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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한 자들아 (약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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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한 자들아 (약 5:1-6)
  

세상이 뒤바뀌면 사람의 형편과 처지도 뒤바뀔 수밖에 없는데, 특히 우리 민족은 그런 일을 자주 겪었습니다.
8.15 해방을 맞이하게 되자 이전에 조선인이면서도 일본의 앞잡이나 형사 노릇하던 사람은 그 등등하던 기세가 하루아침에 간 곳 없이 사라지고 그저 몰매 맞아 죽지 않으려고 도망쳤어야 했고, 어제까지 감옥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던 독립투사들은 한순간에 역적의 자리에서 공신의 위치로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일자무식의 농사꾼이나 노동자가 갑자기 무슨 위원장 따위의 감투를 쓰고 안하무인의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는가 하면, 어제까지 천석꾼 혹은 만석꾼으로 불리고 살던 부자들은 인민을 수탈했다는 죄로 인민재판이란 것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인생이란 것은 지금 현재만 보면 그것이 소위 '타고난 팔자' 같지만 어떤 극적인 상황이 닥쳐오면 그 요지부동으로 보이던 '팔자'라는 것이 단 한 순간에 뒤바뀌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경우를 염두에 두면서 특히 "부한 자"들을 향하여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부자로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그냥 그대로만 보면 그것이 그들의 타고난 인생처럼 보입니다.
만약 이 세상이 아무 극적인 사건 없이 현 상태와 똑같이 계속 흘러가는 것이라면 돈 많은 사람이야말로 항상 유력하고 영원히 행복한 사람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은 우리 민족사의 8.15나 6.25와 비교도 될 수 없는 실로 극적이며 결정적인 한 날이 이 인류의 역사 미래에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날을 가리켜 본문은 "말세" 또는 "도살의 날"이라고 선포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을 가리키는 표현들입니다.
바로 이 날이 있기 때문에 오늘 이 땅의 사람 사는 현재의 인생이 결코 '타고난 인생'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를 알고 깨닫고 믿는 자라면 현재의 인생에 안주하지 않고 그 재림의 날 이후에 바뀌게 될 내세의 인생에 대하여 미리 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1절은 "1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부한 자들"이라는 말이 세상의 모든 부자를 통틀어서 지적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서 1장 10절의 "부한 형제"라는 표현에서도 암시되고 있듯이 초대교회 성도들 중에서도 부자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부한 자들"이란 전체적인 문맥에서 볼 때 분명히 '불의한 부자' 즉 '불신 부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 "울고 통곡하라"고 했는데, 이 표현은 특히 마지막 날에 악인들이 심판을 받은 후 보이게 될 대표적인 반응으로 성경에 자주 묘사되고 있습니다(사 13:6, 15:3, 암 8:3).
그러므로 여기 "너희에게 임할 고생"이란 것 역시 이 땅에서 당할 어떤 일시적인 고난이 아니라 심판 이후 받을 영벌을 가리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돈만 최고로 여기는 영적 졸부'들은 과연 어떤 죄로 인하여 그런 영벌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몇 가지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영적 졸부는 자기 인생을 재물에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됩니다.

먼저 2절과 3절 상반절에 "2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a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경고하는 바는 부자의 가장 대표적인 약점 곧 '재물에 자기 모든 인생을 의존하는 마음'입니다.
2절의 "재물"이란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부'라는 단어인데 때로는 '곡식'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옷과 금은은 곡식과 함께 당시 고대 사회에서 부의 3대 상징에 해당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히 흠모하고 세상 어디에서도 잘 통하는 그 전능하게 보이는 재물에는 사실상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그 약점이란 어떤 종류의 재물이든지 간에 그것들은 모두 다 일시적이며 소멸될 성질의 것이란 사실인데, 졸부들은 바로 이 점을 까맣게 잊어 먹고 있는 것입니다.
곡식은 예나 지금이나 대표적이면서도 가장 기본적으로 요긴한 부의 상징이지만 그것은 "썩는" 성질이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옷은 오늘날과는 달리 현찰이나 다름없는 또 하나의 주요한 재산 목록이었지만 그것은 "좀먹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금과 은은 사실 그 금속의 성질만으로 볼 때는 녹슬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들 역시 영원불변한 것은 아님을 나타내고자 할 때에 "녹슨다"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즉 영적 졸부들은 그 본성이 '썩고 좀먹고 녹슬 수 있는' 실로 유한적이며 지극히 불안한 재물에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꼭 백만장자 정도는 되는 사람들만 이와 같은 미혹에 빠지겠습니까?
부의 정도야 얼마가 되든지 간에, 그저 자기가 버는 돈만 의지하고 모아 놓은 재산에 남은 인생의 모든 미래를 걸어 놓고 사는 사람들은 다 똑같은 죄에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우상이란 항상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아닌 것을 더 의지하도록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재물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의지하게 되는 우상의 랭킹에서 일이등을 다투는 존재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대신 주인으로 모시게 만드는 최대의 라이벌인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나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고 예수님께 경고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 영적 졸부는 자신의 재물을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선한 일에 쓸 줄 모릅니다.

3절 하반절에 "3b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라는 말씀이 경고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세상의 미래에 별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면 재물과 옷과 은금만 부지런히 모은다고 해서 별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 미래에는 "말세"란 것이 다가오고 있으니 문제는 전혀 달라집니다.
여기의 '말세'라는 단어는 그저 세상이 망하고 끝나버린다는 뜻의 말이 아니라, 나중에 7절에 나타나는 "주의 강림"과 직결되는 단어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특히 그날을 가리켜 "불같이 살을 먹는" 날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형상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 심판이란 유죄 판결 받은 자들에게는 '불이 살을 삼키듯이' 무서운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는 말과 그 재물에 "녹"이 슬었다는 말은 그것을 선한 일을 위해 선용하며 하늘에 쌓아 두지 않았음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로 21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하늘에 쌓지 않은, 즉 선한 일을 위해 쓰지 않고 땅에만 쌓아 둔 보물에는 반드시 "좀과 동록"이 붙게 될 것이며, 심판 날에는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땅에 쌓아 둔 재물에 슬어 있는 녹이 바로 그 사람의 마음과 생활이 선한 일에는 전혀 관심도 상관도 없었음을 입증해 주는 증거 자료가 될 것이며 불심판 선고를 받는 근거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재물을 땅에만 쌓아 두는, 그것도 특히 '말세에 재물을 쌓는' 행위는 그 얼마나 미련한 것이겠습니까?

누가복음 16장 9절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말세'는 사람이 재물이 없어질 때 자기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해 주실 친구를 지금 있는 재물로써 사귀어 두어야 할 시기입니다. 
그런데도 바로 그 중차대한 기회에 자기 재물을 선한 일을 위해 전혀 쓰지 못하는 것은 망하는 나라의 화폐를 아직 효용이 있을 때 바꾸어 두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똑같은 것입니다.
나라의 주인이 바뀌면 이전의 유가증권들이 한갓 휴지조각으로 변하는 것처럼, 이 세상의 재물이란 것도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나면 다 휴지만도 못한 것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직까지 그때가 오지 않았을 때, 아직 이 세상의 재물이 효력이 있을 때에 우리는 그것으로 선한 일에 투자하여 저 하늘 창고에 '영원히 녹슬지 않는 재물'로 쌓아 둘 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3. 영적 졸부는 재물 모으기에만 혈안이 되어 다른 죄들을 겹쳐 저지르게 됩니다.

4절 말씀에 "4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로마제국 산하의 각 나라에서 주후 1세기 어간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사회적 상황과 관련됩니다.
이 당시를 즈음해서 모든 농경지가 소수의 부유한 대지주의 손에 점점 더 집중되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이전에 작은 농경지에서 자영 농업을 하던 농민들은 자연히 그런 대지주 밑에서 일당을 받고 일하는 일꾼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품꾼들에게 있어서 그날의 품삯이란 자기에게 딸린 온 가족의 하루 먹을거리에 해당되었으며, 문자 그대로 '입에 풀칠하는' 하루하루를 연명했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일꾼들은 일이 끝난 바로 그날 저녁에 그날의 일당을 받아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마 20:1-16)라든지 신명기 24장 14-15절의 말씀 등에서 그런 품꾼에게 '삯을 제 때에 주어야 함'이 강조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배경 때문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지주 부자들이 품삯을 제때에 지불하지 않거나 떼어먹는 일이 비일비재했었습니다.
부는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고 노동력은 남아도는 상태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당시에도 벌어졌던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어찌하든지 자기 은행 구좌의 돈을 좀 더 여유 있게 돌리고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만 최대로 챙기려고 하는 욕심이 자연히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죄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를 결코 잊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벨이 흘린 피가 소리를 질러 가인의 죄를 하나님께 직고하던 모습과 같은 형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만군의 주"란 표현은 '천군천사를 거느리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게 시행될 것인지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부자가 저지른 그 부당하고 악랄한 죄악을 심판하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천군천사를 다 동원해서라도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다 들추어내어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돈을 번다는 자체를 두고 성경 말씀이 정죄한 경우는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될 때 파생되는 죄, 마치 약을 잘못 쓸 때의 부작용과 같은 죄를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무조건 돈을 벌어야만 하겠다는 과정에서 고객을 속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는 부작용, 동업자에게 부당한 손해와 피해를 끼쳐도 자기만 잘되면 된다는 사고방식의 부작용, 종업원들을 인격적으로 육체적으로 학대하면서도 점점 더 무감해지는 부작용 - 바로 이런 죄들이 그 돈이란 것을 벌려고 악착같이 사는 동안에 마치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그 재물과 함께 점점 더 불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라는 말씀은 결코 과장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경고의 말씀인 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4. 영적 졸부는 그 재물을 가지고 자신을 더욱 더러운 존재로 만들어 가는 데에 악용합니다.

본문 5절에 "5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재물을 가지고 선한 일에 쓸 줄 모르는 자들이 그 재물로 할 수 있는 남아 있는 일이란 뻔한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그 재물을 자기 자신의 인생을 최대한으로 즐기는 데에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우선 "사치"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재물로써 자기를 과시하려 하고 재물로써 자신을 스스로 극진히 모시고자 하는 심리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사치만으로는 넘치고 남아도는 재물을 다 쓸 수 없을 것인데, 그래서 그것은 또한 "연락"이란 출구를 통해서 배출되기 마련입니다.
온갖 종류의 유흥을 추구하게 되고 그것이 금세 싫증이 나면 무언가 또 다른 쾌락을 찾아 나서는 일상이 반복되는 것이며 그런 생의 쳇바퀴를 통하여 모든 재물이 소비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는 바로 그와 같은 사치와 연락의 생을 통하여 사실상 자기 자신을 더욱 낮고 천하고 더러운 존재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은 그런 모습을 두고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다"고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도살의 날"이란 심판날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이사야 30장 25절에 "크게 살육하는 날", 요한계시록 19장 20절과 21절에 "짐승과 거짓 선지자... 이 둘이 산 채로 유황 불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는 말씀들이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부자가 사치와 연락으로 자신을 살찌우는 모습이란 바로 스스로 도살당할 날이 다가오는 줄 모르고 먹고 살찌기에만 바쁜 돼지의 모습과 아무 다를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살찌면 살찐 만큼 빨리 도살당하게 되는 것'이 바로 재물로 자신의 생을 장식하고 충족하려는 자들의 실제 현실인 것입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에 백랍으로 만든 화장품이 대유행했었습니다.
그것은 피부색을 하얗게 해 주는 효과가 있는 것이었지만 또한 피부와 치아를 상하고 썩어 들어가게 하는 효과 또한 아주 좋았던(?)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그처럼 백랍 화장품이 사실에 있어서는 자기 얼굴을 스스로 망치는 독인 줄도 모르고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하여 그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그것을 날마다 새하얗게 발랐었는지 모릅니다.
재물이란 이처럼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쓸 때에는 바로 그 사치와 연락이라는 더러운 화장품을 자신의 온 몸과 인격에 갖다 바르는 꼴이 되는 것이며 그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죽을 날밖에 남아 있지 않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5. 영적 졸부는 자신의 부를 자랑하는 가운데 의로운 것을 멸시하고 대적하는 죄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 역시 재물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죄인데, 바로 그것을 두고 6절에 "6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옳은 자"가 누구를 혹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단수로 씌어져 있기 때문에 이 '옳은 자'(the righteous man)란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고 혹자는 바로 야고보 자신을 가리킨 말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문맥상으로 이 단어는 부자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는 '일반적인 의인'을 가리키는 '대표단수'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부자는 의인을 오히려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 '정죄'라는 단어는 특히 재판정에서 쓰는 법률적인 용어입니다.
즉 졸부들은 그처럼 재물을 생의 기준으로 삼고 살다 보면 자연히 영적 도덕적 판단력까지 흐려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자수성가했다는 자부심과 가난한 자에 대한 멸시감이라는 선입견을 통해서 세상을 보게 될 때, 의롭고 불의한 것과 옳고 그른 것에 대하여 왜곡된 결론을 내리게 되며 타인에 대하여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부자는 자기에게 아무 "대항할" 힘도 없는 의인을 오히려 멸시하고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의로우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로 직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부자'라는 자체가 곧 '죄인'이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부자일수록 불의한 자 되기가 훨씬 더 쉽다는 사실은 구약에서 수없이 경고하고 있는 말씀은 제쳐 놓고라도 우리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 한 마디만 되새겨 보아도 너무나 명백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 19:23)고 하신 말씀은 결코 빈말이 아니며 과장도 아니고 실로 정곡 중의 정곡을 찌르고 있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재물이 부자의 눈에 색안경이 되면 그는 진리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진리의 핍박자까지 될 수 있으며 그 결과 문자 그대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말씀 앞에서 '나는 부자가 아니니까...'라고 방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이 야고보서를 받아 보았던 수신자들의 상황과 비교해 본다면 우리 모두는 사실상 부자에 속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현대 사회에서 그저 중산층으로서 누리는 생활수준은 2천 년 전 절대다수가 빈민이었고 노예 계층이었던 초대교회 신자들에 비하면 왕족이나 거부는 못 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귀족이나 부자 신분이 되기에는 조금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평균적으로 누리고 있는 부요 때문에라도 저와 여러분들은 초대교회 신자들보다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그만큼 더 어려운' 자들이 될 소지가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쉰들러의 리스트'라는 영화에 보면, 주인공 쉰들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잡혀간 유태인들을 구출해 내려고 독일군 고위 장교 한 명에게 뇌물을 주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더러 뇌물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얼마 안 있으면 우리 모두가 다 몸에 지니고 다니기 쉬운 재산이 꼭 필요할 때가 오고 있다는 것을 당신도 나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오."라고 하면서, 책상 위에다 한 뭉치의 보석을 펼쳐 놓는 장면입니다.
'곧 독일이 망하게 되면 당신도 독일군의 장교 계급보다는 현실적인 돈이 더 필요하게 될 것이니 이것을 받고 내가 요구하는 유대인들을 내게 넘겨주시오.'라는 뜻으로서, 다시 말하자면 세상이 뒤바뀔 한 날이 지척에 다가오고 있으니 피차 현명하게 처신하자는 말이었습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판가름하게 될, 온 세상이 뒤바뀔 미래의 그 한 날이 없다면 지금 무조건 돈만 벌면서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세, 도살의 날, 심판의 그 한 날이 분명히 다가오고 있는 한, 문제는 아주 다른 것이 됩니다.
전 인류의 인생이, 전 우주의 상태가 완전히 뒤집히게 될 마지막 날이 지척에 다가오고 있음을 안다면 사람은 자기가 현재 가지고 있는 부를 가지고서 바로 그날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실로 당연하고도 지혜로운 처신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적 졸부는 하나님 대신에 오직 재물만을 우상으로 의지하며 섬기는 자입니다.
졸부는 자신의 재물을 그것이 아직 유효할 때 선한 일을 위해 쓰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심판날에 정죄당할 증거로 만듭니다.
졸부는 재물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죄의 부작용을 유발시키면서 천만 가지 악에 빠져 들어갑니다.

졸부는 벌어 놓은 재물을 자신의 향락을 위해서만 오용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심판 받기에만 꼭 알맞은 가장 더러운 존재로 탈바꿈시켜 갑니다.
무엇보다도 불신앙적인 졸부는 그 부 때문에 자신의 영적 판단력이 근본적으로 뒤틀리며 전 생애를 통하여 오직 의를 핍박하고 대적하는 악인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성경 말씀은 바로 이런 악하고 교만한 졸부들을 가리켜 "들으라 부한 자들아"라고 책망하며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그 날이 분명히 하루하루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가진 재물을 스스로 불의한 자, 불신자가 되는 데에 낭비하거나 악용하지 말고, 구원주 예수님을 영원한 친구로 삼는 일에 선용하며 우리의 마음이 마땅히 있어야 할 저 하늘 창고에 넉넉히 쌓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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