 33:5,8,10,11).

지금 야곱이 ‘은혜’, ‘은혜’를 계속 떠올리며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은혜(창 33:5)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두 번째 은혜(창 33:8)는 형 에서의 은혜입니다. 세 번째 은혜(창 33:10) 역시 에서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은혜(창 33:11)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야곱은 형의 손에 죽는 줄 알았는데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까? 너무 뜻밖이었고 그것이 감동, 감동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의 은혜에 감격해 합니다. 때문에 그는 자기가 지난 이십 년 동안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형에게 드립니다(창 33:8,10,11). 도무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에서가 안 받으려고 해도 강권하면서 예물을 드립니다. 정말 기쁜 마음으로 풍성하게 예물을 드리며 형의 은혜에 보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지난 이십 년 동안 광야에서도 함께 하시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길 때마다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해주셨습니다. 평안히 집으로 돌아오게까지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야곱 자신도 인정합니다(창 32:10). 이 은혜를 어찌 에서의 은혜와 비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합니까? 특히 지난밤 홀로 쓸쓸히 얍복나루터에 남아 ‘이젠 모든 게 다 끝났구나!’하며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 그 현장에 나타나셔서 자신감을 북돋아 주기 위해 친히 실컷 얻어터지고, 내동댕이쳐지고, 짓밟히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그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집짓고 ‘자기짐승’을 위해서 우릿간을 짓고(창 33:17), 그리고 땅 투기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을 뿐입니다(창 33:19). 그는 이십 년 전, 벧엘 광야에서 이렇게 서원했습니다.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 28:21-22).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야곱은 딴청을 부립니다. 눈앞에 있는 형에게는 감지덕지하며 엄청난 예물을 주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 그 하나님과의 약속은 저 뒷전으로 밀쳐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 집보다, 아니 짐승들의 우릿간보다, 밭 한 떼기보다 더 못한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런 야곱의 스토리는 어떻게 전개됩니까? 성경 한 장에 걸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디나 사건’이 터집니다(창 34장). 사랑하는 딸이 마실 나갔다가 그곳 이방 남자에게 성추행을 당합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딸이 백주(白晝)에 강간을 당하는 뜻밖의 사건이 우연일까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은혜를 쏟아버리고, 은혜를 저버리는 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그는 이젠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다고 착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받은 은혜보다 앞으로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는 이런 성향이 없습니까? 문제를 안고서 진통하며, 괴로워할 때에는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애써 기도했던 내용들을 잊어버리려 합니다. 그리고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립니다. 야곱이 위기를 넘기고 평안해지니까 철저히 자기중심, 세상중심, 물질중심의 사람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겉으로, 형식적으로는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해 감사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아니 이전보다 더 큰 은혜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출애굽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매일이 기적과 은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맥추절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대로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신 16:10). 또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신 16:11). 잊지 마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가 필요한 자임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앞으로 더욱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로 서기를 다짐하는 맥추절이길 바랍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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