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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성전을 헐라 (요 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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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전을 헐라 (요 2:12-22)


서론 

오늘 요한복음 2장 후반부에 있는 말씀을 나누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많은 성도님께 친숙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정화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등 공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사건이 복음서의 뒷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만드셨는데, 그 사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됩니다. 

공관복음에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복음서 뒷부분에 기록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에는 복음서 앞부분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기록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에 대해서 성경학자들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두 가지의 일반적인 해석이 있는데,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라는 견해입니다. 예수님 사역 초기에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고, 사역 마지막에도 그렇게 하셨다는 보는 견해입니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신 것은 한 번인데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주셨던 의도에 비추어서 사건들을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사건들을 편집하여 재배치했기 때문에 이 사건도 요한 자신의 신학적인 목적을 위하여 앞부분에 배치하였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어느 쪽으로 보든지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는데, 성전 청결 사건이 요한복음의 앞부분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요한의 의도-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성전 청결 사건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불의한 유대교를 보고 선지자적으로 저항하신 사건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성격과 방향,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암시하고 있는 사건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요한복음 본문의 말씀을 이런 각도에서 접근하고자 합니다. 

Ⅰ. 장사하는 집, 성전 : 필요가 본질을 삼켜 버림. (14절) 

13절 말씀을 보시면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것처럼 당시 이스라엘의 남자는 1년에 3번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명절이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맞이하여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돈 바꾸는 사람이 성전 뜰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14절) 지금 이 장면은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데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2장 앞부분에서 첫 번째 표적을 보았는데,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표적은 Sign으로, 그 행동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통해서 명백하게 보여주는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은 물 같은 인생, 물 같은 유대교를 포도주와 같은 인생, 포도주와 같은 기독교로 바꾸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면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질 자체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표적 속에 함축된 메시지는 당시 신앙 공동체였던 유대교가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었고, 더 이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쁨을 주지도 못하고,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유대교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교가 생명력을 상실한 것은 성전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영적으로 타락했고 그 타락이 백성들 속에 흘러 들어갔기 때문에 유대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게 더 이상 기쁨을 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종교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어떻게 타락했는지 14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전 안에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존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릴 때 소와 양, 비둘기를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려야 되는데, 예루살렘까지 너무 멀었고 구약시대 제사에 사용할 수 있는 동물들은 율법이 정한 흠이 없는 1년생 짐승으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이 준비해서 오는 것이 힘들었고, 그들을 돕기 위해서 소와 양, 비둘기 파는 사람이 성전 뜰에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남자들은 1년에 한 번씩 성전에 올 때마다 성전세를 드려야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화폐에 사람 얼굴 등이 새겨진 것 또한 우상 숭배라고 생각하여 부정한 돈으로 여겨 성전세로 드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멀리서 다른 화폐를 사용했던 사람들도 거룩한 화폐로 돈을 바꾸어서 성전세를 바칠 수 있도록 배려하여 돈 바꾸는 사람이 필요하였습니다. 

성도들의 편의와 필요를 채우려고 하는 목적으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를 돕기 위해서 생겨졌던 것이 이윤 추구의 도구가 되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유대 사회의 가장 부자들이 제사장과 대제사장, 그리고 그들과 연합되어진 성전 기득권 세력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성도들을 섬기고자 시작했던 것들이 필요가 본질을 삼켜버려,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예배와 삶이 아니라 경제적 이윤 추구가 주된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장사하는 집’이 되어버렸고,(16절) ‘강도의 굴혈’이 되어 버렸습니다.(마 21:13, 막11:17, 눅 19:46)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자들이 탐심에 굴복하게 되고 탐심에 굴복하는 모습은 유대교에 속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인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고 더 이상 하나님에게도,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Ⅱ.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 (15-17절) 

이런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다 가져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16절) 

이 말씀을 볼 때, 남자분들은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는 청년 시절에 이 말씀을 보면서 ‘성경에 이런 말씀도 있구나.’ 생각하며 속이 시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행동을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보고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시 69:9) 한 것을 기억하였습니다.(17절)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하신 것은 성전이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곳으로 회복되기를 원하는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성전에서 거룩한 예배가 드려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고 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의 삶이 새로워져 세상으로 흩어져서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그런 거룩한 꿈들을 성전을 통해 가지고 계셨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꿈에는 관심이 없고 성전을 돈벌이와 자기 명예와 권력, 이익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을 때 분노가 이런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Ⅲ. 성전과 하나님 백성을 새롭게 하는 근본적인 방법 (18-22절) 

그 다음 말씀을 보시면 이에 유대인들이 충격을 받아 예수님께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라며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였습니다.(18절)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와 대제사장에게 고소당할 때의 명목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성전을 허물고 삼일 만에 세운다고 말하였던 자’라고 조롱하며 정죄하고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라며 믿지 않았습니다. 당시 성전은 18,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동원되어서 46년 동안 지어졌습니다. 허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삼일 만에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요한은 친절하게도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절)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가시적인 성전을 통해서 만나는 시대는 끝이 나고 하나님이 보내신 성전의 원형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후에 이 말씀을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22절) 

18-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성전을 엎어버리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질문을 했고 예수님께서는 답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친절한 해석을 통해서 볼 때, ‘이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다른 말로 하면 ‘나를 죽이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삼일 만에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엎어버리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이 모순된, 문제로 가득찬 교회와 세상을 뒤집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온유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예수님께서도 채찍을 만드셔서 때리시고 엎으시고 쏟으시고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들은 죄를 범했으며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엎어버리셨을 뿐 아니라 그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자기 자신이 죽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성도님들 저희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죽이셨기 때문에 바로 그 공로를 의지하여 죄인이었던 우리들이 살아나게 되고, 절망적이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성도님들, 교회와 공동체는 언제나 문제와 한계와 연약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어떻게 연약하고 죄에 빠져있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이 세상을 섬길 수 있는 빛과 소금으로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엎어버리는 것을 통해서, 비판과 정죄를 통해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부족함과 연약함을 가슴에 품고 예수님처럼 자신 희생적인 삶을 살기로 결심하게 될 때,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이 죽기로 결심하게 될 때 그들에 의해서 교회는 살아나고 회복되어지고 영광스러워지게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깨닫은 후에 제 삶이 달라졌습니다. 교회를 엎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연약하고 한계가 있는 교회를 위해서 생명을 드리고 헌신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국 교회가 소망이 있고 한국 땅에 소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젊은 날 저에게 주셨던 가장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결론 : 어떻게 죄와 연약함에 빠진 교회를 거룩하며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워갈 것인가? 

제가 오늘 이 말씀을 몇 가지 적용을 마치려고 하는데, 먼저 제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신약시대 성전은 바로 우리 개인들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만약에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께서 찾아와 우리 마음의 깊은 곳을 다 보신다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저의 마음도 목사지만 예수님께서 뒤집어버리실 것 같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영혼이 기도하는 집이 되고 싶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싶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어느새 마음속에 양의 소리가 들리고 비둘기, 염소의 소리가 들리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집중을 하려고 해도 교회 속에 있음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도님의 마음에는 어떤 소리가 드리십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드리십니까? 아니면 양의 소리, 염소의 소리, 돈 바꾸는 사람의 소리가 드리십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청년들이 가장 많이 보는 책 중의 하나인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의 구주로 모실 때 예수님께서 서재에 들어오시고, 오락실에도 들어오시고, 일터에 들어오시는 등 제 마음의 한 부분 한 부분 들어오시는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이 한 곳의 문을 열려고 하는데 주인공이 여기만은 안 된다고 하는데 그곳은 벽장이었습니다. 

바로 벽장, 거기에는 오래되고 추한 것, 정리하기 힘든 것을 다 넣어 두고 절대로 못 열도록 열쇠로 잠가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열쇠를 달라고 하실 때 주인공이 예수님께 벽장의 열쇠를 드리게 됩니다. 어느 누구에도 보이지 않았던 우리 영혼의 냄새가 나는 벽장의 어두운 곳을 예수님께서 청소해 주십니다. 

성도님들,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사함’입니다. 우리가 새롭게 되고 깨끗하게 되는 것,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통해서 우리의 냄새나는 벽장이 청소되어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놀라운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와 우리 성도님들 마음속에 예수님의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 제 영혼에 찾아오십시오. 제 마음에 찾아오셔서 제 영혼을 정결케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또 한 가지 공동체적으로는 지상의 교회는 어느 교회도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아무리 모범적으로 보이더라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부족하고 연약함이 많이 있습니다. 
성도님들, 어떻게 하면 부족하고 연약하고 때로는 허물과 죄에 빠져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세워갈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은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문제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문제 많고 그 잘못된 것의 주범인 사람을 색출해서 그들을 쫓아내고 죽인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함, 연약함을 짊어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때로는 기도하면서 자기 자신을 죽이고, 때로는 사랑과 섬김, 용서를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될 때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조금씩 거룩해지고 조금씩 연약함에서 벗어나게 되고, 조금씩 영광스럽게 바뀌어져 갑니다. 

우리 교회를 성도님이 섬기실 때, 우리 교회 또한 부족한 점이 많고 연약한 점이 많습니다. 불평하려고 하면 끝이 없지만 성도님께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것처럼 남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고 이 문제 많고 연약한 교회를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마음과 사랑을 가지고 섬기며 대접할 수 있는지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씨름하다가 주님 만나고 성령에 충만하여져서 그 가운데 본인도 새로워지고 교회도 새로워지는 역사들이 우리 교회 속에 끊임없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헐라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초로 해서 성령님의 찾아오심을 말미암아 이 어두운 역사 속에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워질 것을 암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 앞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다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직분을 통해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충성했던 과거의 훈장을 통해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 피 흘려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서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 한 분 한 분이 예배를 드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보혈을 힘입기를 원합니다. 그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우리 혈육의 생각으로, 인간적인 생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사로잡힌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가운데 주의 말씀을 받고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가정과 세상 속에 흩어져서 하나님을 막고 있는 태산과 같은 장애물을 평지로 바꾸어버리고 대구 땅에, 가정에, 우리 일터와 자녀 속에 주님께서 찾아오시게 하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예수님을 마음에 초청하셔서 오늘 우리 마음속의 벽장을 주님 앞에 열어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고, 
주님의 몸된 교회가 비록 부족하고 연약한 것이 많지만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함께 가고, 
우리 교회가 사람이 나타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주님의 십자가, 주님의 부활의 능력, 그리고 성령의 충만케 하심이 우리 성도님들과 공동체 가운데 역사되어져서 이 대구 땅과 민족을 다시 한번 살릴 수 있는 하나님 손에 쓰임 받는 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문제 제기


1. 2:1-11에서 요한은 첫 번째 표적이었던 가나의 혼인 잔치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개인과 공동체의
질 자체를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었다. 

2.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될 때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갖게 된다. 
변화를 요청받았던 당시 유대교의 실상은 어떠했는가? 그 원인은 무엇이었나? 
예수님은 이런 유대교와 유대인들을 향해 어떤 태도를 취하였는가? 

3. 이런 질문에 대해 요한은 2장 후반부에서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을 통해 명확하게 답변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유대교의 실상 (14절): 생명력을 상실했고 그 원인은 성전을 중심으로 전개된 영적 타락에 있었다. 
2)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 (15-17절) 
3) 타락한 성전과 하나님 백성을 새롭게 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18-22절) 
앞으로 펼쳐질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암시하고 있다. 

본문 해석

1. 장사하는 집, 성전 (14절): 필요가 본질을 삼켜버림 

유월절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성전 안에서 (이방인의 뜰까지 포함) 예수님은 보셨다.(He found -)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1) 먼 곳에서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것을 돕기 위해 이들은 필요했다.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 율법이 정한 흠이 없는 1년생 짐승들 판매
돈 바꾸는 사람: 당시 유대인 중 20세 이상 남자들은 성전에 반 세겔씩 성전 세를 드림.
여기에는 그들이 정한 거룩한 화폐만 사용되어질 수 있었다. 

2) 필요가 본질을 삼켜버렸다.

성전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을 돕기 위해 준비되었던 짐승을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거대한 경제적 이익 집단이 되어갔다. 
그리고 이들의 중심에 당시 영적 지도자들이었던 제사장들이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예배와 삶이 아니라 경제적 이윤 추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3) ‘만인의 기도하는 집’인 성전은 ‘강도의 굴혈’ ‘장사하는 집’(16절)으로 전락되었다.

(마21:13, 막11:17, 눅19:46) 

2.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 (15-17절) 

1) 예수님께서는 노끈으로 채찍 만들어 짐승들을 내쫓으시고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한다. (말3:1-4, 벧전4:17) 

2) 예수님 행동의 동기 (17):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성전과 예배를 회복

예수님의 행동을 지켜보았던 제자들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시69:9)을
기억하였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것은 성전이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곳으로 
회복되기를 원하는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여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곳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려야 하며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3. 성전과 하나님 백성을 새롭게 하는 근본적인 방법 (19-22절)

예수님의 행동에 당황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하였다. 
이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주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19절)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하였다. (당시 성전은 46년 동안 18000명이 동원된 전국가적 사업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다. (21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야 이 말씀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22절)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어떻게 타락한 유대교와 하나님 백성을 구원하실 지를 제시하셨다. 

1) 예수님은 타락한 백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이실 것이다. (요12:24) 

2) 이것이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A. 예수님은 성전이었던 자신의 죽음을 통해 부활에 이를 것이다. 
B.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초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 거룩한 교회가 세워질 것이다. 

적용: 어떻게 죄와 연약함에 빠진 교회를 거룩하며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워갈 것인가? 

0. 우리들 자신과 우리 교회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들은 여러 가지 필요한 행동과 관심에 지배되어 본질을 잃어가고 있지 않는가?
성전을 찾아온 우리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예배와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과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집중되어져 있는가?
필요가 본질을 삼켜버리는 일들이 우리와 교회 가운데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1. 성전인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도록 예수님을 초대해야 한다.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 
2. 교회의 부족함을 볼 때 비판 대신 예수님처럼 자기희생적인 삶을 선택한다. 
3. 예수님의 보혈과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거룩한 예배, 거룩한 삶을 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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