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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신비로운 경륜 (롬 11: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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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신비로운 경륜 (롬 11:25-36)

올 한해 우리 교회 목표 중, 하나는 큐티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교회 전체가 큐티 책을 구입하자고 했고요, 주일 설교도 여러분의 큐티를 도우려고 대체로 큐티 본문과 같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반복될 때,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고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고, 또 더 깊은 맛을 알게 됩니다.  교회학교와 소그룹,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말씀의 깊고 넓은 은혜가 체험하기를 축복합니다.  그 말씀으로 날마다 하늘의 생수로 시원하기를 축복합니다. 

이해 못할 일들
때로는 하나님과 그 분의 하시는 일이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아벨의 예배를 잘 드려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는, 그렇게 기쁨을 준 아벨은 왜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까?  초대교회 집사를 뽑을 때 성령으로 충만하고 착하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사람 일곱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스데반은 왜 집사가 되자마자, 성경으로는 한 페이지 넘기기도 전에 순교했습니까? 죽게 하려고  스데반을 집사로 임명했습니까? 
성경 사건만이 아니라, 우리 생각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지금도 우리에게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때로는 낙심하고 투정합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자신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하기에 나만 해결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 특히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래서 믿지 않는다’고 소리 할 때부터는 자신이 없어지고,  저들에게 탁히 할 말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바울에게도 이와 같은 심각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택하셨다고 하는 동족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께 버림받은 민족이 되었는가?  바울은 9장 1-2절에서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고민 속에서 9장은 시작합니다.  그리고 11장까지  이해하지 못할 일들을 하나님의 신비로운 경륜을 봄으로써 바울은 모든 것이 다 이해되진 않아도 겸손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풀리지 않는 고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의 눈으로 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풀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이 택하심을 받고서도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까왔습니다.  전에 자신도 예수님도 거부하고 믿는 이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지만, 예수님을 만나 알고 보니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죽고 사는 것을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자기 힘 가지고 선을 행함으로 살겠다고 발버둥쳤지만, 모두 죽어갑니다.  그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참 생명을 얻고 보니 죽어가는 형제들이 보였습니다. 이들을 너무도 사랑한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9장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은 자신과 맞바꾸어도 좋으니, 동포 헝제와 친척이 구원을 받도록 이들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십자가를 전하는 바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어느 새 똑같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으로 풀려지지 않고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풀려집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을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 주셨습니다.  아들과 우리들을 맞바꾸신 것입니다.  맞바꾸는 사랑을 어느 새 실천하고 있는 바울은 하나님 구원의 경륜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다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 깨달은 것입니다. 

11장 11절에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라고 했고 12절에는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맛있는 피자 한판을 들고 가다 돌에 걸려 넘어지면서 피자가 던져졌고 마침 옆에서 먹고 싶어 부러워하던 이의 손에 그대로 얹혀진 것과 같습니다.  
9장 32절에 ‘부딪칠 돌에 부딪쳤다’ 33절에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었다’고 한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받은 택함받은 이스라엘이 예수님 돌에 걸려서 넘어져 구원이 이방인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이로써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사랑, 간절한 원함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능력이라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기도원에서 기도했습니다.  능력을 달라고.  손 얹고 기도하면 병도 낫고,  문제도 다 풀려지고 능력의 손이 되게 해 달라고.  그런데 마지막 기도하는데 주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능력이다.  사랑이 넘치면 달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될 것이야.” 그러고 보니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죽기까지 사랑하셨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고치고 모든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수요일 점심을 먹으며 주신 말씀을 다시 생각하는데,  여태껏 부른 찬송 가사가 생각났습니다.  “사랑만이 사랑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희생만이 희생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그렇게 불러 놓고 이제야 깨달아 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방인에게 생명을 전하고자,  이스라엘을 넘어뜨리셨습니다.  우리들을 죄와 사망, 사단의 권세에서 건져 자유케 하시려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랑으로 내 대신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원의 경륜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9-11장의 결론부분입니다.  본문 25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기도원에서 돌아와, 중고등부 수련회가 힘들게 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유기원 집사님이 수련회에 못 올 것 같다는 것입니다.  순간 화가 났습니다.  전도사님하고 계속 일정을 조정하면서  날짜도 확정하지 못하고 주보에 알리지도 못하다가 겨우 8월말에 한다고 알린 바로 그 주에 갑자기 23-24일로 결정 되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경정한 것이 또 다시 진행하기조차 어렵게 됐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게 뭔가, 라는 생각도 들고.... 이렇게 될 바에야 처음부터 다르게 밀어 붙일 것을,  참 일하기 힘들구나!”
그런데 다음 순간,  주님은 유집사님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까, 하는 생각을 주셨습니다.  “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학생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괴로웠겠구나.  새롭게 들어간 직장에서 자리 잡느라고, 이 눈치 저 눈치를 보아야 할 형편이었을 텐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미안한 마음도 들고, 직분 감당 못하는 무력감도 들겠구나.”  
그래서  “힘드시죠! 걱정하지 마시고  일 잘 보세요. 그동안 수련회를 위해서 기도 많이 했는데, 하나님께서 무슨 대책을 주시겠죠.”라고 전화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전도사님에게 유집사님 전화가 온 것입니다.  지방인데, 지금 올라가는 중이랍니다. 원래 계획한 대로 저녁에 승합차를 가지고 뒤따라 가겠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헤아려 주는 마음이 드는 순간, 모든 문제가 다 풀려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있고, 사랑의 눈이 있으면  엉킨 것이 풀리고 이해되지 않는 것이 다 이해되어집니다. 
눅 23:34을 보면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어 가시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그 사랑으로 우리들에게 있는 사망 권세가 다 풀어졌던 것입니다.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경륜
이방인에게 생명의 빛을 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넘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완성은 아닙니다. 다른 이들을 얻기 위해서 사랑하는 이를 죽는 것으로 끝난다면 비극입니다. 비극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인간의 마음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악도 바꾸어 선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만큼 지혜가 있으신 분입니다. 
자기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니, 시기가 납니다.  다시 11장 11절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라”  14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맛있는 피자를 들고 가다 걸려 넘어졌는데, 손에 들고 있는 피자도 버릴 판이었는데, 옆에 먹고 싶어 부러워하던 이의 손에 안전하게 얹혀 졌습니다.  덕분에 버려질 뻔한 피자를 버리지 않게 되었으니, 도로 다 달래기도 뭐하고 그래서 같이 사이 좋게 나누어 먹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니님의 지혜요, 경륜입니다.  바울은 이를 깨닫고 본문 33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아들 성적표가 나왔습니다. 전과목이 다 ‘가’인데,  겨우 한 과목이 ‘양’입니다. 어의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할지 대책도 서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저도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포기하고 싶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아들을 넘어져 있는 아들을 일으켜 세울까 고민하던 아버지가 저녁에 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야, 한 과목만 너무 집중해서 공부하지 말거라!”  아들은 죽도록 맞고 혼 날줄 알았는데, 전혀 뜻밖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들은 용기를 내어 일어났습니다. 

사 55:8-9은 말씀합니다.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십자가는 당시에 최고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수 천 년이 지난 지금 십자가는 최고의 지혜가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멸시와 천대였습니다. 십자가는 실패요 저주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 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0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4-25절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두 집사부부의 엎드림
어는 교회에 두 집사 부부에게 큰 시련이 찾아 왔습니다.  부인 집사는 지금까지 병원에 가본일이 없을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감기에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리에 힘이 없어졌습니다. 동네 병원에 갔더니 고대병원으로 보내더랍니다. 정밀 검사를 하니 대장암 말기, 자궁암, 그리고 간암. 전이가 된 것입니다. 
남편 집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믿음이 없네요” 하며 울었습니다. “목사님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자신의 상태를 듣고 부인 집사는 놀랐습니다.  그러나 금새 부인 집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겸손히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예배 드리고 집에 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나는 하나님의 능력도 믿지만 하나님의 지혜도 믿습니다”. 하나님의 내리신 결정을 겸허이 수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왜 이렇게 해야 하셨는가를 모두 파악할 수 있다면  하나님만이 가진 신비감이 사라집니다. 만약 우리를 당황케 하는 일이 없다면 아마도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지혜와 이성으로 살면 되지, 더 이상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오늘,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하면서 찬양과 경배를 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염려했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과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채 근심과 염려에 매여 있던 어리석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4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고 찬양하면서 구원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 가실 하나님을 믿어 버린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이 17살에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납치된 것도 아닙니다. 형들한테 팔려 간 것입니다. 그 미움이 얼마나 컷겠습니까?  자그마치 10년을 종으로 살면서 이제 좀 살림 펼 것 같았으나,  또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모함 받아 감옥으로 잡혀 가 3년을 옥살이 합니다.  왜 그래야만 되었습니까? 
에굽은 30세에 관직에 나갈 수 있습니다. 정확히 13년 째 되는 때, 훈련 받아 에굽 총리로 발탁되었습니다.  요셉은 나중에 창세기 45장 5절과 50장 2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님들. 나를 팔았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마세요. 형님들이 나를 팔아 나는 팔려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서 왔습니다. sold가 아니고 sent입니다. 팔려온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가지고 보냄 받아서 왔습니다. 생명을 주시려고 미리 보내셨으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내가 형님들의 자녀들을 기르리이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경륜 속에서 오히려 주님 찬양하며 살기를 축복합니다.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룰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서연교회 이명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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