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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에 속한 우리 (엡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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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속한 우리 (엡 2:1-7)


해마다 3월 말 봄철이 되면 100만의 인파들이 국내외로부터 기적의 섬 진도를 찾습니다. 그것은 소위 현대판 모세의 기적을 목격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진도 신비의 바닷길 열림의 기적은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 약 2,8km가 조수 간만의 차이로 수심이 낮아 질 때 바닷길이 드러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40여 미터의 폭이 일정하게 만들어져 바닷길을 만드는 것은 여전히 신비로운 기적으로 간주됩니다. 그런 기적을 목격하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진도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한 주간 지구촌 성도들 1,500여명은 봄철이 아닌 여름철 중복더위에 전혀 다른 또 하나의 기적을 목격하기 위해 진도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진도 주민들의 마음에 기적의 바닷길이 열려 그들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닌 하늘에 속한 사람들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파를 초월하여 진도 섬 모든 교회에 흩어져 섬김의 땀을 흘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수요일 저녁에 가계 해수욕장에서 남도 연합 성회를 열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가 우기여서 무엇보다 날씨를 위해 기도했고 진도 섬 전체에 비가 내리는데 집회장소인 가계 해수욕장만 비가 안 오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설교중간 약1-2분간 잠간 비가 뿌렸지만 청중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고 곧 이어 우리를 시험하던 비는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기적은 설교 후 구원 초청에 응답한 수많은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이런 구원의 기적은 성회 장소에서만이 아닌 우리가 땀 흘려 섬긴 모든 교회들에서 일어났습니다. 일찍 모세가 기도한 후 주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홍해를 건넌 후 그들의 인생은 홍해의 기적 전과 후로 명확한 변화의 차이를 드러냈습니다. 기적의 체험이전 그들이 땅에 속한 인생이었다면, 하늘의 기적을 체험한 후 그들은 이제 하늘에 속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드린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는 그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천년 전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한 소아시아의 에베소 시민들에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바울은 그런 기적의 영적 의미를 자상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땅에 속한 인생과 하늘에 속한 인생의 그 현저한 차이를 목격하게 됩니다. 땅에 속한 인생과 하늘에 속한 인생-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1. 땅에 속한 인생의 모습입니다.(1-3절)

바울 사도는 땅에 속한 인생을 영적으로 죽은 자라고 말합니다. 2:1을 읽어 보십시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기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이란 단어의 본래의 뜻은 항상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허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 것을 의미하고(예, 출입금지 구역을 범함), ‘죄’는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 것(예, 목표를 명중하지 못하고 빗나감)을 의미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고,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을 깨트리고 사는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까? 

바로 그런 허물과 죄로 인생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반응하지도 못하고’(죽은 자의 특성),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도 못하고 사는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표현을 빌리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계3:1)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인생은 세 가지의 지배를 받으며 산다고 말합니다. 이 세 가지를 인생의 3가지 영적인 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세상, 둘째가 마귀, 셋째가 육체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에게 세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마귀는 저 위로부터 영적 존재들을 거느리고 우리를 공격하고 있으며, 육체 혹은 육신은 우리 안에 자리잡고 우리를 안으로부터 부패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땅에 속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우선 2절에 보면 “세상 풍조를 따르고”하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죽은 인생은 세상의 영향을 거부할 능력이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세상의 풍조를 따라 다닙니다.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라는 말씀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보면 2절에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했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누구입니까? 바울사도는 2절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 정체를 밝힙니다. 그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입니다. 그가 바로 마귀가 아닙니까? 마귀의 사명은 인생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를 증언한 후 이어 3절에는 “육체”에 대하여 말합니다. 여기서 “육체”란 말은 영어로(soma)로 번역되지 않고, (sarxs)로 번역됩니다. 이것은 신체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아담에게서부터 물려받은 인간 본연의 타락한 성품 곧 부패성>인 것입니다. 이 타락한 성품의 지배받는 모습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3절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 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인간의 마음 전체가 이 타락의 영향아래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도 감성도 의지도 인간의 품성 전체가 다 타락한 것입니다. 개혁자 칼빈은 이런 상태를 “전적인 타락”(Total depravity)이라고 말합니다.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이 다 타락의 영향아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죽은 자 곧 땅에 속한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4절 이하의 본문의 증언은 이렇게 영적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 하늘에 속한 자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것은 철학도 심리학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2. 하늘에 속한 인생의 모습입니다.(4-7절)

4절은 본래<그러나>라는 전절의 내용과 비교하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영어의입니다.(우리 말 성경에는 생략됨)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복음은 하나님의 긍휼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계속 읽어보면<긍휼>과 함께 나란히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 단어가 세 가지 더 있습니다. <사랑>이고<은혜>이고<자비>입니다. 

이 네 단어는 비숫한 의미를 지니지만 기술적인 뜻의 차이를 지닌 단어들입니다. 긍휼(mercy)이 저주 받아 마땅한 자를 불쌍히 여겨 저주를 중단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라면 사랑(love, agape)는 그런 저주 받아 마땅한 자의 유익을 오히려 도모해 주고 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긍휼보다 발전적인 단어이지요. 그런데 은혜(grace)는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그에게 최선의 호의를 베풀고자 한 것입니다. 자비(kindness)는 그런 사랑받을 자격 없는 인간에게 구체적인 호의로 선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자비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세 가지 기적적인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기적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함께 일으킴을 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함께 하늘에 앉히신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첫째 우리가 복음의 소식을 받고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부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5절의 사건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그렇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도 새롭게 산자가 된 것입니다. 철학과 도덕과 교양은 인간의 실존을 포장할 수는 있지만 새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인간을 새롭게 출발시킵니다. 이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올 때 그는 죽은 사람을 동여매는 베와 끈으로 얽어 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다시 산자로서의 자유와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부활하신 후 이제 자유와 능력으로 이 땅에서 40일을 다니시며 자신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심으로 그의 부활을 입증해 보이신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하늘에 함께 앉히신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6절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히신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제 그는 성부 하나님과 우주 만물을 통치하는 자리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신바 되었다는 실제적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본래 처음 창조되었을 때 땅에 충만하여 땅을 정복하고 땅을 다스릴 자로 지음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죄와 타락은 이 통치의 능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우리로 세상의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하늘의 시민권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다시 만물을 다스리는 자의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땅에 살지만 하늘에 속한 자로 땅을 다스리며 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우리가 주와 함께 왕 노릇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왕 노릇할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의 왕 노릇은 세상의 왕들 방식으로 왕노릇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님처럼<섬김과 기도>로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온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통치권을 행사하게 된 것입니다. 

요14:12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 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왜냐하면 그의 죽으심과 승천으로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연합되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만물을 통치하는 자리에 앉게 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아직도 땅에 살고 있는 불완전하고 연약한 인생들이 어떻게 주님처럼 이런 통치권을 행사하며 살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 다음 절이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요14:13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하여 기도할 때 나라가 변한다고 믿으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실제로 나라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진도에서 날씨를 위하여 기도할 때 일기예보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날씨조차 주장하는 자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요13-16장을 가르쳐 우리는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라고 일컫습니다. 그가 마지막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실제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왕 노릇하는 방법을 제자들에게 두 가지로 가르치십니다. 하나는 “섬김”이고(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모범까지 보이심), 또 하나는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섬김과 기도>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땅에 살면서 땅에 속한 자가 아닌 하늘에 속한자로 살수가 있습니다. 땅을 변화시키기 위해 땅에 허락하신 하늘에 속한 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속한 우리-하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 반드시 한 평생 배우고 실천해야 할 것이<섬김과 기도>입니다. 우리의 섬김과 기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여름 우리가 섬길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기도할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이것이 하늘에 속한 자로 아직도 땅에 사는 우리의 할 일입니다.
이 거룩한 미션으로 여름의 더위를 극복하고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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