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욥 5:6-7)

  • 잡초 잡초
  • 556
  • 0

첨부 1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욥 5:6-7)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는 무대 뒤에 있는 연출자에 의해서 움직이게 됩니다. 배우가 연출자에게 대본을 완전히 바꾸어 달라고 한다고 해도 결국은 연출자의 지시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인간이 고난을 당할 때 왜 환난을 당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무대 뒤에서 배우를 움직이는 연출자의 큰 그림을 모르고 있듯이 인생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주장은 고난의 원인(Cause of Sufferings)을 인간의 내부의 죄성으로 보았습니다. 고난의 범위는 이 땅에 오고 오는 모든 인간들에게 미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인간에게 노출된 것이 아니라 때로는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명기 29장 29절에 『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가십니다. 

Ⅰ. 고난 자체는 본질상 선이 아닙니다. 

본문 5장 6절에 『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고 했습니다. 
고난은 잡초가 땅에서 나듯이 함부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임한다는 말입니다. 고난은 사람의 죄 값이라는 것이 본문의 중심 사상입니다. 
미가서 7장 9절에 『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병자를 고쳐주시고 말씀하시기를 요한복음 5장 14절에 『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선이라고 했습니다(시 107:1; 100:5; 106:1; 136:1).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며 악이 주와 함께 못한다고 했습니다(시 11:5-7; 92:15). 

하나님의 피조세계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창 1:31; 계 21:3-4; 22:1-5). 따라서 악은 하나님의 참된 본성이 아닙니다. 그의 지으신 피조세계 역시 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모든 것이 악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4절에 『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 아닙니다. 악은 결코 선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선을 위해 임했을 때에도 그 자체로 선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고통, 수고, 근심, 죽음 등등은 그리스도께서 해결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원수입니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이고, 죽음은 죽음입니다. 

Ⅱ. 고난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행하는 선을 위한 도구적 수단입니다. 

본문 5장 6절에 『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다른 무엇을 기대한다는 말입니다. 고난이 이유 없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난은 그 자체로서 선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고난을 도구로 사용하시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사고에 의존해야 합니다. 성경에 몇 가지 예를 들면, 

1)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심판을 행하는 공인된 수단으로 삼습니다. 
민수기 16장 31-35절에 『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가로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 오십인을 소멸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회개를 가져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2)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완고한 인간들을 교정시키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잠언 3장 12절에 『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C. S. 루이스는 고통은 반역하는 심령들에 대한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했습니다. 욥기가 주는 교훈은 고난은 반드시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극히 경건한 자들에게도 고난이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건하게 살려고 한다고 해서 환영받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신령한 열매를 위해 고난이라는 기름 가마를 사용하시면서 더 큰 해악으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3)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그의 백성들의 신앙을 성장시키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로마서 5장 3-5절에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을 더 깊이 의지하게 하시려고 고난을 계획하십니다. 
빌립보서 4장 11-12절에 『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최고의 성장과 탁월한 신앙 인격을 배양시키기 위해 고난을 수단으로 삼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에 『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시험을 받았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십니다(히 4:15).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세 번에 걸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이 어려웠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순종함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함으로 예수님 자신의 삶은 고난이 핵심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4)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을 깨닫게 하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12절에 『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고후 12:9). 
바울은 경건한 사람인 동시에 충성된 사람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노출 되는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과 함께 하는 것으로 그는 만족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신의 전지전능성과 충만한 은혜가 확실히, 그리고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고난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5)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고난 받는 자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구비시키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5-7절에 『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6)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만 소망을 두게 하고 고난과 함께 살게 하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8-20절에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에 요구하는 고난을 수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태복음 5장 10-12절에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Ⅲ. 고난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우리 를 두기 위해 우리의 변화를 꾀하는 도구적 수단입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에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온전한 기쁨은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의 변화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격적 변화는 고난을 통하여 창조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올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은 고난을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사상에서 이해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고난 속에서 적극적이고도 세밀하게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3-5절에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나 바울은 성도가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하고 낙심하지 않아야 하는 뚜렷한 이유는 하나님의 손이 그 고난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①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 ② 고난을 통해 이루시는 선하신 목적 ③ 고난을 통한 인격의 변화 ④ 고난을 통한 거룩한 소망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자신이 의도한 대로 거룩하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엡 1:4-5; 롬 8:30). 
고난 자체는 선이 아니지만 고난 속에 들어 있는 목적이 선하므로 그 고난은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선한 목적이 없으면 소망이 없겠지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온전히 기쁘게 여기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Ⅳ. 고난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사용하시는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적 수단입니다. 

본문 5장 7절에 『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 '인생이 고난을 위해 났다'는 말은 인생이 고난을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인생이 처음부터 자신 속에 고난의 원인인 죄악을 가지고 났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생에게 있는 고난은 자신의 분깃으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옆에 있는 한 강도가 말하기를 누가복음 23장 41절에 『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라고 했습니다.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왕하 14:6; 대하 25:4). 모태에서부터 패역한자라고 했습니다(사 48:8). 
시편 5편 5절에 『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우고 인간을 배우게 됩니다. 인생은 고난을 통하여 성장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떠나가게 해 달라고 세 번 주께 간구했습니다(고후 12:7-10). 
이 말의 참 의미는 간절히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이때 바울은 하나님이 충분히 육체의 가시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끝내 제하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고통은 하나님의 의도적인 행위와 주권적인 명령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에게 허용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육체의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했겠습니까?(고후 12:7) 그러나 고통을 준 당사자는 사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한 선한 목적을 위하여 그에게 고통을 감수하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고통이 떠나가도록 해달라는 바울의 기도는 이제 고통 자체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열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그 고통 중에도 육체의 가시를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를 멈추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고통을 자랑으로 여기고 기쁨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아고보서 1장 2절에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는 고난을 알리지 않기로 정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맹목적인 상태로 방치하시지는 않습니다. 항상 자기 백성들의 유익과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지향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영광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전부를 그 영광에 참예토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곳에 참예하는 이것이 우리의 영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레함 켄드릭은 '기쁘게 여기라'는 찬양에서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목적을 잘 표현했습니다. 
시험이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말고/ 도망하지 말라/ 너의 눈을 들어라/ 마음을 굳게 먹어라/ 강하게 하라/ 믿음을 가져라/ 믿음을 지켜라/ 너의 눈을 들어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니/ 
기쁘게 여기라/ 온전히 기쁘게/ 굽히지 말라/ 결국은 면류관을 얻게 되리라/ 
기뻐하라/ 온전히 기뻐하라/ 기쁘게 여기라/ 온전히 기쁘게/ 기뻐하라/ 온전히 기뻐하라/ 기쁘게 여기라/ 온전히 기쁘게/ 굽히지 말라/ 면류관을 얻게 되리라/ 면류관을 얻게 되리라/ 면류관을 얻게 되리라/

-아 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