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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후의 만찬 (막 14: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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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막 14:22-31)


어느 큰 집안에 결혼식이 있어 음식을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집 주인은 그 집에 있는 동물들을 모두 소집하여 의논을 하였습니다.
“이번 결혼식에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잔치를 베풀려고 하는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동물들은 입을 모아 “찬성이요, 대찬성이요”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집 주인은 “그럼 이 요리의 재료로 거위를 죽이기로 합시다”라고 말하자 거위는 새파랗게 질려서 소리쳤습니다.

“나는 큼직한 알을 낳아서 이 집안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죽이려면 저기 있는 암탉을 잡으십시오.”
암탉도 외쳤습니다.
“무슨 소리요? 나는 아침을 알려 주는 거룩한 직분을 맡고 있소. 저기 시원찮은 양이 있으니 저 녀석을 죽이시오.”
양도 외쳤습니다.
“내 털이 주인의 가족을 따뜻하게 보호해 주고 있소.” 
양은 말없이 개를 가리켰습니다.

개도 소리 질렀습니다.
“나의 은혜를 배신하다니, 도둑을 지키고 여우나 늑대를 지키는 것이 바로 내가 아니오? 말을 죽이시오.”
말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멀리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의 덕분이오. 내 잔등은 앉기도 편해서 저기 쓸모없는 소 같은 것하고는 질이 다르오.”
소도 한 마디 하였습니다.
“나 없이 농사도 됩니까?”

이 우화를 계속하려면 영원히 계속할 수가 있습니다. 하여간 이 회의를 진행하는 도중 그들은 자신이 죽는 장면에 가서는 각자가 불평과 반대 발언을 하지만 잔치를 벌이자고 하는 장면에서는 만장일치로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영광의 잔치는 좋으나 희생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현실을 잘 보여주는 우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사실은 이렇습니다. 또한 그것은 그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삶의 모습이기도 하고요. 오늘 우리는 최후의 만찬에서 이를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이 주신 떡과 포도주의 의미입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저녁 식사를 나누시면서 빵을 가지고 축복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눠 주십니다. 그런데 빵을 떼어 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뜻밖입니다. 이 빵이 곧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으로 세상이 지어졌는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광야로 나가 40일을 금식하는 가운데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는데 그때 사단이 40일을 굶주려 배고픈 예수께 제일 먼저 한 시험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그러니 이 돌로 빵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 예수님께서 내 몸이라고 하신 빵이란 곧 예수님 자신으로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하는 말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따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먹어야 할 빵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몸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받아먹음으로 다시 말해서 말씀대로 따라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왜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비결입니다. 왜 날마다 말씀을 받아먹어야 합니까?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깨닫게 되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누구로부터 받아야 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께로부터 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세우신 주의 종들을 통해 말씀을 받아야 하고 예수님께서 보내신 다른 보혜사 곧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떠나 다른 데로부터 오는 것은 결코 말씀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단으로 말미암는 거짓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말씀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듯이 말씀을 받을 때도 성령의 감동 안에서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 뜻대로 말씀을 취사선택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제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감동과 능력을 그 어떤 것으로도 막거나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이것이 내 몸이라고 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나던 날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 희생제물로서의 어린양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예수 안에서 같이 죽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예수 안에서 영원한 언약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께서 만찬을 나누기 위한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요한복음 14장으로부터 16장까지 쭉 계속이 됩니다. 그 첫머리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는 마치 거처를 준비해놓고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서 오는 신랑을 연상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요 우리는 다 예수님의 신부로 성령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신랑이 신부를 위해 준비하고 오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 신랑이 신부를 위한 거처를 준비하기 위해서 떠날 때 마지막 언약의 잔을 나누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신부가 신랑이 건네는 포도주 잔을 받음으로 해서 “나는 당신의 신부요 당신과 영원히 함께 하겠습니다” 하는 고백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잔을 받아 마심으로 이미 예수님의 신부됨을 고백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 예수님의 거룩한 신부가 된 것이요 영원한 언약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제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준비하라고 하시고는 타는 횃불로 그 제물 가운데를 지나신 것처럼 오늘 우리와도 언약을 맺으시는데 이번에는 소나 양이 아닌 예수님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그 예수라는 제물 가운데로 하나님께서 지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아니 우리 모두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백성 곧 성도라 부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저 단순히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는 것 같아도 이렇게 되기까지는 먼저 자신을 희생의 제물이 되어주신 주님의 거룩한 희생의 보혈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거저 받은바 은혜라고 우리가 고백합니다. 나로서는 내가 믿습니다 하고 고백했지만 그 고백이 효력이 있도록 주님이 몸소 어린 양이 되어 주셔서 피를 흘려주시고 그 피를 우리 마음의 문설주에 발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재앙이 우리를 뛰어넘기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온전히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주님의 신부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는 것이요 동시에 이를 위해서 주님이 자기의 목숨까지 주셨음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감사하는 것뿐이요 내게 맡겨주신 직임대로 충성을 다해야 할 줄 압니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았던 종처럼 수고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는 칭찬과 더불어 더 큰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아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마음의 다짐과 현실 사이에서의 방황입니다.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그림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얼굴을 위시하여 열두 제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데,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그려나가다 가룟 유다를 그릴 때에는, 자기를 일생동안 괴롭힌 원수 같은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그 친구만 생각하면 마귀 같은 느낌이 들어, 가룟 유다의 얼굴은 그 친구를 모델로 그렸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야겠는데 좀처럼 영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몇 달, 몇 해를 두고 고심해도 예수님의 얼굴은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수도사를 만나서 자기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수도사는 대번에 “자네를 괴롭히는 그 친구를 용서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없을 걸세”하며 충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곧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회개했으며 그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고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마음이 열려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도 너희를 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너희를 용서하고 너희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또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희를 버리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연약한 우리들을 끝까지 붙들어 주시고 바로 세워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언약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작은 것이라고 해서 하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업신여기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까지도 심지어 원수까지도 품어주는 귀한 마음이 우리들 심령에 필요한 것입니다. 동시에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 앞에 엎드려 주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한 우리들의 모습을 회개하며 온전히 주님 말씀 안에 서서 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기까지의 과정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먼저 다혈질의 대명사 베드로가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선뜻 나서서 큰 소리를 칩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이건 사실 베드로의 다짐이기도 하고 베드로의 변함없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게 된 첫날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주님을 버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다 나를 버린다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입니까? 그래서 그가 자신 있게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러니까 마음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부딪칠 때는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부인하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이에 다시금 베드로가 말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모든 제자도 동일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예수를 팔겠다고 다짐한 가룟 유다 빼놓고는 모두의 말이 다 동일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건 누구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살고자 다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실 모두가 다 잘 하고 싶죠. 말씀도 잘 배우고 싶고 말씀대로 새벽을 깨우고도 싶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다 주를 위해서 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습니다. 그리고 아주 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이렇게 하리라. 그런데 막상 현실에서 부딪치는 어려움들이 있을 때 그러한 우리의 다짐은 언제 그랬냐 싶게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맙니다. 그 결과 나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못했고 라고 핑계거리를 찾기에 바쁩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핑계거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게 죽을 일 같은 큰 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문제들, 조금은 답답하고 힘든 일들, 속상한 일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 물론 큰 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무시해도 좋을만한 그런 것들로 인해서 우리가 주저앉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그건 사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따지듯이 말하고 있는 베드로나 동일하게 고백하고 있는 다른 제자들이나 다 마찬가지로 꿈에서조차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니 이건 처음부터 말을 지어내기 위한 말이지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결코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잘 섬기고 싶고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은 모두가 다 굴뚝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부딪치는 현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우선은 우리 몸이 힘이 듭니다. 거기다가 마음도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잠시만 눈을 질끈 감으면 된 텐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나 싶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숨이 턱에까지 차서 그저 주저앉고만 싶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습니다. 반면에 좀 어처구니없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갑자기 마음이 약해져서 그건 암만 해도 안 될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누구는 괜찮다고 하지만 그건 그 사람 이야기이지 나는 아닙니다. 마음으로야 다 잘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마음과는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고 현실이 뒷받침이 안 되니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그건 진짜 독종이나 하는 일이지 하겠지만 사실 진짜 용기가 필요한데 가서는 주저앉아 버리고 엉뚱한 데 가서 불필요한 호기를 부릴 때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 놓고서는 그 다음날 벌써 후회를 합니다. “내가 미쳤지 미쳤지 정말 내가 못살아”하면서 머리를 싸맬 때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 큰 소리 칠 때는 언제고 돌아서서 후회는 또 왜 합니까? 한데 그게 현실입니다. 

용기를 내야 할 때는 주저앉고 나서지 않을 때는 덜컥 나서서는 온통 다 뒤집어쓰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어요. 내가 다시 또 그러나 봐라 하지만 닥치면 또 그럽니다. 뭐 성을 갈고 손가락에 장을 지지고 뭐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그 말대로 한다면 아마 우리 가운데 자기 성을 온전히 가지고 있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아마 손마다 다 장을 지져서 너덜너덜할 겁니다. 그만큼 우리 마음의 다짐과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합니다. 아니 그것도 못하냐고 하지만 정말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 걸음걸이 하나 똑바로 못 걷냐고 하지만 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똑바로 못 걷습니다. 

신체 구조적으로 안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는 밤새 퍼마셔도 괜찮은 사람이 있는 반면 한 잔만 마셔도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거 뭐 쌀 소리 하기가 뭐 그렇게 어렵냐고 하지만 경상도 사람에게는 정말 신경 써서 말하기 전에는 참으로 어려운 말입니다. 의사 소리 뭐가 어렵냐고 하지만 남쪽 출신 분들에게는 의사 그거 참으로 발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사 또는 으사라고 그러죠. 그런데 믿음 안에서도 그렇더란 말입니다. 

내게는 참으로 쉬운 것이 상대방에게는 정말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의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을 통해서 이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힘으로가 아닌 내 능력으로가 아닌 내 지혜로가 아닌 주님의 힘으로 주님의 능력으로 주님의 지혜로 오늘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능히 이기고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들이 우리를 굳세게 강하게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큰일 났다”가 아니라 “주님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하실 때 “정말요? 그렇다면 큰일인데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나요?” 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했다면 상황은 또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니 사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해결책을 주셨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많은 성화들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지만, 그 그림이 그려지게 된 배경과 동기를 알게 되면 더 큰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그림들 중의 하나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도하는 손”입니다. 거칠어져 힘줄까지 눈에 뜨이는 손, 그러나 경건히 아름답게 포개어진 채 위로 향해 있는 손! 이 그림을 보기만 해도 우리는 경건한 마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일화가 있습니다.

한 마을에 두 소년이 살았습니다. 둘 다 그림을 곧잘 그렸기에 나이가 서너 살 달랐지만 늘 좋은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두 소년은 이런 의논을 했습니다. 도시로 나가 둘이서 힘을 모아 그림공부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도시로 나간 두 소년은 둘 다 공부하면 밥을 먹을 수 없으므로 나이 많은 소년이, 자기가 일을 할 테니 어린 소년이 먼저 공부를 하고 공부가 끝나면 서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먼저 공부하기로 한 소년은 열심히 공부하여 몇 년 후에는 그림을 팔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저녁에는 대단히 기쁜 마음으로 처음 그림을 판 돈을 들고 다른 소년이 일하고 있는 식당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창 밖에서 식당을 들여다보고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콘크리트 바닥에 자기 친구가 꿇어 앉아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일을 오래했기 때문에 뼈가 굳어져서 이제는 그림을 공부해도 훌륭한 화가는 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제 친구는 유명한 화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창 밖에서 소년은 이 기도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곧 종이를 꺼내어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그렸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봉사한 그 거룩한 손, 비록 거칠지만 친구를 위하여 희생한 그 손을 그려 오늘날까지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희생의 손이 되어주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은혜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주님이 오늘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지금도 저와 우리 모두를 위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오늘 우리가 부딪치는 현실 속에서 좌절하는 자가 아니라 주저앉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고 다 포기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패를 거울삼아 굳게 일어서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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