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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선을 다해도 은혜 받아야 합니다. (히 4: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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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해도 은혜 받아야 합니다. (히 4:14-16)


수년전 우리 교회 남전도회에서 진안에 있는 반월 저수지로 밤 낚시를 간다기에 함께 따라간 적이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기다란 대나무 장대에 낚시 바늘을 묶어 동네 방죽에서 붕어 잡던 기억 외에는 낚시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는 나는 적어도 내가 볼 때 낚시의 도사(?)로 여겨지는 집사님들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잔뜩 기대를 걸었습니다. 
오늘 밤에 손바닥 만한 붕어를 낚아내는 재미를 볼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집사님들이 능숙한 솜씨로 낚시 도구들을 챙겨서 물에 던진지 1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록 작은 송사리 두 마리 잡힌 것 외에 큰 붕어들은 모두 잠들었는지... 야광으로 빛나는 낙시 추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제까지 만도 남장로님 아니 그때는 남집사님이 와서 신나게 낚아 올렸다던 그 붕어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한 마리도 없는 거야!...”
12시가 넘도록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남아있는 분들에게 월척 낚아 오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먼저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면서 깨달은 것이 낚시조차도 내 맘대로 원하는 대로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살이가 낚시질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치밀한 계획과 훌륭한 장비를 갖추고 고도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고기가 있을 법한 장소를 물색하여 낚시 대를 드리워도 고기들이 물지 않으면 강태공의 수고는 헛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인생길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저마다 인생의 바다에 낚시줄을 던지고 원하는 것을 건지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애쓰고 있지만 우리가 애쓴다고 해서 모두가 월척을 낚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최선을 다해도 은혜 받아야 합니다” 고 정했습니다. 
최선이란 말은 사전에서 찾아보면 “가장 좋고 훌륭한 일 또는 방법” 또는 “온 정성과 힘”이라고 설명 되어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슨 일에든지 온 정성과 힘을 다해서 부지런하게 노력하는 것은 참 아름답습니다. 

자신에게도 좋을 뿐 아니라 남이 볼 때에도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언제나 성공하고 승리하게 되어 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 힘써도 안 되는 일들이 있기에 문제입니다. 저 마다 인생의 바다에 낚시 줄을 던지고 원하는 것을 건지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애쓰고 있지만 우리가 애쓴다고 해서 모두가 월척을 낚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최선을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일이 있을까요?

1. 우리의 무지 때문입니다.

5분 후에 일어날 일을 모릅니다. 미래의 일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쉽게 생각되는 나에 대하여 내가 잘 모릅니다. 내 마음 나도 모릅니다. 남도 전혀 모릅니다. 어떤 의도로 내게 접근하는지 몰라서 경계할 때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생의 깊은 의미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사는지를 확실하게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안다고 하지만 조금 알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모를 뿐 아니라 모르는 것에 대하여 질문조차 않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사람들은 예수를 욕하고 저주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못 박라고 소리치면서 “그 피 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려달라” 외쳤습니다. 그 의미가 얼마나 무서운 줄을 알았다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정말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범죄하고, 몰라서 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르고 최선을 다한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무지한 인생이기 때문에 무조건 최선을 다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여야 합니다. 

2. 인간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왜 최선을 다해도 안 됩니까? 인간이 가진 무능력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 같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런데 사실 가장 연약한 존재도 바로 인간입니다. 
맨손 맨발 맨몸으로 생각해보면 사람보다 약한 존재가 없습니다. 약한 존재기 때문에 아무리 몸부림 쳐도 소용없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약합니다.
정신적으로도 약합니다.
영적으로도 합니다.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이 있다 하여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은 상상의 동물입니다. 날고 싶은 생각은 하지만 날지 못합니다. 공부를 잘하고 싶지만 잘할 수가 없으니 문제입니다. 우리의 어려운 상황을 벗어 던지고 싶지만 그렇게 못하니 무능한 것입니다.
차라리 상상이나 못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원리는 알고 소망은 큽니다. 그러나 환경이 어렵습니다. 이 환경을 뚫고 나갈만한 능력이 없어서 우리는 한탄합니다.

사랑해야 되는 줄 알면서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크게 봉사하고 싶은데도 힘이 없습니다. 건강도 많고, 시간도 더욱 많고 게다가 물질이 쌓아놓을 곳이 없을 정도로 많다면 얼마든지 하나님 나라 위해서 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능하니 안타까운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무능한 존재가 노력하면 얼마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3. 은혜가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는 말이 나옵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공급되는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위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노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임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내 앎의 영역 밖에서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능력 밖에서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나타난 일은 우리에게 속하였지만 감추어진 일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라고 했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 (신 29:29) 
그 오묘한 세계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오묘한 세계 거기는 하나님께 속한 세계입니다. 
우리의 도움이 그 세계로부터 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인 히4:16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최선을 다한 노력에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심을 의미합니다. 나의 노력을 하나님께서 가상히 불쌍히 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긍휼을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라고 했습니다. 

은혜의 보좌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본문 15절에 소개된 은혜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분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대 제사장이시면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는 분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무지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아신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돕는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돕는 은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은혜의 보좌로 나가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여야 합니다.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의미합니다.
구약적 개념으로는 성막과 성전의 지성소를 말하지만 신약적 개념으로는 어디나 은혜의 보좌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로 보혜사를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모든 믿는 자의 심령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와 세상 끝날 까지 동행하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담대하십시오.
은혜의 보좌는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마음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주 만 바라보는 사람에게 은혜의 보좌는 열립니다. 

긍휼은 구하는 사람은 자신을 믿거나 사람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에 교만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렵고 힘든 일 앞에 과도히 낙담하여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도우심을 잠잠히 기다립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환경을 사랑하며 적극적으로 환경을 변화시키려고 애쓰고 노력합니다. 은혜의 보좌는 그런 사람들에게 열립니다. 

4. 최선과 은혜와의 관계

사람이 아무리 온 정성을 다하고 노력을 다한다 해도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 없이는 소용이 없습니다. 

한 스승이 제자들에게 밤 새워 기도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하나님께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스승은 대답 대신 "태양을 떠오르게 하기 위해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반문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제자는 불만 섞인 목소리로 "그러면 오늘밤 밤새워 기도해도 소용이 없겠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태양이 떠오를 때 자네로 하여금 깨어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네"

그렇습니다. 
최선과 은혜의 관계는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우리 옛말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설명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얻을 것이며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내가 해야할 부분입니다. 인간의 노력부분입니다. 그러나 구한다고 다 받는 것이 아닙니다. 찾는 다고 다 찾아지는 것 아닙니다. 두드린다고 다 열리는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받고 찾고 얻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은혜가 임해야 비로소 나의 최선을 더 풍요로워집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고 있어도 태양은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그때까지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은혜의 가치를 압니다. 그래서 결코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노력이 전부가 아님을 너무나 잘 알기에 늘 겸손하고 영광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돌릴 줄 압니다. 그래서 은혜를 구하는 사람은 최선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은혜의 가치를 알기에 더욱 엎드려 은혜를 구합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최선을 다할수록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노력에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합시다. 불쌍히 여기심을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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