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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로운 제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말 3:3-5, 롬 3: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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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제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말 3:3-5, 롬 3:25-26)


오래 전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 어느 도시에서 마야문명의 고대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마을 한 가운데 제단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 하여 볼 게임 제단(Ball game)이라 했습니다. 두 팀이 볼 게임을 하는데 이긴 편 주장의 심장을 파서 제물로 드리는 제단입니다. 심장에서 나온 피가 동서로 흐르면서 힘을 펼쳐나간다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주장이라도 이기지 않으려고 애쓰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기면 죽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양 팀이 서로 이기려고 온갖 힘을 다하고 이기면 기뻐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야인들은 자신의 심장을 제물로 드려 다시 세상에 태어날 때는 반신반인으로 태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심장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기려고 안간 힘을 쓰고, 생명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제물이란 희생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흔히 ‘희생제물’이란 말을 합니다. 이 말은 희생이 없으면 제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민수기 28장에는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매일 드릴 제물인데 어린 숫양 두 마리입니다. 둘째는 안식일에 드릴 제물로 숫양 두 마리와 고운 가루 10분의 2에 기름 섞은 소제입니다. 셋째는 매달 초하루에 드릴 제물로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입니다. 넷째는 유월절에 드릴 제물로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숫양 일곱 마리입니다. 
  
왜 매일 제물을 드립니까? 왜 안식일마다 제물을 드립니까? 왜 매달 초하루에 제물을 드립니까? 왜 유월절에 제물을 드립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희생과 기념을 드리려면 모두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사람이 잘못을 범하면 돌로 치라고 합니다. 죽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물을 대신하여 죽게합니다. 동물이 사람을 대신하여 제물이 되게 합니다. 성경은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면 수양을 잡으라, 수염소를 잡으라, 수소를 잡으라고 합니다. 제물인 동물이 인간의 생명을 대신하여 죽게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9:22에는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사람을 대신하여 짐승이 피를 흘려 죄 사함을 대신하였습니다. 신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심으로써 한번으로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셨기에 더 이상 짐승의 피가 필요 없습니다. 다른 제물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제물이 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산 제물이 되라고 하십니다. 제물은 거룩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다리가 부러지거나 눈이 빠진 것은 제물이 되지 못합니다. 제물은 모름지기 의로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제물이 어떤 제물입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는 제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여 의로운 제물이 되고, 하나님이 받으실 제물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깨끗하게 연단된 자손이 의로운 제물을 바칩니다. 

말라기 3:3에는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고 합니다. 술수를 부리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품삯을 착취하는 자와,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는 자와,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자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 재물만 바치면 되나요? 그런 제물은 아예 받지도 않으십니다. 
  
“연단하여 깨끗하게 된 레위 자손”이라고 합니다. 레위 자손은 연단하여 깨끗하게 성별한 자손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태어나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바로의 딸에게 발견되어 애굽의 왕자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어머니 요게벳의 젖을 먹고 연단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결정적 연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만나 “네 신을 벗으라, 네 지팡이를 던져라, 가라 모세야!”라고 하실 때에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워졌습니다. 어떤 이는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은 그동안의 미디안에서 익숙했던 범신적인 사상과 미신을 다 벗어버리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2:1에는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라고 합니다.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과 어머니 요게벳이 다 레위자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별하신 족속에게서 모세가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일꾼, 시대적 사명자로 삼으시려고 특별한 사람을 성별하시고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십니다. 
  
성경에는 나실인이라는 특별히 구분한 사람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나실인이라는 말은 분리하다는 뜻입니다. 분리하다는 것은 거룩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성별하신 사람은 특별한 서약을 통해 구별하여 여호와께 바쳐진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민수기 6장에는 나실인의 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세 종류의 나실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태어나면서 나실인이 된 사람입니다. 예레미야와 삼손이 그런 사람입니다. 둘째는 부모의 서원에 따라 된 나실인입니다. 사무엘이 그런 사람입니다. 셋째는 자발적으로 된 나실인입니다. 바울이 그런 사람입니다. 나실인은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고, 포도주와 독주를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이런 연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게 되는 사람이 나실인입니다. 
  
왕족은 황실의 법도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특히 세자가 되면 그 때부터 본격적인 왕으로서의 수업을 받게 됩니다. 왕이 되려면 연단하여 품위를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연단이 없이 왕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하게 연단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른 제물을 바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정결법이 있습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합니다. 부정한 음식에는 고기도 있고, 물고기도 있고, 새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부정하니 먹지 말라고 합니다. 이방인과 함께 먹지 말라는 법도 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으라는 법도 있습니다. 부정한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법도 있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병에 걸리면 격리하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법으로 정해놓고 엄격하게 따르게 합니까? 현대 과학은 부정법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들은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깨끗하게 연단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특별한 명령으로 하십니다. 
  
다니엘서 12:10에는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고 합니다. 연단을 받아 정결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연단을 받는 것을 짐으로 생각하지 말고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한의학에서는 ‘사상의학’이니 ‘팔 체질’이니 하는 것이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팔 체질을 연구한 한의원에 갔더니 저는 ‘금양체질’이라고 하네요. 저의 체질에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따져서 이런 것들은 먹어라, 저런 것들은 먹지 말라고 합니다. 제가 원채 귀가 얇아서 그렇게 해 보고 있습니다. 모든 육식은 좋지 않고 생선 특히 등 푸른 생선이 좋다고 합니다. 근채류는 좋지 않고 푸른 채소가 좋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가운데 우리에게 좋지 않은 것은 결단력 있게 과감하게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부정법을 주셨습니까? 사람에게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하면 모자라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정법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정결법을 따라 연단해야 합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깨끗하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잠언 17:3에는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더러운 세상에 살지만 마음을 깨끗하게 연단하여 깨끗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레위인이 그냥 레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실인이 그냥 나실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연단과 훈련 통하여 하나님이 성별하신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냥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연단과 훈련을 통하여 참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그리스도인의 시련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따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훈련과 연단을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 동안 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욥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연단을 받은 후에 순금같이 나오리라고 할 수 있는 깨끗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여호와께 기쁨이 됩니다. 

말라기 3:4에는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라고 합니다. 선민이 정결하게 될 때 제사장은 옛날과 같이 제물을 드리고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된 신약의 성도들이 제사장처럼 하나님을 섬길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가 제사장과 같이 제물을 드릴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은 베드로전서 2:9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직접 하나님께 재사장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삼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예배하며 교제할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택된 이스라엘 자손과 같이 하나님 앞에 선택된 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의 제사장이므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중보자나 중보적인 역할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제사장입니다. 레위지파입니다.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거룩하게 제물을 드려야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거룩한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도성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하며 예배하며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는 이것을 빼 놓으면 유다와 예루살렘도 다 세속도시이며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자리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자리여야 합니다. 애급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출애급할 때에 하나님께서 출애급의 목적으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모세는 바로에게 외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홍해를 건넜으면 빨리 제사부터 드려야지 왜 사흘을 가야 합니까? 아무리 하나님께서 제사를 기뻐하시지만 아무데서나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거룩한 제사할 자리에서 드리는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왔을 때에 만나자 마자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 척박한 산이 왜 거룩한 땅입니까? 바로 그 자리는 모세가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자리이기에 거룩한 땅입니다. 
  
여러분 한분 한분이 제사장이 되세요. 거룩하게 구별된 레위인이 되세요. 그리스도를 통하여 깨끗하게 된 거룩한 백성으로 사세요. 우리들의 자리가 거룩한 자리가 되게 하세요. 교회는 물론이고 가정과 직장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거룩한 자리가 되게 하세요. 이것이 현대의 제사장, 레위인인 우리가 할 일입니다. 
  
5절에 기록된 공의 없는 사회나 나라나 개인이 드린 제물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착취한 물질은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무당이나 점쟁이가 번 돈은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 구별된 방법으로 드리는 것을 기쁨으로 받으십니다. 
  
중국에서 떠도는 북한의 유머가 있습니다. 어느 미술관에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들고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영국인이 이 그림 앞에 와서 보더니 “영국 사람이다. 남자가 맛있는 것이 있으면 여자와 함께 먹으려고 하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프랑스인이 와서 그림을 보더니 “프랑스 사람이다. 누드로 산보하고 있으니까”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에 북한인이 와서 그림을 보더니 “조선 사람이다. 옷도 없고 먹을 것도 적은데 자신들은 천국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라고 하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가장 거룩한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선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드리는 제물을 기뻐하시고 받으십니다. 우리가 가장 멋있는 천국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리가 가장 좋은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예루살렘이 왜 거룩한 도시인지 아십니까? 예루살렘에 한 번 가 보세요. 전혀 거룩하지 않습니다. 다른 도시에 비하여 다를 것이 없고 오히려 더 복잡하고 싸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도시라고 하십니까? 단지 하나님께 제사하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니까 거룩한 도시입니다. 우리들의 자리를 제물을 드리는 자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로 만들어야 거룩한 백성입니다. 
  
‘템플턴상’을 제정한 존 템플턴의 ‘열정’이란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리번거리며 무엇을 찾고 있습니다. “뭘 찾고 있나?”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동전을 떨어뜨렸지 뭐야”라고 합니다. “어디서 떨어뜨렸는데? 이 앞이야 아니면 옆이야?” “둘 다 아냐. 마차 뒤에서 잃어버렸어”. “그러면 거기에서 찾아야지”. “이 사람아, 거기엔 등불이 없단 말야”.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가 원하는 바른 자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빗대어 하는 이야기 입니다. 사람이 바른 자리를 알면 성공자입니다. 거룩한 자입니다. 여러분은 바른 자리, 바른 삶의 자리를 알고 계십니까? 그 자리가 거룩합니까? 그 거룩한 자리에서 의로운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세요.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결론 

예배는 무엇입니까? 경축입니다.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경축입니다. 영접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영접입니다. 드림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며 사는 생활자체가 예배입니다. 
  
참된 성도는 예배하는 자입니다. 현대의 제사장, 레위인은 바른 예배를 드리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배하는 곳을 알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의로운 제물로 살고, 공의로운 제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간전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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