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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직도 끝은 아니야 (막 14:4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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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끝은 아니야 (막 14:43-52)


뉴욕 지하철에서 두 사람이 구걸을 합니다. 한 사람은 누더기 차림에 처량한 모습으로 “배고프고 집도 없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라는 팻말을 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말쑥한 양복 차림으로 “엄청 부자지만 돈이 더 필요해요”라는 팻말을 들었어요. 사람들은 당연히 양복 입은 거지에게는 돈을 던져주지 않았어요. 그러나 사실 두 거지는 동업관계였어요. 사람들은 누더기 차림 거지에게 돈을 4배나 더 던져준 것이에요. 두 거지는 수입을 나눠 가졌어요. 평소보다 2배의 이익을 올린 셈이에요.

영국의 심리학자인 케빈 더틴은 상대의 정신적 보호 장치를 순식간에 무력화하는 설득방법으로 ‘반전설득’을 제시합니다. 사람들은 당초 거지에게 돈을 주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부자 차림 거지라는 ‘의외성’에 자신도 모르게 처량한 모습의 거지에게 돈을 던진 거죠. 저자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것 같은 우리의 뇌는 초(超)설득력을 발휘하는 5가지 요소에 쉽게 교란당한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이를 단순성(Simplicity),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생각(Perceived self-interest), 의외성(Incongruity), 자신감(Confidence), 공감(Empathy)의 'SPICE'로 정리합니다.

디트로이트의 한 신문은 총상을 입고 병실에서 회복중인 어느 환자가 다시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을 보도했습니다. 그 환자는 총에 맞기 전에만 해도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퇴원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같은 병원에 입원중인 환자들과 직원들은 너무도 놀랐습니다. 병원 대변인은 50년의 병원 역사에서 이번과 같은 사건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대해서도 그 대변인이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약 지난 30년 동안 우리들이 예배와 친교와 영적 치유를 위해 함께 모이면서 주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된 사람들의 잘못으로 한 번 상처를 받은 사람을 다시 넘어뜨린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가운데에는 다윗이 시편 109편에서 말한 고통을 체험해 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윗이 아파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을 때 악한 사람들은 그 기회를 이용했습니다. 물론 그가 죄를 지었으면 사랑 안에서 그를 바로 잡아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꾸짖음, 험담, 그리고 이기적인 태도로 무시하는 것은 다윗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자기 발가락을 돌에 채인 사람이 자기 발에 다시 총을 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안의 한 지체로서 상처받은 형제자매를 향하여 잔인하게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비난의 손가락질보다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를 넘겨주는 유다를 생각해 봅니다.
미국의 어느 시인이 쓴 시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제목은 “Don't be afraid to fail”, 즉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마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여러분도 저처럼 수천 번, 수만 번 실패를 거듭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일례로 걸음마를 처음 시작할 때의 아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대로 걷게 되기까지 수천 번도 더 넘어지지 않습니까? 

미국 야구 선수 베이브 루드를 보십시오. 선수 생활 동안 그는 714개의 홈런을 쳤지만 또한 1,330번이나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한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할 때마다 좌절감을 이기려고 더욱더 열심히 도전했을 것입니다.
성공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도한 뒤에 즉각적인 하나님의 응답이 없어도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이 있음을 믿고 기다리며 더 기도해야 합니다. 

전도서 10장 10절에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앞부분에서 “무딘 철 연장 날을 날카롭게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고 했습니다. 아직 성공에 이르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날을 갈고 계시는 중입니다. 기도 가운데에 더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의 발전소는 마음입니다. 마음에 불안이 찾아오고 두려움이 찾아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단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난도질합니다.
그렇게 난도질을 당한 사람의 대표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처음 예수님께로부터 지명을 받아 12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움을 받았을 때 가룟 유다의 마음도 한 없이 설렜을 것입니다. 자기처럼 똑똑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을 제쳐놓고 자기에게 돈 주머니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계산에 밝기도 했지만 어떤 점에서는 믿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한 편으로는 부담도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참으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뭐 다른 제자들이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거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어쨌든 그들은 그들일 뿐 나만 아니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나가면서 가만히 보니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예수님께서 따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 데리고 가시곤 하는데 영 기분이 좋지를 않습니다. 나만 특별히 인정받는다 싶었는데 이건 거꾸로 힘든 일은 자기에게 맡기고 좋은 일에는 그 세 사람을 앞세우는가 싶어서 마음이 영 찜찜합니다. 그런데다가 돈을 맡아가지고 있다 보니 거기에 무슨 회계 장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도 모르고 한 푼 두 푼 쓰게도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에 찔리기도 했지만 어느새 무감각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뭐 나중에 다시 채워 넣으면 되지 하는 마음도 있고 이거야 뭐 누가 알겠어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려고 했든 그렇지 않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도 예수님을 따르면서 큰일을 할 수 있겠다는 마음도 있었고 주님께 인정받아 돈 주머니를 맡았다고 하는 자부심도 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제쳐놓고 주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로 택함 받았다고 하는 것도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고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이후부터 예수님이 달라지셨습니다. 

매번 나는 이제 죽으러 간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아니 그렇다면 자기들은 뭡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70명이 둘씩 둘씩 나가서 전도를 할 때만 해도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자가 고침 받은 역사들이 자기들을 통해서도 나타날 때 정말 신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신이 나서 돌아와 보고도 하고 했는데 막상 자기들이 따르는 예수님이 죽어버린다면 이건 전혀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거기다가 왜 예수님은 꼭 무슨 일을 안식일 날 해서는 대제사장들과의 시비 거리를 만드시는지 영 불만입니다. 그래서 갈수록 기존 권력층들과는 상극처럼 바뀌어져 가는데 정말 미칠 지경입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누가 크냐고 다투기도 했지만 그건 다 예수님이 등극하셨을 때 예기지 예수님이 죽어버린다면 다 꽝입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치명적인 결혼을 내리게 됩니다. 이왕 죽을 예수님이시라면 그 예수님을 통해 나나 한 몫을 챙겨야 되겠다. 

그래 자기 선생님을 팔아넘기기로 했던 것입니다. 많이 좀 챙겨줄 줄 알았더니 인색하게끔 겨우 종 하나 값밖에는 안 주겠다네요. 하지만 그것도 어딥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저들에게 눈치 안채게 넘겨줄 수 있을까 하고 기회만 보고 있었는데 지난밤에는 정말 간 떨려 죽은 줄만 알았습니다. 아니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지난 밤 만찬의 자리에서 말씀하시는데 시치미를 뚝 떼고 있기는 했었지만 정말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나중에는 내가 빵 한 조각을 주는 자가 그니라고 하면서 빵을 떼어 자기에게 주는 순간 그는 살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걸음에 대제사장을 만나러 갑니다. 자기 짐작이 맞는다면 오늘밤 틀림없이 예수님은 겟세마네 정원으로 기도하러 나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집의 호위병들을 데리고 예수를 넘겨주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미리 약속한 대로 “선생님 평안 하십니까?” 하면서 예수님께 입을 맞췄습니다. 마음으로야 찔리지만 어차피 막가는 길입니다. 한 번만 모른 척 하고 있으면 다 끝날 것입니다. 

그래 가슴 떨리는 일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래 군사들에 의해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제자 중 하나가 칼을 휘두르다가 그마저 도망가 버리고 결국 자기 혼자 남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정신이 버쩍 듭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더군다나 마지막 주님의 말씀이 자기를 향해 친구라고 하셨을 때 이만저만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 그는 대제사장을 찾아가 돈을 다시 집어 던져주고 머리를 감싸고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한데 진짜 잘못은 그가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입니다. 아직도 끝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예수가 죽는다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던 그것부터가 잘못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건 다음 아닌 이젠 다 끝났어 아무 소용도 없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까지 끊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그 어떤 경우라도 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끝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언제든지 기억하고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요 복된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도망치는 제자들입니다.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를 이끌고 왔는데 그들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와서는 예수에게 손을 대어 잡았습니다. 그래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 즉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칼을 도로 집어넣어라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시고는 그 사람의 귀를 만져 낫게 해주십니다. 그리고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그 순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제자들 모두가 얼떨결에 그 자리를 피해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여간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마음으로는 다 내가 먼저 도망친 것은 아니라고 하고 싶었겠죠. 하지만 예수를 버리고 도망친 것만은 사실입니다. 지난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감동받은 적도 많았고 가슴 떨리던 순간도 많았으며 얼마나 기쁘고 즐겁고 자기들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인데도 이게 정말 사실이야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하면서 감격하던 때도 많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무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많은 일을 예수님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것만 해도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있었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있었죠. 하지만 그건 얼떨결에 벌어진 일이라 그저 멍했을 뿐이었지만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무덤 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실 때만 해도 왜 이러실까 싶어 말리고만 싶었는데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드리고 난 다음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외치시는 순간 나사로가 온 몸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때의 감동과 감격은 도무지 말로는 설명할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거기다가 예루살렘으로 오르실 때 비록 예수님이 어린 나귀 새끼를 타기는 했지만 그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맞이하고 뒤따르며 호산나 호산나 외치는데 자기들도 덩달아 신이 나서 함께 호산나 호산나 외쳐댔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이 서로 손을 마주치는 하이 화이브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한 마디로 “와우”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예수님이 나는 붙잡히게 되고 고난을 받고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은 하셨지만 그게 그냥 하는 말인 줄만 알았지 실제 벌어질 일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막상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와서 예수님을 붙잡는데 그만 정신이 다 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 자기들도 모르게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쳐서 도망 나오고 말았습니다. 다함께 힘을 합쳐서 대적하면 어찌어찌 그들을 물리칠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걸 예수님이 막으십니다. 그렇다면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우선은 잠시 자리를 피했다가 다시 기회를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것도 나중 이야기지 그때는 뭐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 지라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베드로도 장담을 했고 다른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지만 그저 귀 너머로 흘려버렸을 뿐입니다. 그건 있을 수도 없고 결코 그렇게 되도록 가만있지 않겠다는 마음들을 모두가 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숨김없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버려요 그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지금까지 삼년 반 동안 주님과 함께 살아온 날들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하면서 지내던 날들을 생각해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데 무엇에 홀렸던 것일까요? 아무리 머리를 쥐어뜯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처럼 그 밤 자기들 모두가 주님을 버렸습니다. 다 도망을 쳤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자기들에게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미쳤지, 미쳤지 정말 우리가 미쳤지 도대체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무리 머리를 감싸 안아도 스스로 실망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그렇게 역겨울 수가 없습니다. “이게 도대체 뭡니까?”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큰 소리도 쳤었고 자신도 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고 만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소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깊은 절망입니다. 어둠입니다. 좌절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끝은 아니었습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저들에게 다시금 햇살이 비쳐드는 날이 잠시 후에 펼쳐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지만 사실이 그럴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사로 그들이 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지만 그건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한데 지금은 예수님 자신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끝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기 까지 며칠은 사실은 지옥과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숨어 지내기는 했어도 그래 맥을 놓고 널브러져 있기는 했어도 그런 자기들에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 이젠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눈물만이 앞을 가릴 뿐이었죠. 그리고 그 다음부터 그들 마음에 샘솟듯 솟아나는 기쁨은 정말 감당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좌절할 까닭이 없습니다. 왜요?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아직도 끝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위가 맹위를 떨쳐도 그 더위 때문에 오곡백과가 무르익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가장 힘든 시절을 보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기억하십시오. 아직도 끝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벌거벗은 구경꾼입니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이 구절은 여기 마가복음에만 살짝 보입니다. 마태도 누가도 요한도 그들의 복음서에 이 장면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들 누구도 이 장면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가는 이 이야기를 여기에 써놓았을까요? 그것은 그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살짝 이름은 감추어놨지만 그 날 밤 예수님이 붙잡히시던 장면은 생생하게 마가의 머릿속에 담겨졌습니다. 그래서 생생하게 묘사를 하면서 그렇게 쓸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부끄러운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기심에 따라 나선 길입니다. 잠결에 옷도 못 입고 그저 덮고 자던 홑이불을 두른 채 따라 나섰다가 주님이 붙잡히시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그런다고 벌거벗을 채 도망을 칩니까?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냥 잡혀야 됩니까? 처음부터 옷을 갖추어 입고 나왔다면 안 그래도 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 상황에서 자다가 문뜩 깨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는 이 밤중에 무슨 일인가 싶어 급한 마음에 그냥 홑이불을 둘둘 만 채로 따라나섰던 길입니다. 어찌 보면 준비성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도 아닌 구경꾼에 불과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붙잡힌다고 해서 뭐 대수는 아닙니다. 

그런데 왜 도망을 칩니까? 무언가 구린 것이 있는 것이 아닌가요? 아니요 그저 얼떨결에 그런 것뿐입니다. 아니 너는 누구야 하면서 붙잡는데 우선은 자기가 벌거벗었으니 그것도 그렇지만 아니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옷도 안 입고 홑이불만 두르고 돌아다니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이건 정말 정신 나간 놈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싼 상황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이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가슴이 덜컥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무슨 잘못이 있어서만이 아닌 얼떨결에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나도 모르게 그냥 툭 던져지는 말이나 행동들인데 그러나 그것을 보고 듣는 입장에서 보면 아니 이건 뭔가 있는 거야 싶은 마음이 들게끔 되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아무런 죄가 없다면 왜 도망쳐? 그리고 왜 벌거벗을 채 홑이불만 두르고 다니는데 라고 자꾸 물어온다면 이건 요즘 말로 성추행범으로 몰리고도 남을 상황입니다. 그래서 벌어진 해프닝이지만 그랬던 사람이 이렇게 복음서를 집필하게 될 줄은 그 당시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입니다. 그래서 역시 깨닫게 되는 것은 아직은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벌거벗은 구경꾼에 불과하지만 그 사람이 위대한 전도자요 복음서의 기록자가 될 것이라고 누군들 그 당시에 생각했었겠습니까? 그러기에 그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는 실망하지 맙시다. 오히려 더욱 격려하며 살아갑시다. 아직은 끝이 아닙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소개된 ‘실패에 맞서 싸우는 다섯 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실패’라는 단어 대신 ‘시행착오’라는 말을 사용하라. 희망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쉽게 재기한다.
둘째,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버려라. 실패를 딛고 재도전할 기회는 반드시 찾아온다.
셋째, 자신을 실패자로 비하하지 말라.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반성은 하되 비하는 말아야 한다.
넷째, 항상 실패를 맞을 준비를 하라. 인생은 깊은 수렁도 있고 넓은 초원도 있다. 
다섯째, 실패가 예견되면 빨리 단념하라. 사람들은 가끔 차선책에 대한 미련으로 최선책을 놓치는 우를 범한다.
화살은 과녁에 명중하는 것보다 빗나갈 확률이 훨씬 높죠. 큰 교훈을 안겨주는 고상한 실패가 저속한 성공보다 나은 경우도 있어요. 세상은 실패를 ‘시행착오’로 여기고 다시 일어서는 적극적인 사람들에 의해 주도됩니다.

극히 한정된 사람들만이 실패의 경험에서 인내력의 소중함을 배우게 돼요. 그들은 실패가 찾아와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곧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입니다. 
그 소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이 결국 실패를 승리로 전환시킬 수 있어요.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실패에 좌절한 채,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끝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실패를 한충 더 노력하라는 격려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어요.

이러한 사람들은 절망적인 사태에 직면했을 때에 “져서는 안 돼! 일어서야 한다.”라며 그것에 대항하는 불가사의한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힘을 굳이 부른다면 인내력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어요. 이 힘이야말로 더욱 개발하여 단련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 인내력이 없으면 어떠한 분야에 있어서도 결코 위대한 성공을 성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이젠 끝났다는 생각을 버리십시다. 끝난 것이 아닌 새로운 시작입니다. 아직은 끝이 아닙니다. 비록 지금은 다 망가진 것 같고 실패자로 끝난 것 같고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것 같아도 그렇기에 우리는 새롭게 빚어질 수 있고 주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가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그래서 또 한 번의 놀라운 역전 드라마를 펼쳐가는 삶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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