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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서로를 향한 기대 (엡 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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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서로를 향한 기대 (엡 1:15-23)


교육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말 중에 (Pygmalion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이름의 왕이 있었는데 그가 ‘여인 조각상’을 만들어 놓고 너무 너무 좋아하고 사랑한 나머지 이 조각상이 실제로 내 여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하고 기대했더니 ‘미의 신’ 아프로디테가 그 소원을 들어주어서 그 조각상을 실제로 아름다운 여인이 되게 했다는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가지는 강력한 소원이나 기대는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 스토리가 교육 학습의 마당에 적용되어 는 이론으로 사용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기대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 질수 있느냐로 출현한 또 하나의 교육이론이 있는데 (Expectancy-Value Theory)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일이 성공적으로 동기가 부여되고 성취되기 위해서는 , 다시 말하면 우리가 기대하고 추구하는 일이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가치’의 확신이 없이 시작하면 기대를 향한 노력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기도 하고, 기대가 이루어진대 해도 결국은 후회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의 허무감이나 배신감은 우리가 추구했던 많은 일들이 결국은 헛되고 헛된 일, 가치가 없는 일이었다는데서 발생합니다. 구약 전도서는 유명한 솔로몬 왕의 고백,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로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전도서의 기자는 전도서의 마지막 장에서 마지막으로 인생을 걸만한 그가 발견한 궁극적인 가치를 고백합니다. 

전도서의 결론을 기억하십니까? “일의 결국은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그가 사랑했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한 그의 기대를 고백합니다. 아니 그의 기대를 기도로 말합니다. 성도들의 기대의 표현은 언제나 기도입니다. 자식들을 향한 기대가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기도로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바울사도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한 기도의 본문에서 우리는 그의 기대를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 기대는 실로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우리 서로를 향하여 가져야 할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기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를 향하여 가져야 할 가치 있는 기대-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일입니다.

17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지금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진정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앎이란 피상적인 정보나 지식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희랍어에 란 단어에 란 접두어가 붙어서 하면 깊은 지식, 혹은 체험적 지식을 뜻하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사용된 히브리어로 표현하면 입니다. 예컨대 아담이 그 아내를 알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깊은 관계에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미국 대통령 오바마를 알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났고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그의 아내의 이름은 미셀이고그러나 그것으로 제가 정말 오바마를 알았다고 할수 있을까요? 저는 한번도 그를 만나본 적이 없고 대화를 한 적도 없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오바마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바마와 어떤 관계를 맺으려면 그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와의 개인적 만남과 지속적인 교제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하여 그를 알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영적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런 하나님을 알아가는 영적 성숙이 없이 삶의 진정한 만족도 충만도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를 이해하는 열쇠 단어가 둘이 있는데 입니다. 

여러분은 이 단어들을 에베소서 강해를 통해 계속해서 만날 것입니다. 무엇이 풍성하고 충만한 삶입니까? 한마디로 우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속에 그를 알아가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무엇으로 무한하시고 전능하시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깊이 알아갈 수 있습니까? 

17절을 다시 보면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했습니다. 성령은 지혜의 영이시고 계시의 영이십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 우리는 그를 알아갈 수 없습니다. 은 단순한 지적 작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전2:10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 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알기 위해서는 에베소서 5장에 가서 무엇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둘째,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아지는 일입니다.

우리 서로를 향하여 가져야 할 또 하나의 기대는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아지는 일입니다. 18절이 그렇게 시작되지 않습니까?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성도의 마음눈이 밝아지면 세 가지가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 세 가지가 보이면 우리의 인생은 어떤 상황, 어떤 환경 속에서도 당당해 질수가 있고,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무엇일까요? “소망과 풍성과 능력”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우리 성도들을 위해 예비 된 것을 볼 수 만 있다면 우리는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하고 낙담하는 것입니다. 18-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절망의 반대가 무엇일까요? 소망입니다.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은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살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소망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 소망이 우리 안에서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것을 ‘산 소망’(Living Hope)이라고 말합니다. 죽을 수 없는 소망, 없어지지 않는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천국의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천국의 소망은 막연하게 우리가 죽으면 천국 간다는 식의 소망만이 아니라, 우리가 목말라하며 추구하던 모든 가치들이 완벽하게 실현되는 영적 풍성을 경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이런 ‘기업의 영광의 풍성’, 우리에게 상속주시고자 예비하신 부요함을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누리고 살 수 있도록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던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의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 이런 영적 풍성함, 이런 능력이 함께 한다는 것을 우리의 눈이 열려 볼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을 사는 자세는 얼마나 당당하겠습니까?

셋째, 교회 사역의 영광을 깨닫는 일입니다

본문의 22-23절은 그 이해가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 에베소 성도들을 향한 기대를 모아 그들을 위해 기도하던 바울 사도가 여기서 갑자기 마지막 대목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말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 부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유진 피터슨의 번역 에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교회는 세상의 변두리가 아니라, 세상의 중심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분은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며 교회를 통해 만물을 자신의 임재로 가득히 채우십니다.”(유진 피터슨, 메시지)

초대교회는 지금의 교회와 비교한다면 정말 한줌의 세력도 안되는 미미한 공동체였습니다. 특별히 당대의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의 권력과 비교하면 정말이지 교회는 초라한 핍박받는 공동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교회가 세상의 변두리가 아닌 세상의 중심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예수께서 사용하시는 공동체의 한 지체로서 살아감이 얼마나 놀라운 영광스러운 특권인가를 일깨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3장에서는 이 교회를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5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선포합니다. 물론 지상의 교회는 끊임없이 그 연약함과 부족함을 노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엡5:26-27을 보겠습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함이라”

교회가 주님의 기대에 영 미치지 않으실 때 교회의 머리요 주인 되신 주님은 교회를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개혁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교회는 유일한 세상의 소망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아니면 어디서 사람들이 구원의 복음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아니면 어디서 사람들이 영적 성숙을 경험하겠습니까? 

그래서 에베소서의 쌍둥이 서신으로 일컬어지는 골1:24-25에서 그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어떤 고난도 기꺼이 감수하고 교회를 기쁜 마음으로 섬기겠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내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영광스런 교회 사역을 위해 어떤 고난도 감수하고 기쁘게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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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구촌 교회에서는 작년 태백 프로젝트에 이어서 금년에는 교우 1,400여 교우들이 내일부터 진도 복음화 프로젝트를 위해 헌신하게 될 것입니다. 진도 섬 40여 교회로 흩어져 여러 가지로 열악한 상황속에 있는 주님의 몸인 교회들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진도 가까운 곳에 증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문준경 전도사라는 한 여인을 통해 섬의 90이상이 복음화되고 천국의 섬으로 불리우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이번에 진도에도 동일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증도와 함께 이번에는 진도(진도개로 유명한 진도가 이제 진리의 섬, 眞島로 변화될 것)가 또한 천국의 섬이 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기적에는 언제나 희생의 값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12:24)고 가르치신 분이십니다. 증도의 기적에는 섬 마을의 어머니 우리 주님의 신실한 제자였던 문준경 전도사의 말할 수 없는 희생의 사랑, 희생의 눈물, 희생의 기도, 희생의 전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그녀가 순교하기 직전 공산당이 그녀에게 내린 죄목은 “새끼를 많이 깐 씨 암탉”이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문자 그대로 생명을 낳는 씨 암탉이었습니다. 그녀의 희생으로 마침내 증도에 천국의 새벽이 밝아온 것입니다. 

그녀의 도움과 영향으로 신학교에 간 고 CCC김준곤 목사님은 그녀에 대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그녀의 집은 목민센터였다. 무엇이나 의논하고 무엇이나 돌봐주는 곳이었다. 그 집에는 항상 네 댓명씩 귀신들린 여인, 반수불수되어 쫓겨나 오갈데 없이 버려진 여인들의 숙소였다. 대소변 받아내라 방에서는 악취가 났다. 문전도사는 밤낮을 교회에서 살면서 새벽같이 큰 바랑을 메고 잔치집 제삿집 음식을 걷어 가난한 집에 나눠주는 대신 거지였다. 바랑속에는 온갖 감기약, 연고, 민간 비방약이 있어 병자들을 심방하여 약을 먹이고 발라주고 기도를 하였다. 병은 소문나게 잘 나았다. 그는 산파는 아니었으나 아이를 받는데는 누구보다 명수였다. 

섬은 미신이 많은 곳인데 동리에 재앙을 만나면 문 전도사에 기도를 청하였다. 그녀는 이 마을의 사제였고 간호사, 산파, 목자, 만인의 어머니였다." 비록 한 주간의 사역이지만 이 사역을 통해 우리 모두도 문 전도사님 처럼 진도 섬에 천국의 새끼들을 무수하게 낳는 씨 암탉으로 쓰임받기를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우리들을 통해 복음을 받아드린 수많은 새 생명의 병아리들이 힘차게 새벽울음을 우는 날, 진도에도 천국의 새벽이 밝아 올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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