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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으로 탈진할 때가 있습니다 (왕상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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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으로 탈진할 때가 있습니다 (왕상 19:1-4) 


이스라엘 서쪽 지중해 해안을 끼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갈멜산이 있습니다. 갈멜산은 어느 한 봉우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갈멜산 줄기 전체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지중해 해안에서 내륙 쪽 23km지점까지 폭 10km로 뻗어있는 ‘산악지대 전체’를 갈멜산이라고 부릅니다. 갈멜산은 샤론과 에스드리엘론의 두 평원 사이에 높이 솟은 산으로 수목이 울창하고 아름다운 산입니다. 근방에는 포도나무를 재배하는 과수원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갈멜산이라고 하여 올라가는 곳은 갈멜산의 무흐라카 봉우리입니다. ‘무흐라카’라는 말은 ‘불의 장소’ 또는 ‘불이 내려온 곳’이란 뜻입니다. 그곳에는 수도원과 엘리야의 기념석상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그곳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곳의 엘리야는 근엄한 얼굴로 오른손엔 끝이 구부러진 칼을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알 선지자 450인을 죽인 것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칼이 구부러질 정도로 바알 선지자를 죽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왼발은 바알선지자의 어깨를 밟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 숭배를 짓밟고 여호와 신앙을 지킨 것을 상징합니다.

엘리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더불어 말씀하셨습니다(마 17:3).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 성경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말씀을, 엘리야는 능력을 대표합니다.
     
엘리야에게는 어떤 능력이 있었습니까?

I. 능력

1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1a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아합은 북쪽 이스라엘의 7대왕입니다. 아합은 시돈이라는 나라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였습니다. 시돈의 왕은 ‘바알과 함께’라는 뜻의 ‘엣바알’이었습니다. 그는 바알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의 딸 이세벨은 이스라엘 왕궁으로 시집오면서 바알과 아세라라는 우상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서울인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혼자만 섬긴 것이 아니라 바알을 위한 선지자들을 데리고 와서 국민들에게 바알 숭배를 강요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합은 그 이전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는 평가를 받습니다(왕상 16:33). 
     
이렇게 영적으로 어두웠던 시절에 엘리야라는 인물이 서있습니다. 그는 구약의 선지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능력을 가진 분입니다. 엘리야가 어떤 인물인지를 표현하는 성경 구절은 야고보서 5:17-18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기도할 때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기도하자 비가 내렸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기적이 있습니다. 가뭄 기간 동안 엘리야는 사르밧(=사렙다 눅 4:26)이라는 곳의 어느 집에 머물렀는데 그가 머무는 동안 그 집 기름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고 가루통의 가루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그는 기도하여 그 집의 죽은 아들을 살렸습니다.
     
1. 그는 탁월한 능력자입니다.
     
엘리야는 많은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엘리야의 능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엘리야의 연약함입니다. 능력을 행하는 엘리야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과 위로부터 주시는 권능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기억하야 할 것은 우리는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는 또 어떤 사람입니까?
1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1b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엘리야가 행한 일의 결정판은 갈멜산 꼭대기에서 바알의 모든 선지자들을 칼로 쳐 죽인 것입니다.
아합과 결혼한 이세벨은 자기 아버지가 섬기던 바알이라는 우상을 이스라엘로 가지고 와서 국민들에게 섬기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죽이고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세웠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가장 번창하였던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 숫자가 약 48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바알의 선지자가 450명이나 되었다고 하는 것은 당시 바알 종교가 얼마나 극성을 부렸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세벨은 바알 우사을 국가 종교로 삼고 반대자들을 무참히 학살하였습니다.
     
이 때 분연히 일어났던 사람이 바로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바알의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아 자신과 시합하도록 제안하였습니다. 여호와가 진짜 하나님인지 바알에 진짜 하나님이인지 가려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각각 송아지 한 마리씩을 잡아 나무 위에 놓고,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쪽을 진짜 하나님으로 인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시합이 시작되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송아지를 잡아놓고 아침부터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녁때까지 자신들의 몸을 칼과 창으로 찌르며 미친 듯이 떠들며 부르짖었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간절하게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왕상 18:37)하고 기도할 때, 여호와의 불이 내렸습니다. 불이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았습니다. 시합은 엘리야의 승리였습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명령하여 바알의 선지자를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고 잡아 죽이게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신앙을 위하여 투쟁하는 삶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영국의 신학자 로울리 (H. H. Rowley)는 “모세가 없었다면 여호와 신앙이 태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며, 엘리야가 없었다면 그 신앙은 죽고 말았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이 풍전등화처럼 꺼져가고 있을 때, 등잔에 기름을 붓고 심지를 돋아 불꽃을 다시 일으킨 사람이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2. 그는 전투적 신앙인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위기를 겪을 때 가만히 앉아있었던 것이 아니라 분연히 일어나 싸우는 전투적인 신앙을 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전투적인 신앙이 필요합니다. 누룩처럼 조용히 스며들어가야 할 때도 있고, 소금처럼 녹아져야 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대항하여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능력을 행하는 믿음을 가지고, 전투적인 신앙인으로 살 때도 기억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영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넘어질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탁월한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자, 전투적 신앙을 가졌던 엘리야에게 위협이 닥쳤습니다.

II. 위협

2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2a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자신이 아끼는 바알의 선지자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세벨이 분노하였습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자신의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복수심에 가득 찬 이세벨이 반드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1. 그는 생명을 위협받았습니다.
     
기도하여 하늘에서 비를 내리기도 하고, 기도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리기도 하였던 엘리야에게 이세벨의 위협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하지만 생명의 위협은 아무리 탁월한 능력자에게도 심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마10:28-3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이 실재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실재입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고통에 직면한다는 것은 엄청난 위협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또 어떤 위협이 엘리야에게 있었습니까?

2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2b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이세벨이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이세벨은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고 합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한 뒤에도 이세벨은 바알을 의지하고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서서 독설을 내뱉습니다.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신들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2. 그는 신앙을 위협받았습니다.

우리는 영적 싸움에도 수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있는 산 아래로 돌아오셨습니다. 그곳에는 다른 제자들이 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꾸짖어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미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주셨습니다(막 3:15). 그들은 귀신을 내쫓는 일을 하였습니다(눅 10:17). 그런데 이번에는 예전처럼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였습니다. 이번의 것은 이전에 내어 쫓았던 귀신들과는 종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더 기도하여야 내어 쫓을 수 있는 귀신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바알의 모든 선지자들을 단번에 이기는 능력을 행한 엘리야였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은 대항하기 쉽지 않은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여 귀신을 내어 쫓는다고 할지라도 모든 종류의 귀신을 다 내어 쫓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은 우리의 기도로 완전히 이 땅에서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사탄은 세상 마지막 때까지 활동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수준별 학습이 있는 것처럼 영적으로도 수준별 도전이 있습니다. 더 기도해야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때로는 개인의 힘으로 결코 상대할 수 없는 악한 영들의 세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합심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위하여, 우리나라를 위하여 강력한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신앙의 공동체인 우리교회를 위하여 또한 강력한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악한 세력들에게서 강력한 위협을 받을 때, 더욱 강력하게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여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생명의 위협 앞에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는 오직 나만 남았다고 좌절하였습니다. 그를 좌절하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III. 좌절

3절 전반절입니다.
: 3a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엘리야는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쳤습니다. 그는 형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위하여 떠났습니다.

1. 그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형편을 보았습니다.

지금, 엘리야의 눈에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주시던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왕비 이세벨의 표독스러운 저주만 보였습니다.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려고 찾고 있다는 말을 듣자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엘리야입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고통스럽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이 때, 기도하시려 산으로 가셨던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말하였습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베드로는 오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곧 바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바다로 뛰어들어 걸었지만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순간 빠졌습니다.(마태 14:30)

물 위를 걷다가 바다에 빠진 베드로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까 없는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이 적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보면 넘어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바알의 선지자와 싸움에서 승리하였지만, 자신의 형편을 바라볼 때는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좌절한 엘리야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3절 후반절에서 4절 전반절입니다.
: 3b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 4a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북쪽인 갈멜산에서 가장 남쪽 지방인 브엘세바로 도망을 갑니다. 브엘세바는 이스라엘의 가장 남쪽 땅 끝입니다. 엘리야는 땅 끝까지 도망쳤습니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어서 브엘세바에 자기 시종을 남겨 두고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나무 아래로 가서 앉았습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해남 땅 끝 마을까지 가서 거기서 혼자 배를 타고 무인도로 도망친 것입니다.

2. 그는 아주 멀리 도망치려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땅 끝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려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엘리야는 자신의 일에 지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와 대결하였습니다. 3년 반 동안 내리지 않던 비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몸은 너무나 지쳐버렸습니다. 이를 심리학자들은 엘리야가 심각한 우울증에 걸렸다고 이해합니다.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도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치면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지쳐 쓰러질 때가 있듯이 엘리야도 지쳤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때로는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가정도, 직장도, 다 그냥 두고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평소라면 이세벨이 뭐라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엘리야였지만 지금은 이세벨의 몇 마디에 위협을 느끼고 땅 끝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도망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의 상태는 보다 더 심각하였습니다.

4절 후반절입니다.
: 4b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이세벨이 죽이려고 하는 것이 겁이 나서 살겠다고 도망친 엘리야가 죽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는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3. 그는 생명 거두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누구나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에스더 4:16)고 결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엘리야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 순교하기로 결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호소하면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엘리야는 무력감, 절망감,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것이 흔히 엘리야 증후군(Elijah syndrome)이라 부르는 ‘탈진(脫盡)’입니다. 엘리야가 아무리 탁월한 능력이 있고 전투적인 신앙을 가졌다고 해도 그는 하나의 인간이었습니다. 자신의 형편을 보며 좌절하였고 도망쳤고 죽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도 좌절하고 도망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까? 지극히 정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엘리야처럼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요나처럼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모른다고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방치하면 안 됩니다. 회복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후의 말씀에서 엘리야의 회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엘리야가 회복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에 이야기하겠습니다. 다만 우선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삶의 형편의 보면 질식할 것 같고, 그래서 도망치고, 더 심하여 죽고 싶을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자신을 여전히 영웅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도무지 자신의 탈진을 인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문제입니다. 자신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위기입니다. 활활 타오르던 장작불도 장작이 다 타고 나면 사그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영적 탈진에 빠질 수도 있고 주저앉을 수도 있고 스스로 낙심할 수 있고 심하며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여전히 사람이라는 가장 좋은 증거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우선, 자신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십시오.

시편 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낙심할 수 있습니다. 좌절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를 다시 살게 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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