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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점점 강하여 가고 (삼하 2: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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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강하여 가고 (삼하 2:1-3:30) 
 
 
오늘은 다윗이 유다 왕이 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은 드디어 지긋지긋한 도피 생활을 끝내고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여호와께 물어”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어디로 가리이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받아 헤브론으로 갑니다(2:1). 주인의 뜻을 묻고 순종하는 것은 종의 기본자세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의 종’이라는 정체성이 분명하게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지요. 이 후에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습니다(4a). 다윗은 하나님의 종인 왕으로서의 독특성을 나타낼 수 있도록 준비되었습니다.

유다 족속의 왕인 다윗의 행적은 “사울을 장사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라고 축복하며,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겠다고 한 일입니다(4b-6). 정적을 숙청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보듬습니다.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저희의 왕을 삼았”다는 사실을 은근히 알리면서(7), 그들도 적절한 반응을 해 줄 것을 기대했지요. ‘이제는 기름 부음 받은 나에게 무릎을 꿇어라’는 식의 고자세도 아닙니다.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이방 왕들처럼 강제로 ‘취하려’ 하지 않고 주실 때까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모습이지요.

당장의 상황은 다윗의 기대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군장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8-9). 다윗이 유다 왕으로서 7년 6개월을 통치했으므로, 이스보셋은 5년 6개월 동안 “길르앗”부터 시작해서 나머지 지파들의 세력을 규합한 후 “두 해 동안”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지요(10-11). 다윗의 보듬는 정책이 당시로서는 효력이 없었고 겨우 1/12 지파만을 통치했을 뿐입니다. 10년의 광야 세월 동안 기다린 후에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날을 다시 기다려야만 했던 셈이지요.

기다리는 일에 지치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왕 주실 것을 좀 더 빨리 주시지 않으시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하지만 다윗이 겨우 한 지파의 왕이 되어 나머지 지파들과 대치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은 내전 중인 그들을 그냥 두었습니다. 그 동안 다윗은 국방력을 키울 시간을 벌었고, 그 후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블레셋이 침공을 방어할 수 있었지요. 때로 우리가 걷는 길이 굽어 도는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실수 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고 말합니다.

지금 다윗에게는 땅을 넓히고 많은 사람을 확보하는 일보다 신정왕국의 통치할 자질을 연마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작은 분량을 먼저 맡기셨지요. 세상은 뭔가 가져야만 일하기가 편리해서 학벌을 조작하고 명함도 과장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왕은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많은 것으로” 맡기십니다(마 25:23).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고 하셨지요(눅 16:10).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면서 자질을 연마해야, 많이 주신 후에도 하나님 백성다울 수 있습니다.

12-32절의 기브온 전투는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3:1a)의 한 단면입니다. 전투 제안과 휴전이 모두 아브넬의 입에서 나왔지요(14, 26). 다윗이 동족상잔을 원하지 않아도, 더 이상 도피자가 아니므로 걸어오는 싸움까지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두신 하나님의 사명을 생각하면 패배해서도 안되었구요. 한 지파와 열 한 지파 연합의 대항이었지만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졌습니다(3:1b). 전쟁은 여호와께 달렸는데, 여호와께서 다윗을 도우셨던 것이었지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신정왕국의 왕으로 통치할 수 있는 기반을 점점 마련해주셨습니다.

3장 2-5절은 헤브론에서 얻은 다윗의 가족을 소개합니다. 다윗의 결혼은 정치적인 면이 있습니다. 부요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과 결혼한 것은 광야 생활에서 부족했던 식량 공급을 도왔겠지요. 요단 동쪽 상류지역에 있는 “그술 왕 달매의 딸”과의 결혼은 그 부근 마하나임에 있는 이스보셋을 제어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왕이 많은 아내를 두는 것은 당시 풍습으로는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일부다처는 아담에게 한 아내만 주셨던 결혼의 원칙에는 위배되지요. 결국 많은 아내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들 중에서 “맏아들 암논”과 셋째인 “압살롬”은 다윗의 생애에 큰 아픔을 가져다줍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삼상 13:14)이라는 평가는 도덕적으로 탁월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종으로서 주인의 뜻을 잘 감당했기 때문이었지요. 비록 그 시대 사람보다 불의하지는 않았지만, 다윗은 그 시대의 유행과 풍조를 초월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야곱 역시 성경적인 부부관을 따라 살지는 못했지요. 시대를 초월하는 탁월한 윤리로 살기 힘든 인간의 한계를 참작하셨기 때문인지 하나님께서 이런 문제를 크게 지적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럴지라도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 삶의 영역은 언제나 그들의 생애에 큰 아픔을 주었다는 성경의 기록들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장 6-11절은 사울 집의 실권자인 아브넬과 이스보셋 사이에 사울의 첩 문제로 분열이 생겼음을 기록합니다. 아브넬은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 위를 …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을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내용으로 알고 있었습니다(9-10).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지금까지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지요. 반면 이스보셋은 주어진 혜택을 누리면서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분열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뜻을 저항하고 훼방하는 대적자들을 결국은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방향으로 역사를 진행하심을 보여줍니다.

아브넬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려고 시도합니다. “이 땅이 뉘 것이니이까”(12a)라는 질문은 마땅히 다윗이 차지해야 할 땅이라는 의미, 아직은 아브넬 수중에 있는 땅이라 의미가 이중적으로 있습니다. 통일하려면 자신의 힘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로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12b)는 말로 표현했지요. 그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이 다윗을 돕고 계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회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대세가 이미 다윗에게로 기울었음을 알고 신변의 안전과 적절한 보상을 약속받는 정치적 협상을 제안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제안을 수용하면서 “나를 보러 올 때에 위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렇지 않으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요구”합니다(13). 그리고는 아브넬이 아닌 “이스보셋에게”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고 요청했지요(14). 사울의 사위로서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협상안을 평화적으로 실현시킬 실권이 아브넬에게 있는지는 파악할 수 있는 조치였습니다. “발디엘”은 애초에 취하지 말았어야 할 타인의 아내를 취한 대가로 이제 가슴 찢어지는 슬픔을 겪습니다. 발디엘 역시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 결혼으로 슬픔을 격지요. 다윗의 요구는 정당했습니다.

아브넬은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너희가 여러번 다윗으로 너희 임금 삼기를 구하였으니 이제 그대로 하라”(17-18)며 그것이 여호와의 뜻에 맞음을 밝힙니다. 또 사울의 족속인 “베냐민 사람의 귀에 말하고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히 여기는 모든 것을 다윗의 귀에 고하려고 헤브론으로”(19) 갔습니다. 다윗을 가장 대적했던 사람을 통해 열한 지파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다윗에게로 기울어지는 놀라운 일이었지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는 말씀처럼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협상은 “잔치” 속에서 진행되었고 이 단락에서 “평안히” 갔다는 말이 3번 반복되었습니다(21, 22, 23). 그런데 “다윗이 알지 못”하는 중에(26),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헤브론”으로 유인해서 죽였습니다. 아브넬이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지요(27; 2:23). 요압은 사적인 감정을 앞세워 하나님의 뜻을 크게 훼방했습니다. 헤브론은 고의적이지 않은 살인자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도피성들 중 하나였는데, 요압은 하나님의 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갑자기 평안은 깨어졌고 잔치는 피흘림으로 변했습니다. 평화통일의 길목에 중대한 장애가 생겼지요.

잔치 석상에서 아브넬은 다윗에게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하게 하고 마음의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21)고 말했었습니다. 다윗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실 분은 아브넬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신정왕국은 왕이 원하는 대로 다스릴 수 있는 나라도 아니구요.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것 같지만 아브넬의 생각은 세속적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말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가진 인물을 당신님의 나라에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인물이 많아지면 하나님 나라도 세속화 될 것이니까요.

본문은 하나님의 뜻이 정책을 잘 실행하거나 사람들끼리 협상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다윗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지요.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그 일들도 합력해서 선이 되게 하셨는데, 하나님 나라가 다윗이나 아브넬의 손에 좌지우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나라를 점점 강하게 세워 가시는 과정에서 순종하는 자는 준비시켜서 쓰시고, 훼방하는 자들는 제거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거나 건설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분께서 맡기신 작은 일에 충성하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신뢰 중에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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