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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크고 강하신 여호와를 앙망하라 (사 40: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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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강하신 여호와를 앙망하라 (사 40:27-31)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부터 잠시 일상의 삶을 벗어나 산으로 들로 휴가를 준비하거나 떠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휴가의 休자는 사람人변에 나무 木자가 놓여서 된 글자입니다. 暇자는 한가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나무들 속에서 한가하게 있는 것이 바로 휴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휴가(休暇)라는 말속에는, 떼를 지어 소란을 떨거나, 피곤에 지치게 여행하는 것이 휴가가 아니라, 조용한 곳에서 묵상하며 쉬는 것이 진정한 휴가라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조용하게 묵상하면서 나를 쉬지 못하게 하는 것, 탐욕과 야욕, 시기와 질투, 분노와 교만이 내 안에는 없는지 깊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취지와는 달리 모처럼 휴가를 가게 되면 길에서부터 또는 여행지에서 여러 가지 일들로 오히려 더 피곤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약국에서는 피로회복제가 제일 잘 팔리고, 동네마다 사우나와 찜질방이 성업 중입니다. 그런데 막상 쉬어 봐도 그때뿐이지 피로감이 말끔하게 해소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심한 경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 피곤해!” 이 말을 달고 삽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피곤을 느낍니다. 아마 저마다 피곤을 해결하는 방법 하나쯤은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머리가 지끈 거릴 만큼 신경 쓰이는 일이 생겼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친구를 만나서 속이야기를 나누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몸이 무겁고 말을 잘 듣지 않습니까? 이럴 때 잠을 달게 자고 나면 몸이 가뿐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피곤을 풀기 위해 배낭을 매고 산으로 가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라켓을 들고 밖으로 나가 땀을 흘리기도 합니다. 모두들 각기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피곤을 해결합니다. 

그러나 삶 자체가 주는 본질적인 피곤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실패가 주는 피곤을 여러분은 어떻게 풀고 있습니까? 평생을 안고 살아야 하는 심각한 질병이 주는 피곤을 어떻게 풀고 있습니까? 남몰래 가슴속에 깊은 고뇌를 안고 씨름할 때 오는 그 피곤을 여러분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잠을 잔다고 해결이 됩니까? 산에 가서 두세 시간 있다가 오면 문제가 사라지고 없습니까? 그렇게 해서 해결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몸이 좀 피곤하고 머리가 복잡할 때는 대부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주는 본질적인 피곤은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습니다. 이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 여유롭고 풍족하게 살던 제왕 솔로몬도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만물이 얼마나 피곤한가를 말하면서 그는 한술 더 떠 온 우주 만물이 다 피곤하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달과 별도 피곤하고, 물과 나무도 피곤하고, 동물도 피곤하고, 물고기도 피곤하고, 피곤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인간은 유달리 피곤함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피곤은 어느 피조물의 피곤보다 더 노골적이고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3천 년 전의 솔로몬 왕도 그렇게 피곤한 인생을 살았다니, 정신없이 복잡하고 너무 빨라서 도무지 숨쉴 틈도 없는 현대 문명을 살아가는 우리가 왜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피곤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피곤한 것이 당연하다고 해서 이 피곤을 그대로 쌓아 놓고 해결하지 않는다면 무기력증에 걸리게 되고, 마음에 낙심이 찾아옵니다. 마치 험난한 파도와 싸우던 선원이 쉴 새 없이 계속되는 파도에 지쳐 배를 포기하고 바다로 뛰어드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 삶에 대해 그렇게 행할 수 있습니다. 오만 가지가 다 하기 싫어집니다. 백기를 들고 항복하고 싶습니다. 도망가고 싶습니다. 급기야 자살을 선택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근본적인 피곤을 해결하는 방법 하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를 앙망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앙망하라. 실패가 주는 피곤이든, 질병이 주는 피곤이든, 인생의 무거운 짐으로 피곤할 때마다 나를 앙망하면 반드시 내가 너를 그 피곤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또 새 힘을 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40장 말씀입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앙망’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비틀어서 하나로 묶는다’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물건을 하나로 모으려면 비틀어서 한데 묶어 놓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이 어떻게 ‘앙망’이라는 단어와 통하는지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간절히 소망하고, 간절히 바라보다 보면 우리 몸이 비틀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시편 저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종일토록 바란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한두 시간 기다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간절하게, 아주 간절하게 기다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몸이 뒤틀리는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일컬어서 ‘앙망한다’고 표현합니다. 이런 표현이 또 하나 있습니다.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얼마나 기다리고 바라보았으면 눈이 침침해질 정도로 피곤을 느꼈겠습니까? 이만큼 사모하는 것이 곧 앙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시고 모든 피곤에서 벗어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이든, 사랑하는 사람을 앙망하는 것이든 간에 앙망을 하려면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내 마음이 움직여서, 그쪽으로 열심히 향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을 때 앙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옆에서 누가 떠민다고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협박을 해도 억지로 앙망하도록 만들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협박을 해도 억지로 앙망하도록 만들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앙망하기 원하는 사람은 꼭 하나 알아야 될 것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가, 얼마나 강하신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하고 능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입니다. 안 믿는 사람보고도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그분은 대단하지? 이런 이야기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크시고 강하신 것을 우리가 다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한두 가지만 알아도 우리는 그를 앙망하지 아니하면 안될 만큼 마음의 감동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첫째, 이사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을 보면 그가 얼마나 크시고 강한 분인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정연한 법칙에 따라서 우주를 지키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사야 48장 13절에 말씀하십니다. “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크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누굽니까? 우리 아버지 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앙망하라고 말씀합니다. 그 하나님의 크고 능하심을 우리가 하늘을 보고 알 수만 있다면 어찌 그를 앙망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그를 찾지 않겠습니까? 어찌 그를 향하여 부르짖지 않겠습니까? 

둘째, 이사야는 하나님에 비해서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이 크고 강하심을 믿도록 하고 있습니다. 40장15절에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세계만민이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불과하고 저울의 접시 위에 앉은 먼지나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가요? 얼마나 강하신가요?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고 합니다. 인간이 메뚜기만큼 잘아 보인다고 합니다. 또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다고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새롭게 에너지를 보충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항상 충분하십니다. 우리가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에 가고, 배가 고프면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듯이 그렇게 계속 충전을 받아야 힘이 생기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에너지를 공급받기 위해 어디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한 모든 힘은 자신의 무한한 존재 속에 내재되어 있으며, 졸지 아니하는 충만함 속에 거하십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반면에 우리 인생은 그렇게 힘이 펄펄 넘치는 청년이라도 금방 피곤해지고, 도무지 지치지 않을 것 같은 장정이라도 세월이 조금만 지나면 넘어지고 자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능력이 많고, 그 크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은 얼마나 하찮은 존재입니까? 우리를 보고 메뚜기니, 버러지니 하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실 우리도 대단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굉장합니다. 조금만 잘못 생각하면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착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염색체가 정보량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 하면, 염색체 하나에 정보량이 200억 바이트나 된다고 합니다. 

200억 바이트란 300단어를 쓴 A4용지로 200만 장을 찍어내는 정도의 정보량입니다. 이것을 500p 짜리 책으로 만들어 도서관에 비치한다면 그 양이 4천 권의 책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염색체 한 개에 장서 4천 권 규모의 도서관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분석하면 분석할수록 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정교하고 대단한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이 메뚜기야, 버러지야”하고 부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광대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그만큼 크신 하나님을 우리는 아버지로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앙망하라는 거예요. 피곤하다고 짜증 부리지 말고, 실망하지 말고, 그럴 때마다 이 크고 강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서 짝할 자가 하나도 없는, 비교할 자가 하나도 없는 저 크시고 광대하신 하나님 앙망하면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십시오. 앙망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앙망은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앙망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그분이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주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눈이 쇠하도록 하나님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앙망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주신다는 것입니까? 31절을 다시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_’ 여기 ‘새 힘을 준다’는 말은 ‘새롭게 한다’ 혹은 ‘재충전 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아무리 믿음 없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성경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말씀을 들으면 힘이 납니다. 그런데 어떤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까? 

첫째는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힘입니다. 한번 독수리가 올라가는 그 비상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독수리의 힘은 양 날개에 있습니다. 양 날개를 쫙 편 채 기류를 이용해서 유유히 날아가고, 때로는 날개 짓을 하며 힘차게 창공을 향해 솟아올라갑니다. 바람의 힘이 없으면 날아갈 수 없지만, 양 날개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때로는 양 날개를 쫙 펴고 기류를 타며 날아갑니다. 때로는 양 날개로 날갯짓을 하며 힘차게 하늘로 솟아오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에 있어 말씀과 기도는 양 날개와 같습니다.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잘 활용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을 충만히 받을 수 있습니다.① 말씀의 날개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나니 ...”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성령의 능력이 부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성경 말씀을 섭취해야 됩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 다양한 방법으로 섭취해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특히 암송하는 게 좋습니다. 암송하면 마음속에 말씀이 살아 있어, 언제라도 나올 수 있습니다. 처한 상황에 맞는 말씀을 기억하고 적용함으로 능력 받고 승리하게 됩니다. 이런 분에게 어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겠습니까? 

② 기도의 날개 :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영적인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1세기 초대교회 시대는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교회와 성도들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 때는 대박해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유대인의 박해, 로마 당국의 박해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상황인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가 말입니다. 외적으로는 힘들었지만 그들은 기도하는 가운데 새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행1:13-14절을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 직전에 기도운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과 성도들이 다락방에 모여 기도합니다. “더불어 마음이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바로 그때 성령이 강림했고 그들은 성령 충만해져서 밖으로 나가 복음을 담대히 증거합니다. 그러다가 체포당합니다. 그러나 풀려난 후 어떻게 합니까? 사실 붙잡혀 들어가서 혼나고 나면 더 무서운 법이데 행4:31 보면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 이것이 바로 새 힘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기도함으로 능력 받고 또 나아가 복음을 증거 합니다. 

세상이 짓눌러도 결코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핍박당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예수 믿고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족을 잃었습니다. 직업을 잃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핍박받아 나중에는 산 속에서 유리하고 사막에서 방황하다가 굶어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은 형장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외로운 그 자리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순교했습니다. 알면서 다 따라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영혼 가운데 새 힘, 영적인 능력이 부어지면 우리의 삶은 전혀 피곤하거나 지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승리의 삶이 연속적으로 펼쳐집니다. 그 모습을 31절(하)에서 뭐라고 묘사합니까? “ ...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 하리로다” 피곤하지도 지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승리하다 말다 하는 게 아니라, 연속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는 걷는 것을 멈추는 순간 죽게 됩니다. 인생을 완주할 때까지 우리는 쉬지 않고 꾸준히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신앙생활이 날아다니거나 달음질할 수만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걸어 다니는 삶이 더 많을 것입니다. 솟구치던 삶이 한 순간 골짜기를 경험 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나 속도가 조금 느린 것 같고, 어쩌면 박진감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걸어갑니다. 신앙의 첫사랑으로 날아오르는 경험도 소중하고, 뒤이어 달리는 경험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계속해서 걷는 것입니다. 

찬송가에도 이런 노랫말이 나옵니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함은….” 이 가사처럼 걷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을 보면, 십자가를 지고 그 험한 길을 낙심하지도, 주저앉지도 않고 끝까지 걸어가 결국엔 승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반면 한동안 막 날아다니는 것처럼 하다가 그 다음에는 이내 곤두박질치고 떨어지는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날아야 할 때도 있고, 달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늘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는 걷는 것을 멈추는 순간 죽게 됩니다. 인생을 완주할 때까지 우리는 쉬지 않고 꾸준히 걸어야 합니다. 

걸어갈 힘을 계속 얻으려면 하나님을 앙망해야 합니다. 앙망하면 새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피곤한 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자기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새 힘을 주신다고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저 높고 넓은 하늘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크신 하나님, 광대하신 하나님이 자기를 앙망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독수리처럼 날아오를 수도 있고, 소년처럼 달려갈 수도 있고, 험한 사막이라도 꾸준히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피곤하십니까? 세상 살아가는 일이 만만치 않으십니까? 하나님을 앙망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새 힘을 받으면 현실의 어려움을 넉넉히 극복하고 승리합니다. 환란을 이깁니다. 위로받고 인내하고 견뎌냅니다. 극복합니다. 문제를 해결합니다.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기적을 창출합니다. 이런 예는 성경에서 무수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도 날마다 일어납니다. 이제 우리 가운데 어려움이 있고, 또 뜻하지 않는 문제가 있을찌라도 그 문제에 눌리지 말고 그 문제를 타고 오늘 수 있는 강한 믿음의 날개를 달고 올라야합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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