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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쉼으로의 초대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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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으로의 초대 (마 11:28-30)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전쟁에서 의외로 고전을 하더니 전쟁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싸우면 이기고, 또 싸우면 이기던 군대입니다. 그의 군대는 모든 나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게 막강한 알렉산더의 군대가 보잘 것 없는 페르시아 군대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패배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자신의 군대에 무엇이 문제인가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군사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행군을 하는데 무엇인가를 무겁게 지고 가면서 매우 치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몇 명의 군사를 불러서 그들의 배낭을 내려 열어 보게 했습니다. 배낭 안에는 전쟁에서 챙긴 값진 노획물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 상태로 전쟁에 나갔으니 군사들이 생명을 걸고 싸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모든 군사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장교와 사병을 가릴 것 없이 그들에게 보급품 이외의 모든 물건들을 한 곳에 쌓아 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군사들에게 불필요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 물건들 위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행군해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 중에는 삶의 무게를 힘들어 하며 ‘사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 고 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삶의 자리를 조금 깊이 들어가 살펴보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분은 여유가 있는 대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은 어려운 대로, 배운 것이 많은 분은 많은 대로, 배운 것이 적은 분은 적은 대로 힘들어합니다. 건강한 분은 건강한 대로, 약한 분은 약한 대로 삶의 무게를 힘들어합니다. 

현대인들이 한 결 같이 하는 말은 ‘쉬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의 무게에 지쳐 힘들어 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들이 오늘 본문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바르게 이해할 때 진정한 쉼과 안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어떻게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땀을 흘리며 일을 하는 것이 수고이고 무거운 짐입니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은퇴하신 분들에게 물어보면 ‘땀을 흘리며 바쁘게 일을 할 때가 좋았어’ 라고 말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땀 흘려 일하고 수고하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도리어 그것이 삶에 있어서 진정한 복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쉼은 수고와 애씀이 없이 무위도식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땀 흘림을 댓가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감사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뚜렷하게 구분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원어로는 ‘수고하고’는 능동형으로 쓰여 있고, ‘무거운 짐 진 자’는 수동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즉 능동형으로 쓰인 ‘수고하는 자’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쉬지 않고 과도하게 무엇인가를 계속하면서 지친 상태를 말합니다. 수동형으로 쓰인 ‘무거운 짐 진 자’는 타의에 의해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게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일을 하거나 떠밀리 다 시피 하면서 억지로 일을 하는 사람에게 기쁨과 감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기쁨과 감사가 없는 사람에게 행복이 있을 수는 더 더욱 없습니다. 

성경에서 수고라는 단어가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3장 16,17절에 나옵니다. 한번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에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내리신 벌입니다. 하와에게는 자식은 낳는 것은 축복이지만 자식을 낳는 수고를 겪는 고통을 주셨습니다. 아담에게는 이제부터 종신토록 땀을 흘리며 수고하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은 노동의 가치를 귀하게 여깁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노동을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죄를 짓기 전에도 에덴 동산에서 노동을 하여 밭을 경작하며 열매를 따는 노동이 있었습니다. 노동은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노동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도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노동, 일을 죄의 결과가 아닌 축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노력과 땀 흘리는 수고가 없이 수확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경제의 법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제의 법칙은 손이 수고한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짓고 타락한 후에 노동의 수고에 대한 개념이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 하면 즐거워야 할 노동이 고통스러운 노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 죄의 동기가 노동의 정신을 지배하면서 즐거워야 할 노동이 고통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라고 말씀하실 때 능동형을 쓴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죽기 살리로 하는 노동의 수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것입니다. 욕심과 욕망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해갈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갈증이 심하게 됩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끝없는 욕심은 어김없이 죄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죄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욕심은 강한 집착으로 나타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을 품었을 때 선악과에 강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에게는 평화와 행복이 깨졌습니다. 선악과에 집착하면서 그 외에 주신 모든 것이 복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소유할 수 없는 선악과 한 가지로 인해 불평하게 되고 원망하며 불행해 했습니다. 한 가지에 대한 잘못된 집착이 삶의 모든 행복을 불행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내가 물질에 대해서, 내 명예에 대해서, 권세에 대해서, 자식에 대해서, 인기에 대해서 무엇인가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자유를 상실하고, 평안을 깨뜨리고 욕심의 노예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게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 나에게 있는 다른 것의 소중함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돈을 버는 일에만 집착하면 그 돈으로 인해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친구도, 신앙도 모든 것이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도리어 돈을 버는데 장애물처럼 여겨질 수도 있어서 원망과 불평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욕심의 노예가 되어 감사와 기쁨을 잃고 사는 사람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대하시며 쉼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쉼을 약속하시면서 한 가지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너희가 참된 쉼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멍에 비유는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틴 지역에서 농사짓는 문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멍에는 농부가 농사를 지으면서 소에게 쟁기를 끌게 하기 위해 씌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때 어미 소와 새끼소에게 함께 멍에를 씌웠습니다. 어미 소의 멍에는 쟁기와 연결시켜 밭을 갈게 했습니다. 새끼소에게도 멍에를 씌웠지만 쟁기를 메지는 않았습니다. 새끼소는 단지 어미 소를 따를 뿐입니다. 힘은 어미 소가 쓰고 새끼소는 단지 따라갈 뿐입니다. 그렇게 따라 다니다 보면 새끼소가 크면서 자연스럽게 쟁기를 끌고 밭은 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삶의 멍에를 지고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를 부르시면서 당신과 함께 멍에를 메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멍에를 말씀하시면서 온유하고 겸손한 멍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의 멍에’와 ‘온유하고 겸손한 멍에’ 가 나옵니다. 우리가 인생의 밭을 갈면서 힘들게 지고 사는 멍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의 멍에’입니다. 

이 멍에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아지고, 더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심의 멍에이기 때문에 이 멍에를 지고 인생의 밭을 갈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의 멍에를 벗고 당신의 멍에를 지고 따라 오며 당신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멍에는 ‘온유하고 겸손한 멍에’입니다. 이 멍에는 높아지기 보다 낮아지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보다 나누는 것을 더 기뻐하는 멍에입니다. 이 멍에는 쉽고 가벼워서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쉼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온유하다’라고 하면 미약하고 온순하여 불의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어떤 일도 제대로 진행시키거나 처리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떠 올립니다. ‘온유’라는 헬라어의 의미는 ‘통제된 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생마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그러나 명마는 자신의 의지와 힘을 통제하고 주인의 뜻에 따라 힘을 분출합니다. ‘온유’라는 말은 바로 명마와 같은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한 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삶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시편 37편 5절에서 하나님은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온유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내려놓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5장 5절에 나오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축복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복은 내 욕심과 욕망을 채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은 만족이 없기에 욕심을 중심으로 한 삶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언제나 감사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여러분, 혹시 내 삶에 있어서 ‘나에게 이것 없으면 내 인생은 끝이야. 내 인생은 끝난 거야’ 하고 집착하는 것이 있습니까? 내 욕심을 중심으로 아직 채워지지 않아 불안하고 속상한 것이 있습니까? 그 멍에를 하나님 안에서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내려놓는 순간 인생의 모든 것이 다 허물어질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내려놓는 순간 인생에서 가장 큰 평안을 얻게 될 것이고, 내가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았는지를 발견하며 감사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손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채우십니다. 진정한 행복과 축복은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며 말씀에 따라 인도함을 받는 그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의 욕심을 중심으로 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의 삶에서 그 짐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품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약속하신 진정한 쉼을 얻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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