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을 아는 지식 (벧후 3:17-18)

  • 잡초 잡초
  • 670
  • 0

첨부 1


예수님을 아는 지식 (벧후 3:17-18) 


'모르는 게 약'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면서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알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안후에 오히려 안보고, 안들은 것만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슬픈 일, 어려운 일, 괴로운 일은 차라리 모르고 지나가면 더 나은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도 있습니다.  근대 영국의 철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이 남긴 말입니다.  그는 무지에서 비롯된 타락과 편견을 지적하면서 과학적 탐구를 통한 인간 삶의 풍요를 강조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아는 것을 힘이라고 말하지만, 믿음의 세계에서는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믿음생활을 시작합니다.  지난주에 호세아서를 통해 본 것처럼, 하나님을 알고 모르는 것에 따라 망하고 흥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아는 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출발에 불과합니다.  마치 갓난아이로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아이가 예쁘고 귀여워도 자라지 않으면 부모의 걱정입니다.  아이는 반드시 자라야 합니다.  건강하게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구원의 은혜가 놀라워도 신앙은 구원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자라기에, 영적생명도 성장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랄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알면서 자라갑니다.  오늘 본문도 그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권면합니다.  신앙의 성장은 예수를 아는 것에서 이루어집니다.  물론 여기서의 안다는 말도 체험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내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경험적으로 알아 가느냐가 신앙성숙의 잣대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으로도 충만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예수님을 알아야 할까요?  오늘 그것을 본문을 통해 생각하게 원합니다.  특히 본문에 소개된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 깨닫기 원합니다.

첫째는 구원자입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후서를 함께 읽었습니다.  베드로서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여러 곳에 흩어져 사는 성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특히 극심한 박해 속에서 투쟁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굳게 믿고, 그의 성품을 닮아가며 용기를 잃지 말고 소망으로 견디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연단의 과정으로 알아 하나님이 허락하신 신앙훈련을 통한 정금 같은 사람이 될 것을 강조합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베드로전서는 외부로부터의 시련을 다루고, 베드로후서는 내부로부터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위험한 교리를 퍼뜨리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들의 올바르지 못한 삶과 인격, 잘못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고 주님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7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그러면서 18절의 결론에서 이렇게 말씀을 맺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내부와 외부의 시련 속에서도 견디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굳게 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이런 귀한 말씀을 전하면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그의 구별된 이름을 통해 알려줍니다.  먼저 주목할 이름은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Jesus)는 고대 그리스어 '이에수스'의 라틴어식 표기입니다.  이에수스는 히브리어 '여호수아'를 옮긴 말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가나안땅에 정착한 민족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예수라는 이름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에서 '여'는 '하나님'을 말하고, '호수아'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여기 '호수아'는 선지자 '호세아'의 다른 표기입니다.  호세아의 뜻은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라는 뜻이고, 바로 여기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구원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가 요셉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1:20-21)  예수님은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자요,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구주, 구세주, Savior입니다.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실 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인간역사가 시작된 이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가려고 노력했지만 누구도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멀어진 간격을 메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인간을 사랑하시어 다시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막힌 담을 헐고, 벌어진 사이의 다리가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주님을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다가,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축복과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자 예수를 통해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분은 오직 나를 살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자가 예수 말고 또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로 믿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4:12)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은 세상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는 나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살렸고,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고, 늘 감격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동반자입니다.  

계속 되는 말씀에 보면, 예수님을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강조합니다.  예수와 함께 또 소중한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의 '크리스토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크리스토스'는 히브리어의 '메시야'라는 말을 그리스어로 옮긴 것에 비롯되었습니다.  메시야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구약시대 특별한 경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특히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어 구별된 사람으로 특별한 사역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라는 말이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다윗왕 이후 그들을 통치하고, 다스릴 메시야로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그 메시아로 오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 믿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이신 메시아는 그들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자, 그들 가운데 오시는 자, 그들과 함께 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그들과 함께하여 그들의 눈물과 고통을 돌아보고, 잃어버린 다윗왕국을 회복할 자입니다.  바로 그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메시야로 오셨고,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  메시야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임마누엘로, 인간과 함께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세상에서 33년이란 짧은 생애를 사시며 사람들과 함께 하셨지만, 다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20)  우리는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것도 영원히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내가 믿는 그분은 내 인생과 신앙의 동반자이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그분은 내 안에 오십니다.  그리고 영원히 나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십니다.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그분은 나를 위로하고, 힘주고, 격려하고, 바른 길로 이끄십니다.  

우리가 많이 알고 접해 본 '모래위의 두 발자국'이란 시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밤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는 꿈이었습니다/ 하늘 저편에 내 인생의 장면들이 번쩍이며 비쳤습니다/ 한 장면씩 지나갈 때마다 나는 모래 위에 난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나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비쳤을 때/ 나는 모래 위의 발자국을 돌아보았습니다/ 나는 내가 걸어온 길에 발자국이 한 쌍밖에 없는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때가 바로 나의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슬픈 시기들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몹시 마음에 걸려 그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나면 항상 저와 함께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제 삶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는 한 쌍의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시기에 주님께서 왜 저를 버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소중하고 소중한 사람아, 나는 너를 사랑하기에 너를 버리지 않는다. 한 순간도 너를 떠난 적이 없다.  네 시련과 고난의 시절에 한 쌍의 발자국만 보이는 것은 그때 내가 너를 업고 갔노라."

여러분, 내가 주님을 영접하고 믿음의 길을 걷는 순간부터 주님은 언제나 내 곁에 계십니다.  한순간도 나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시선을 떼지 않고 주목하십니다.  내 인생에 기쁘고 즐거울 때만이 아니라, 슬프고 힘들 때에도 함께 하십니다.  때론 나를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끌어주십니다.  때론 나를 안고 나를 업고 가십니다.  그렇게 영원한 천국까지 함께 가십니다.  지금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큰 힘과 격려를 받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주인님이십니다.  

여기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예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 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주'는 곧 '주인(Lord)'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나의 주인이십니다.  이것을 바꾸어서 말하면 나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종이요, 예수님은 주인이십니다.

예수를 믿고 그분께 모든 삶을 드렸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자신을 종이라고 말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베드로는 1장 1절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라고 말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종'이라는 말을 가장 즐겨 사용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는 모든 편지의 서두에서 자신을 종으로 묘사합니다.  그의 주옥같은 교리와 진리는 종과 주인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합니다.  이들은 종이란 말을 언어적이나 교리적 설명으로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종으로 살았습니다.  오직 한분 주인이신 주님을 위해 충성하며 살았습니다.

주님이 주인이시라면, 나는 종입니다.  확실히 종입니다.  오늘날은 종에 대한 개념이 그리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대시대부터 예수님시대까지, 성경을 기록한 당시에는 종이란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다 이해되었습니다.  종은 소유가 없습니다.  종은 주인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했고, 머리를 조아리며 경청해야만 했습니다.  종은 주인 앞에 어떤 토를 달거나 말을 하면 안되었습니다.  종은 오직 순종, 예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종은 주인이 팔거나 심지어 죽여도 아무 대항을 하지 못했습니다.  종은 사람이지만 사실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하라면 하고, 그것이 종이었습니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그 시대에 종은 가장 비참하고 처절한 인생을 살았지만, 주인에 따라 달랐습니다.  어떤 주인은 종을 아들처럼 대하기도 했고, 종을 자유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종을 보통 사람과 똑같이 대우했고, 아니 친구처럼 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종이 모두가 비참하거나 억울한 인생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종의 삶은 달랐습니다.  바울은 당시 이런 종과 주인의 관계를 신앙생활의 중요한 원리를 심어주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서 있어서는 가장 확실한 것이 주인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위해 충성하고,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하고, 그분을 위해 심지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전적으로 종을 책임지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 회복할 신앙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부르고, 그분은 진정 내 인생의 주인으로 믿는다면 나는 종이어야 합니다.  철저히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종이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종이 무슨 권세가 있고, 무슨 소유가 있습니까?  진정 주님을 주인으로 안다면 나는 종이어야 합니다.  실제로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젠 내려놓고, 더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내 인생에 주인 삼았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여기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최근 기독교서점가에서는 이용규 선교사가 쓴 '내려놓음'이란 책이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  그는 내려놓음을 쓴 뒤에 2편으로 '더 내려놓음'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가 2번째 책을 쓰게 된 이유는 사람들이 내려놓음에 대한 오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명문 하버드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몽골선교사로 헌신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내려놓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내려놓기 위해 먼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일 수는 없다고 강조합니다.  단지 내려놓기만 한다면 그것은 포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포기는 또 다른 교만이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내려놓는 것이라면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헌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려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내 삶의 주인자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주님을 진정 주인으로 안다면 이제 내 삶의 주인 노릇했던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떤 외적인 경력이나 조건이 아니라 바로 내적자아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기의(自己義)'와 '자기애(自己愛)'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아 중심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자기의(自己義) 즉, 내가 주인삼은 것이고, 자기애(自己愛) 즉 내가 사랑했던 것을 말합니다.

복음성가가운데 이것을 잘 표현한 노래가 있습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사랑, 내영혼의 반석, 그 사랑위에 서리" 

성도여러분, 내가 주인삼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사랑했던 무엇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예수님을 내 인생과 신앙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자들의 가는 길입니다.  이것을 내려놓고, 더 내려놓고, 많이 내려놓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주님을 신실히 믿는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길은 날마다 내려놓는 길입니다.  내가 주인 삼은 것을 내려놓고, 내가 사랑했던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믿고, 나는 예수를 알고, 예수를 주인으로 고백하면서 얼마나 내려놓았습니까?  이 노래가 우리의 삶의 고백이고, 헌신의 다짐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내려놓고, 더 내려놓으며,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과 함께, 구원의 길, 신앙인으로서 더욱 성숙한 길을 향해 힘 있게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