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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성숙 (빌 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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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성숙 (빌 4:11-13)


오늘의 주제는 성숙입니다. 제자의 삶에는 “성숙”이 필요합니다. 성숙은 참 좋은 단어입니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성숙해지는 것은 보기도 모양도 맛도 좋습니다. 과일들이 잘 익은 모습을 보면 보기만 해도 만족하고 모양도 좋습니다. 사람도 성숙한 모습을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이가 엊그제까지만 해도 기어 다니던 것이 커서 학교에 들어가고 또 자라서 결혼을 합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대견합니까. 성숙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성숙에도 적용됩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이 성숙한 신앙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를 영접하고 회심하여 사도가 되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가 미친 듯이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 고난도 배고픔도 헐벗음도 경험합니다. 그래도 그는 감사하며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전도자의 삶은 헐벗음과 배고픔과 고난이 뒤따릅니다. 이것이 전도자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이고 십자가이고 두려움입니다. 많은 전도자들이 그 지점에서 포기하고 낙담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때의 심경을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 말은 산전수전 다 겪어서 이제는 살아가는데 도통했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보다 더 깊은 고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고백은 “나는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 때문이라면 비천하거나 풍부하거나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를 막론하고 그것들이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예수를 전하는데 어떤 조건이나 어떤 환경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사도바울이 가는 길에 장애물들이 참 많았을 것입니다. 반대도 방해도 위험도 죽음의 위협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사도바울에게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사도로서 신앙과 사명감이 성숙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숙함은 이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 된 모습입니다. 이 제자 됨은 어느 날 저절로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 급성장 유혹시대 

오늘은 무엇이든지 갑자기 급성장 되는 것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오늘은 사업도 급성장하기를 추구합니다. 교회도 급성장 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급성장은 아주 좋지 않은 것입니다. 급성장한 곳을 들여다보면 모두 그 내용이 부실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다닐 때 키가 일 년에 12센티미터씩 컸습니다. 그것도 말하자면 급성장입니다. 그러니 몸이 얼마나 부실하겠습니까. 나무가 한해 12센티미터씩 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나무를 어디다 사용하겠습니까. 

재목으로 기둥으로 대들보로 사용할 수 없고 땔감으로도 화력이 보잘 것 없을 것입니다. 오늘 최대의 유혹이 이 급성장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최대의 함정입니다. 키도 갑자기 크게 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건축도 어느 날 갑자기 세우려고 애를 씁니다. 매사에는 과정과 절차가 있는데 이를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와우아파트 사건이 발생하고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오늘은 신앙도 급성장하는 시대입니다. 어느 날 회심하고 은혜 받으면 그때부터 착실하게 성장하고 자라야 합니다. 사도바울도 다메섹에서 환상 속에서 예수를 만나고 영적 체험을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전도자가 된 것이 아니고 3년 동안 아라비아 사막에 들어가 기도하며 자신을 익혔습니다. 그리고 나와서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느 날 은혜받자 마자 난리를 떨기시작 합니다. 간증한다, 기도해 준다고 안수하고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어느 날 신학교 가겠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실한 신앙이 나오고 부실한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함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숙함은 여무는 모습을 말합니다. 열매는 어느 날 갑자기 맺자마자 푹 익는 것이 아닙니다. 햇빛과 바람과 비를 맞는 동안 열매가 여물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신앙도 균형 있게 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편만 자라면 불균형이 나타나게 됩니다. 

불균형 신앙 

1) 윤리적인 신앙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지극히 윤리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신앙모습은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너무나 잘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철두철미하게 지켰고 정확하게 11조를 드렸고 철저하게 금식했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은 아주 잘 길들여진 습관신앙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신앙에 생명력이 없었고 영력이 없었습니다. 원래 윤리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은 형식이 앞서게 되고 그 신앙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 신앙은 주님이 주인이 아니고 내가 주인인 신앙입니다. 내가 만족하는 신앙입니다. 내 뜻이 우선이고 그래서 때로 내가 주장하고 남을 판단하고 결국 파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교단에는 파가 많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생명력은 없고 율법과 윤리만 있기 때문입니다. 

2) 신비주의 신앙 

윤리적인 신앙에서는 전통을 너무 강조하고 신비주의 신앙에서는 영을 너무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지극히 감정적인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감정도 중요하고 영성도 중요하지만 신앙이 너무 신비주의로 흐르면 분별력과 의지력이 약화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매사를 감정으로 판단하고 영으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꿈을 꾸고서도 모두 영적으로 해석하려 하고 언뜻 떠오른 생각도 계시라고 착각하기도 하고 그 생각을 예언으로 활용하기도 해서 결국 신비주의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각종 은사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에 많은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방언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예언의 은사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그 은사들을 감당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신비주의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방언파 예언파 신유파가 갈라져 서로 싸우고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은사를 활용할 능력이 미성숙했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하는 동안 제일 무서운 사람이 셋이 있다고들 말합니다. 하나는 신학교를 졸업한 장로입니다. 좀 안다고 사사건건 말이 많게 됩니다. 또 하나는 40일 금식한 신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신자는 40일씩 금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꼭 40일입니까. “나도 예수님처럼 40일 금식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매일 밤 철야기도 하는 신자입니다. 모두 비정상적인 행동이 나오기 쉬운 신앙인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때로 교회 풍토를 어지럽히기도 합니다. 자꾸 따로 모여 성경공부하고 은사집회를 하고 안찰한다고 물의를 일으키고 질서를 어지럽힙니다. 자기들도 그 방법이 옳지 않은 방법임을 잘 압니다. 그래서 숨어서 돌아다닙니다. 모두 불균형 신앙인들입니다. 그럼에도 왜 자꾸만 하려고 하는가 하면 영적 불균형이 자꾸만 자신을 목마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윤리적인 신앙이 극좌라면 신비주의는 극우적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두 불균형 신앙들입니다. 

3) 이론적 신앙 

이론적 신앙인들은 한결 같이 성경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조금 알고 있다는 것이 때로 문제가 됩니다. 조금 안다는 것 때문에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오래하여도 가슴이 냉랭합니다. 모태신앙인들과  오늘 대부분 현대의 신앙인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 신앙의 약점은 많이 알기는 하는데 실천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인들은 뒤에서 말을 만들고 불평을 합니다. 교회마다 불화의 요인들을 보면 다 이런 이론신앙인들이 일으킵니다. 일본인 작가 “하도리 아끼”라는 사람이 “행복의 문”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그 속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동네에 아래윗집이 살고 있습니다. 아랫집은 가난한데 늘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매일 웃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윗집은 잘 살고 부러울 것이 없는 집인데 매일같이 싸움소리가 그치질 않습니다. 어느 날 이 부잣집 사람이 가난한 집에 와서 물었습니다. “우리 집은 매일 싸움 소리만 나는데 당신 집은 어째서 가난한데도 매일 웃음소리가 끊어지질 않습니까?” 가난한 집 사람이 대답합니다. 

“우리 집은 모두 죄인이라 서요,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 내 잘못이라고, 내가 죄인이라고 해서요, 그러니까 문제가 커지지 않고 빨리 봉합됩니다.” 그 말을 듣고 이 부잣집 사람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은 모두 의인만 살고 있구나, 그래서 서로 자기 잘못이 아니고 네 잘못이라고 나무라니 그렇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교부였던 오리겐은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종합병원”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로 누구도 서로 비난하고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론신앙인들만 모인 교회는 매일 이렇게 따지고 계산만 하고 앉아있습니다. 신앙은 계산해서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1+5 = 6입니다. 계산하면 이런 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신앙은 1+5= 반드시 6이 아니고 때로 10도 될 수 있고 100도 될 수 있습니다. 소 한 마리가 끄는 짐은 4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2마리가 끌면 8톤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 둘이 끌면 12톤을 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론으로 풀리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그 점을 인정하고 때로는 무섭게 계획하고 계산하고 다짐도 해야 하지만 그러나 때로는 계산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때도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도 계산하느라 고집하면 공동체가 믿음의 길로 나아가기가 어려워집니다. 앞에는 홍해가 놓여 있습니다. 뒤에는 애급군대가 최신 무기로 무장을 하고 쫒아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갈 수도 뒤로 갈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계산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때는 계산만 하고 있으면 모두 망하게 됩니다. 

그때는 계산을 포기하고 강물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밟지도 않은 물을 갈라지게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강물을 밟을 때 비로소 갈라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 그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전해 주시는 이유는 “이것이 믿음의 세계다.” 라는 메시지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이야기를 보고 들을 때 내 안에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고  안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성숙은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 알게 되고 실패의 자리에 앉아 본 사람이 체험하게 되고 앞뒤가 콱 막힌 암담한 현실을 경험한 사람이 비로소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론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이치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매번 이론적으로 판단하고 계산하고 이론만 주장하니까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시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이 이론적인 신앙도 불균형의 신앙입니다. 

전인적인 신앙 

제일 바람직한 성숙한 신앙형태는 전인적 신앙형태입니다. 신앙이 영적으로 이론적으로 윤리적으로도 체계가 잡혀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전인적으로 성장하고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신앙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막연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 모두 마음은 원인데 능력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피땀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졸음이 쏟아져 잠을 자고 예수를 팔고 배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제자들이 참 제자가 된 것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여 신비적인 하나님의 질서를 체험하고 성령이 강림하면서 충만하게 됨으로 영적 조건이 충족될 때 제자들은 신앙이 비로소 완전한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제자들은 다시 시행착오 겪지 않았고 다시 밀리지도 않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순교하는 제자들이 된 것입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전인적인 신앙입니다. 그 고백 속에 의지적인 신앙이 나오고 헌신과 섬김과 오직 순종이 다 묻어나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 때문이라면 나는 궁핍도 풍부도 배고픔도 그 어떤 처지에도 나는 감내할 수 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나는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전인적인 성숙한 신앙입니다. 오늘은 불균형이 많습니다. 신앙도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지식으로 치우쳐 있든지 영적으로 치우쳐 있다든지 이론으로 치우쳐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삶에도 불균형이 많습니다. 밖의 모습은 화려한데 안으로는 병들어 있는 삶이 있습니다. 모두 불균형 신앙입니다. 그래서 삶에나 신앙에도 조화가 중요합니다.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오드리 헵번이라는 배우를 스타로 만들어 준 영화입니다. 그 영화를 계기로 그가 대 스타로 발돋움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배우로서는 성공을 했는데 여자로서는 불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첫 번째 결혼해서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두 번째 결혼했는데 이혼해서 또 버림받고 상실의 아픔을 겪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여인이라고 자책하며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아주 삐뚤어진 자화상을 가지고 아이도 남편도 가정도 없이 혼자 노년을 살았습니다. 말년에는 우울증과 외로움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누가 그녀가 그렇게 살아가는 줄 알았습니까. 이 상태를 불균형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988년 3월 유니세프에 친선대사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에티오피아, 수단, 방글라데시, 소말리아 등 내전을 겪는 지역을 돌아다니며 어린 생명들을 돌보는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설상가상으로 직장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이 시한부 인생임을 알게 되자 더 일에 집착하여 체중이 35kg이나 빠지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는 투병하면서도 소말리아 아이들을 걱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비로소 그때 예수 안에서 새로운 자화상을 발견하게 되고 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배우시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살았지만 마음은 깊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자선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자화상을 발견하고 삶을 바꾸고 마음이 건강해지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정말 아름다운 헵번을 만난 것은 로마의 휴일에서가 아니고 아프리카에서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는 누구입니까. 균형 있게 잘 자란 신앙인을 말합니다. 이 균형을 이룬 신앙인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 즉 예수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건강한 삶과 역할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번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주님의 진정한 제자인가.”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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