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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문제 앞에 선 요나 (욘 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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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앞에 선 요나 (욘 1:11-16)


우리는 살아가면서 꿈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아이들에게도 꿈을 꾸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깨달은 것은 꿈이라는 것은 귀중하고 중요하지만 꿈이 세계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 꿈을 따라서 조금씩이라도 변해 가는 행동만이 자신의 미래를 변화시킵니다.  꿈만 안고 있는 사람, 꿈만 이야기하는 사람, 꿈만 꾸고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조금만이라도 변화를 시작하십시오.  오늘 이 자리에서 마음의 변화를 시작하십시오.  작은 행동 하나가 역사를 바꿉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먼저 마음을 바꾸는 작은 행동 하나를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모습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그 작은 행동에 축복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작은 행동일지라도 그 행동 하나 하나가 올바르기만 하면 큰 차이점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작은 행동 하나 하나가 꿈의 실현을 앞당기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는 것이 힘이 아닙니다.  아는 것은 잠재적인 능력일 뿐입니다.  아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 그것이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동하는 사람만이 늘 하나님의 기회를 낚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바로 이 시간에 우리의 마음을 고치는 일에 행동으로 나타나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이 작은 일을 우습게 보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안에 나도 정복할 수 없는 내가 나타날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바 악을 행하는 이 갈등과 고통과 모순에서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복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는 본연의 자아를 회복하고 싶은 몸부림을 갖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자기 영혼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강렬한 갈등과 삶의 고뇌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곤고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시간마다 힘입고 성령의 은혜로 모순과 갈등으로부터 맞서 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판단과 비판 앞에서 무너지면 안됩니다.  불평과 원망 앞에서 무너지면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분노나 빈정거림 앞에서 무너지면 안됩니다.  이런 것들과는 맞서 싸우십시오.  예수의 이름을 힘입고 일어나 싸우십시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선언하셨던 그 말씀의 참된 증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는 일 마다 실패에 실패를 겪고 있던 어떤 사람이 그 마을에 이름 잘 짓기로 소문난 어떤 작명가를 찾아갔습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이름을 바꾸었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이 작명가가 이름 석자 박힌 명함을 받아들더니 "이 이름 가지고는 거지 팔자야!  이 이름 가지고 되는 일이 없지."  그리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건 철학이야.  이제는 만사형통일게야.  가서 뭐든지 해봐."

이 사람은 싱글벙글 거리면서 명함을 바꾸어 찍었습니다.  그 동안 해 보고 싶은 일들을 계획했습니다.  그럴 듯하게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이전보다 하던 일이 더 안 되는 겁니다.  계획했던 일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시작했던 사업은 무너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면 괜찮겠거니 생각했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났는데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빈털털이가 되었습니다.  다시 3년 전에 그 작명가를 찾아갔습니다.  명함을 내밀었더니 3년 전과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름 가지고는 쪽박이야.  이 이름 가지고 되는 일이 없을 게야.  이름 바꿔."

화가 난 이 사람은 작명가의 멱살을 붙들고 흔들었습니다.  "야 이놈아!  이 이름은 3년 전에 백만원을 받고 네가 지어준 이름이야.  이 이름을 가지고 사업 시작하고 계획했다가 쫄딱 망했어."  그리고는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홧김에 방문을 걷어차고 나오는데 뒤에서 작명가라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고 이름 값하고 사는 게 중요하우."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이름 값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솔직히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름 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이 있습니다.  압살롬이라는 이름은 "평강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 다윗은 이 아들이 태어났을 때 아이가 장차 자라서 가정과 나라에 평강을 이루어주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어쩌면 평생 사울을 피하여 도망을 가고, 전쟁터에서 살아야만 했던 다윗에게 평강은 참으로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들에게 평강의 아버지라는 뜻의 압살롬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권력에 눈이 어두워 형제를 죽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를 죽이려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가정과 나라에 평강을 준 사람이 아니라 불화와 전쟁을 가지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순결한 자', '깨끗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삭개오의 아버지는 삭개오를 낳고서 이 아들이 세상 속에서 순결한 삶으로 깨끗하게 살아가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아이가 되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순결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이름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세금을 좀 더 많이 빼앗을 수가 있을까?" 였습니다.  그는 순결하지 못한 삶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원망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빌레몬서에 보면,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유익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오네시모의 아버지는 이 아이가 장차 자라면서 세상 속에서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주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유익한 삶을 살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주인의 재물을 탈취해서 도망가는 그야말로 백해무익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성도라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름이 있습니다.  성도라는 이름은 세상 속에서 불러낸 구별된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죄악된 세상 속에서 불러내셔서 저들과는 다른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우리의 삶은 전혀 거룩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그러나 실상은 그리스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아갈 때가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요나의 아버지인 '아밋대'라는 이름은 '진실하다'라는 뜻입니다.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집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아들의 이름을 '요나'라고 지었습니다.  '요나'라는 이름은 '비둘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의 아버지는 이 아들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한 마리 비둘기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순종하여 이 땅 구석구석에 주님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영광스러운 아들이 되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요나가 그 아름다운 이름에 걸맞게 살지를 못했다고 하는 데에 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바로 이 요나의 모습은 그 옛날 선지자의 이름이기 이전에 바로 요, 나의 모습이라고 하는 데에 있습니다.  요나의 불순종은 바로 나의 불순종이었습니다.  사명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요나의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요나의 모습은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이요,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일 수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잠자는 요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한 번 요나에 대해서 정리를 해 보자면,
첫째로, 요나는 도망가는 비겁한 선지자였습니다.
일터로 향해서 힘차게 나아가는 선지자가 아니라 오히려 엉뚱한 장소로 도망가는 선지자였습니다.  사명자로서의 길이 아니라 도망자로서의 길을 갔습니다.

보십시오.  그는 지금 좌우를 판단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12만명이나 되는 니느웨에 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엉뚱한 곳, 다시스로 도망을 가고 있습니다.

요나가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한 이유를 우리는 몇 가지로 추론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니느웨라는 곳이 죄악이 만연해서 그 죄가 하늘 꼭대기까지 사무쳤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도 중죄인데 굳이 내가 간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보나 마나요,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자비하신 분이시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40일 후에 멸망을 당한다고 하지만, 그들 가운데 회개하고 눈물 흘리는 일이 일어나게 되면 그 때문에 하나님은 용서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40일 후에 멸망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는 과장되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박해한 원수의 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40일 후에 망한다는 것은 오히려 민족적으로 좋아해야 할 일인데 내가 굳이 그곳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느니웨의 멸망은 손뼉치며 통쾌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서쪽의 니느웨로 가지 아니하고 동쪽의 다시스로 향하여 도망을 갑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명령 앞에 정면으로 반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도망을 가도 배 밑창에 숨어서 갔습니다.  그의 행동은 그 자신이 바라보아도 떳떳하지를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라는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엉뚱한 길로 도망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백성으로 삼으셨을 때에는 분명히 어떤 사명적인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요나처럼 주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회피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망가는 요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자화상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요나는 책망을 받는 부끄러운 선지자입니다.

그는 뱃사람들로부터 가혹한 책망을 받습니다.  요나는 뱃사람들로부터 4가지의 책망의 질문을 받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6절 말씀에 있는데 선장이 묻습니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도대체 이 판국에 잠이 오느냐는 겁니다.  지금 선장과 뱃사람들은 큰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면서 배가 거의 깨어질 지경에 이르게 되자 뱃사람들은 겁에 질려서 저마다 자기의 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있는 짐들을 바다에 다 던지기까지 했습니다.  이때 선장은 그들을 독려하다가 배 밑창에 물이 새지는 않는지 걱정이 되어서 배 밑창 아래로 내려옵니다.  그런데 그 배 밑창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가만히 보니까 코를 골면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선장이 보니 정말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지금 배 안에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살아보려고 아우성치며 야단입니다.  생명을 건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대절명의 시간에 코를 골면서 잠을 자고 있으니 도대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떤 사본에는 이때에 선장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잠자는 불신자들을 깨워야 할 성도가 불신자에게 잠에서 깨어나라고 야단을 맞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잠자는 세상을 깨워야 할 성도들이 졸고 있을 때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절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의 사회는 어렵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땅에는 좌와 우가 갈라서서 극단적인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빈익빈 부익부의 계층간의 경제적 차이는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젊은이들은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웃에 대해 무감각하고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다면 그는 반사회적이요, 비양심적이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처럼 우리를 도와달라는 오늘 이 땅의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한다면 우리도 요나처럼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는 영혼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만 합니다.  기도의 잠에서 깨어나야만 합니다.  사명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만 합니다.

이제 선장과 사람들은 이 엄청난 폭풍 앞에서 곰곰이 생각하기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엄청난 폭풍을 만난 것은 분명히 이 배에 누군가 죄를 지은 사람이 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의논한 끝에 "누구 때문에 우리가 이런 엄청난 변을 당하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면서 제비를 뽑아서 찾아내자고 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제비를 뽑는 일에 있어서 요나가 제비를 뽑았을 때 뱃사람들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뱃사람들은 모두가 제비뽑기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결과 요나가 뽑혔고, 이에 사람들은 그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기에 우리가 이런 변을 당하느냐?"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느냐?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이 대답을 하기 전에 요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대답을 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하늘에 계시고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눈앞을 떠나 도망치는 몸입니다"
요나가 말하기를 분명히 그는 히브리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사람은 만백성들 가운데 선택된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뜻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어디로 가느냐?"  "나는 다시스로 갑니다."
"왜 다시스로 가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곳에 가기가 싫어서 반역하여 도망하는 길이요."  한 마디로 도망가는 길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는 이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뱃사람들이 한 마디 한 마디를 던질 때마다 그의 가슴에는 비수를 찔렀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죄는 숨겨질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죄는 그 주인을 찾아냅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민수기 32장 2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다시 말해서 죄가 주인을 찾아낸다는 말입니다.  죄는 반드시 그림자를 찾아내고야 만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서는 절대로 그 죄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서 "당신은 누구요?  당신 가정이 왜 이렇게 되었소?  이 사회가 왜 이렇게 삭막하게 되었소?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왜 그렇게 정체되어 있는 거요?"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입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까?  "아, 나 말이요?  나는 그리스도인이요.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살지만 나는 나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여 이웃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소.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 되지를 못했소이다.  뭐 나 혼자 잘 믿으면 되는 것 아니요?"  오늘 여러분은 이웃으로부터 들려오는 영혼의 울부짖는 소리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거세게 일어나는 폭풍 앞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10절 하반절에서 뱃사람들은 세 번째 질문을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히브리 민족은 하나님의 민족이라고 들었는데, 그 하나님이 당신을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다면 당신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소?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소?

당신의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었다면 바다도 지었는데, 그래 당신이 바다로 도망간다고 해서 찾아오시지 않겠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이 어디에 숨든 찾아내지 못하겠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하려고 생각했습니까?  당신이 정말로 당신 말대로 선지자라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죽고 살았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러나 나 같으면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완악한 우리의 생각으로도 도저히 못하겠는데, 히브리 사람이요 선지자인 당신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이것 보시오.  당신 때문에 우리들이 다 죽게 되지를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향해 책망해야 하는 사람이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책망을 듣고 있습니다.  세상을 가르치고 인도해야 할 요나가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선교를 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는 우리가, 죄악된 세상을 가르치고 책망을 해야 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야 하는 우리가 요나처럼 정반대로 하고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외치면서도 행동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뇌물 받기를 즐겨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도둑질하고 사기 치고, 비도덕적인 삶을 사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 범죄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놓고 경찰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일천만 성도들에게 세상이 무엇이라고 외치겠습니까?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외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요나가 살았던 시대의 그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지를 못하고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우리들에게 외치는 세상 사람들의 책망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할 수가 있소?"
이 절규와 외침 앞에 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본문 11절에서 네 번째로 뱃사람들은 요나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좋겠는가?"

점점 거칠어져만 가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묻습니다.  "바다를 잔잔하게 하려면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해야 좋겠는가?"  이 말 속에는 뱃사람들의 뼈에 사무친 원망이 담겨 있습니다.  속된 말로 "너를 씹어 먹어도 시원찮겠는데…"라는 말일 겁니다.  당신을 이 배 안에 두자니 하나님의 진노가 두렵고, 그렇다고 제거하자니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제거하겠는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할 입장에 있는 당신이 오히려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니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좋겠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요나의 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점점 더 거세게 일어나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겁에 질려 뱃사람들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우리 앞에 펼쳐지는 저 바다가 잔잔해지겠소?"  이때 요나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까?

본문 12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문제 앞에 자신을 던지는 요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문제 앞에서 책임을 지는 요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여기에는 두 가지 면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부정적인 면으로 요나의 부끄러운 종말입니다.  니느웨로 가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다시스로 갔던 죄의 결과로 바다에 던져지니 요나에게는 최대의 부끄러운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가 죄 없이 희생을 당한다면 떳떳하고 보람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으니 이것보다 더한 수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둘째는 긍정적 면으로, 그래도 요나는 최소한 자신의 죄를 인정할 줄 알았다는 점입니다.  이 폭풍으로 여러분들이 지금 고난을 받는 것은 다 못난 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긍정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죄를 인정했다는 것은 그래도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오늘날 엄청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죄를 짓고서도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문제를 회피하고 방관자로서, 도망자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한 가지 긍정적인 면으로는,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최소한 책임을 질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때에 요나가 높은 용상에 앉으려고 했다면 그는 정말로 철면피입니다.  자기 자신만 쏙 빼고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면 자기뿐만 아니라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가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시오.  그러면 당신들 앞의 저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바로 나 때문에 이 태풍이 당신들에게 닥쳤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의 가정을 복음화시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어두운 이 사회를 밝은 사회로 바꾸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를 부흥시키고 은혜로운 교회를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기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에게 어떤 대단한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요나처럼 깨어지고 뭉개어진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문제가 나로 말미암아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책임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는 회피하고 도망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풀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앞에, 우리들 앞에 펼쳐지고 보여지는 문제는 내가 사명의식을 가지고 내가 풀어야 합니다.  교회에 어떤 문제가 보이십니까?  하나님께서 내 눈에 그 문제를 보게 하신 것은 나로 하여금 그 문제를 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가정에 그 문제를 보이도록 하신 것은 나로 하여금 그 문제를 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그 문제를 풀 수 있습니까?  책임의식입니다.  이 모든 문제는 내 탓이라는 것입니다.  문제 앞에서 책임의식과 사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희생되어지고 죽어져야만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나를 그 문제 속에 던지고자 하는 희생이 없고서는 결코 문제 해결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요나가 이 소리까지 못했다면 그들 모두는 무서운 종말을 맞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12절에서처럼 대답할 수 있었다는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한 때는 세상을 향하여 설교를 듣고 도망가는 비굴한 선지자였지만 마지막에는 문제에 책임을 질줄 알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와 같이 된 것은 다 내 탓이라고 하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너의 탓이라고 하는데서 문제가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내 탓이라고 하는데서 평화가 시작됩니다.  네 탓이라고 하는데서 분열이 시작되지만, 내 탓이라고 하는데서 하나 됨이 시작됩니다.  너 때문이라고 한다면 불평 불만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가 나 때문이라고 한다면 은혜와 감사가 충만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요나가 그의 몸을 바다에 던지니 바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문 15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요나가 그의 몸을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다에 던져질 때에 그렇게도 거세던 폭풍이 잔잔해졌습니다.  거대한 문제 앞에서 요나 자신이 던져지고 희생되었을 때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밀려오는 인생의 풍랑 앞에서 요나처럼 자신의 몸을 던지지 않는 것입니까?  왜?  왜 여러분은 내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폭풍 앞에서 아직도 여전히 남의 탓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지난 5월에 어린이주일을 맞아 담임목사님이 교회학교 아동부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평소 교육전도사님이 하는 설교를 재미있게 듣던 어린이들에게 목사님의 설교는 지루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예배당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목사님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겨우 설교를 끝냈습니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목사님이 축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축도하는 모습을 처음 본 어린이가 깜짝 놀라 다른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태현아, 왜 목사님이 손을 들고 있지?"
"아니, 그것도 몰라?  설교를 못했으니 하나님 앞에 벌 서고 있는 거지."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는 목사 한 사람만의 문제라고 할 것입니까?  그래서 여전히 문제 앞에서 방관자로 서 있으시겠습니까?  믿음의 사람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문제요,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문제가 나 때문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 문제는 축복의 열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너 때문이라고 하는 순간 그 문제는 분열과 파괴의 열쇠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세게 일어나는 폭풍 앞에 나 자신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문제 앞에 불평하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조용히 자신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거센 폭풍이 잔잔하여 질 것입니다.  요나가 자신의 몸을 바다에 던졌다고 해서 그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요나는 제 2의 멋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요놈의 나'를 들어 인생의 바다에, 문제의 폭풍 앞에 던져질 때에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축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은혜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어두운 사회 앞에, 믿지 않는 가정의 폭풍 앞에 이 문제는 나의 문제라고 하는 믿음의 양심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요나가 문제에 책임을 지고 그의 몸을 바다에 던져질 때에 폭풍이 잔잔해 졌습니다.  요나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을 뻔하였지만, 그러나 요나 한 사람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요놈의 나 때문에 내 가정과 교회와 이 사회가 어지러움에 빠져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놈의 나 한 사람으로 인하여 내 가정과 내 교회와 이 사회가 평화를 누리고 축복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 말씀에 보니까,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탈굼역에서는 "그들이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희생을 드리겠다고 약속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에서는 "주님께 희생제물을 바치고서 주님을 섬기기로 약속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드라쉬는 그들이 욥바로 귀환하여 개종자가 되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 속으로 요나가 던져질 때에 거세게 불던 폭풍이 가라앉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변화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 앞에 도망을 가는 요 나, 문제 앞에 책임을 지는 요 나,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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