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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창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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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창 17:1-8)


1. 한국 지성(知性)의 대표라고 불리는 이어령씨는 자신의 말대로 ‘신에 대해서도 인간에 대해서도 기성의 모든 권위에 대해 거부하는 몸짓으로 살아온 무신론자’였습니다. 그가 아는 사람들로부터 ‘어쩌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 ‘나이를 많이 먹다보니 망령이 난 것 아니냐?’ ‘예수쟁이가 되었다.’ 는 등 배신자를 대하듯이 비아냥거리는 말들을 들어도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니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10:22)는 성경 말씀을 들어 대응하는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70평생 무신론자로 살아온 그를 믿음으로 인도한 사람은 바로 자신의 사랑하는 딸 민아를 통해서였습니다. 그가 세례받고 자신의 신앙을 간증한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완고한 유교 집안이었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노인정보다 그곳에서 지내시는 시간이 더 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기도하실 때면 사람들은 웃음을 참느라고 애썼지만 나는 그 기도를 들으면서 전통적인 기독교 정신은 바로 저런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기도는 언제나 우리와 가장 먼 나라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셨던 것이지요. 신문이나 방송에서 들으신 외신 뉴스가운데 보스니아처럼 전쟁을 하거나 아프리카처럼 기근으로 굶어 죽어가는 어린이들이나 우리는 관심조차 갖지 않은 지역에서 일어난 태풍이나 홍수로 가족을 잃은 난민들을 보살펴 주시라는 기도였던 것이지요. 그

긴 기도의 끝에 이르러서야 겨우 한국과 우리 가족을 위한 기도를 하셨는데 그것도 아주 작고 멋쩍은 소리로 혹시 남은 복이 있으시면 우리 식구들, 어린 손자들에게도 좀 나눠 줍시사라고 끝을 맺으십니다. 자기 애들한테는 보리밥 먹이고 모르는 손님한테는 쌀밥을 내놓는 마지막 한국인이셨는지도 모릅니다. 정말 아버지는 자기 가족보다도 이웃사람들을 먼저 생각하시는 분이었지요. 예수님을 영접하기 이전부터 이웃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던 분입니다. 

6.25 피난길에서도 남의 밭을 밟지 않으시려고 먼 길로 돌아오시는 바람에 우리는 오랫동안 가슴을 졸이며 아버지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그 고독한 빈자리를 대신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천한 노예처럼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이럴 때 가끔 미국에 살고 있는 딸 민아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처음에는 반갑다가도 전화를 한참 하다보면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요. 오랜만인데도 민아는 내 이야기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야기를 더 많이 하기 때문이지요. 국제 통화료가 싸졌다고는 하지만 민아가 하나님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하면 한 시간이 지나도 전화통을 놓지 않습니다. “야, 하나님 아버지만 아버지냐. 땅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도 있잖니.” 

이렇게 몇 번이고 긴 통화를 막고 핀잔을 주려다가 참습니다. 성경 말씀에 관한 이야기, 교회에서 QT를 한 이야기, 법정에서 소년 범죄자를 변호하고 그 소년을 회심하게 한 이야기, 등등의 이야기를 듣다가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지요. 무엇보다도 그렇게 똑똑했던 아이가 어떻게 하다가 광신적인 아줌마와 다름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지 그것이 싫었습니다. 대학 전 과목을 스트레이트 A로 그것도 영문·불문학과 복수전공을 3년 만에 마치고 조기 졸업을 한 소문난 재원이었지요. 압니다. 자식자랑을 하는 것이 삼불출의 하나라는 것을 왜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는 지금 자식자랑이 아니라 자식 흉을 보며 불평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영문학을 하겠다고 미국에 유학을 가 석사까지 마치고는 어느 날 갑자기 법대로 옮겼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 어려운 ‘바 시험’(변호사 자격시험)을 단번에 패스하여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로펌(법률회사)에 스카웃되어 변호사 일을 한다고 해서 기뻐했더니 이제는 또 좋은 직장 팽개치고는 TV드라마처럼 흉악범들과 맞서 싸우는 여검사가 되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제는 검사도 변호사도 아니라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크리스천이 되어 오로지 주님을 영접하는 일에 남은 생을 바치겠다는 겁니다. 

그래도 나는 불평을 할 수 없었지요. 불행과 절망 속에서 민아를 지켜주고 위로하며 새 삶으로 인도해 주신 분은 지상의 이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민아가 대학을 졸업하는 졸업식장이나 헌팅턴 베이의 고급주택가에서 요트를 타고 다닐 때의 행복한 장면에서만 함께 했을 뿐 혼자 아이들을 기르고 있을 때, 암에 걸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었을 때 자폐아로 아이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여 매일 밤 울고 지낼 때 대체 이 아버지는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가. 그 분은 어떤 분이시기에 지상의 아버지도 해주지 못한 그 이상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내 딸을 구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나는 의심많은 도마였습니다. 손바닥의 못 자국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회의론자였지요. 하지만 그날 밤만은 민아의 긴 전화를 통해 예수님의 야위고 파리한 손바닥에 찍힌 못자국의 상흔을 만져 볼 수 있었던 것 같았지요.?이어령씨는 어린 시절 혈육의 아버지께서 신문 방송 뉴스를 보시고 전쟁이나 기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태풍이나 홍수 등으로 가족을 잃은 난민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살펴 주시라고 기도하시던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나긴 여러 나라 민족을 위한 기도 끝에 가서야 겨우 한국과 자기 가족을 위해 아주 작고 멋쩍은 소리로 ‘혹시 남은 복이 있으시면 우리 식구들, 어린 손자들에게 좀 나눠 줍시사.’라고 기도하시던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기도, ‘혹시 남은 복이 있으시면’ 이 응답되어 자기 딸 민아가 대학을 3년 만에 졸업하는 소문난 재원(才媛)이 되어 미국 유학을 가더니 그 어렵다는 변호사 시험에 단번에 합격하여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로펌에 스카웃되었고, 그런가보다 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그만두고 흉악범들과 맞서 싸우는 여검사가 되었다기에 삼불출이 되어 자식자랑하며 기뻐했더니 이제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오로지 주님을 영접하는 일에 남은 생을 바치겠다는 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어령씨는 ‘그래도 나는 불평을 할 수 없었지요. 불행과 절망 속에서 민아를 지켜주고 위로하고 새 삶으로 인도해 주신 분은 지상의 이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딸이 암에 걸려 좌절에 빠졌을 때 이 아버지는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가. 그 분은 어떤 분이시기에 지상의 아버지도 해주지 못한 그 이상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내 딸을 구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라면서 딸 민아는 이미 혈육의 아버지를 뛰어넘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딸이 되었음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딸이 전화로 자기보다 더 많이 하나님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야속하게 느껴져 “야, 하나님 아버지만 아버지냐. 땅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도 있잖니.” 라고 핀잔을 주고 싶었지만 혈육의 아버지의 한계를 느끼고 자신도 결국 딸과 아버지의 기도의 열매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2.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나이 99세에 나타나셔서 “너는 열국의 아비(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흑인종, 황인종, 백인종 가릴 것 없이 모든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본래 ‘아브람’은 노아의 세 아들, 셈과 야벳, 그리고 함 중 첫째 아들인 ‘셈’의 10대 손인 셈족입니다. 홍수 심판 후 노아가 이들 세 아들들에게 축복하기를 “(창9:25-27) 가나안(함)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함)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함)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 했습니다. ‘가나안’(함)에 대한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어 가나안의 후손 중 기브온 족은 여호수아 시대에 셈족인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가장 비천한 종의 형태로 전락되었습니다.

(수9:23)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리라

그 후 나머지 함의 후손들은 솔로몬 시대에 완전 정복당했습니다. 

(왕상9:20-21) 무릇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남아있는 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다 멸하지 못하므로 그 땅에 남아 있는 그 자손들을 솔로몬이 노예로 역군을 삼아 오늘까지 이르렀으되

그리고 야벳에 대한 예언 ‘창대케 하사’는 ‘넓은 공간을 주사’(extend the territory of Japheth) 라는 뜻으로 영토와 인구 면에서 그리고 문화와 문명 등에서 가장 뛰어나 그 영향력이 널리 미칠 것을 말합니다. 이 예언 그대로 오늘날 서구의 문화와 문명 대부분이 야벳의 후손들에 의해 이룩되었습니다. ‘셈’에 대한 축복은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는 말로 시작합니다. 축복의 근원,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셈에게 축복 베푸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과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셈 족의 신앙을 통해 함과 야벳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함이나 야벳이나 모든 인류가 셈 족의 하나님을 통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온 인류가 셈의 후손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함의 후손이든 야벳의 후손이든 누구를 막론하고 오직 셈족의 후손으로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계보)를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마1:1-17)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 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 한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아브라함에서 시작됩니다. 셈에 대한 노아의 축복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창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는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유대인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거슬러 올라가 노아가 예언한대로 셈의 하나님을 통해 함과 야벳의 후손들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오늘 본문에서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며 다시 한 번 믿음으로 통해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복을 받게 될 것, 다시 말해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라고 합니까? 그 두 사람이 서양 음악의 기본 골격을 완성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겁니다. 그 두 사람으로 인해 서양 음악이 태어난 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들이 바로 음악의 ‘부모’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열국의 아비’가 되는 믿음의 골격을 아브람을 통해 세우신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증언했습니다.

(갈3:6-9)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리라.” 말씀, 즉 “열국의 아비”가 되려면 아들이 태어나야만 하는데 아브람이 하나님 말씀에 따라 하란을 떠나온 지 25년이 지났음에도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아주 절망적이었습니다.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심을 받은 때가 75세였습니다. 그 당시에도 아브람은 10살 연하의 사래와 사이에 자식이 없었습니다. 요즈음처럼 의도적으로 낳지 아니한 것이 아니라 이미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나이를 훌쩍 넘도록 무자식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도저히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택하셔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손에 대한 소식이 감감해지자 아브람은 “큰 민족”에 대한 축복이 자신의 충성스러운 종, 엘리에셀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엘리에셀은 자식만큼 신뢰를 받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는 말씀하시고 아브람을 이끌어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러나 아브람은 이후로도 상당기간 사래가 임신을 하지 못했고, 한해 두해 시간이 갈수록 혹시나 하고 일말의 기대를 갖았던 아내 사래는 완전히 실망해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 약속하셨던 것이 사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드디어 인간적인 꼼수를 두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여종,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는 방법이었습니다. 일종의 씨받이지만,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하갈은 아브람과 완전히 관계없는 자가 아니라 부인의 종이며, 분명히 아브람의 피가 섞인 아이로 태어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아내 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어찌 보면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던 아브람의 믿음이 약해졌음을 말합니다. 결국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을 낳게 되었습니다. 당시 아브람의 나이 86세, 사래의 나이 76세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아이, ‘이스마엘’은 여호와께서 애초에 약속하셨던 약속의 자식이 아니었습니다. 사래와 아브람의 방법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인간적인 해석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는 결코 의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13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3. 오늘 본문 말씀대로 아브람의 나이 99세, 사래의 나이 89세가 되었습니다. 후손에 대한 소망이 완전히 단절된 절망적인 상황을 나타내는 나이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아브람과 사래가 자신들의 나이로 볼 때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의 나이를 불문하고 자연법칙을 초월해서 약속하신 바를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그 나이에도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아브람을 “열국의 아비”, 사래를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할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난 날처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아니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취하여 사래의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를 다시는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창17: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이를 위해 이름을, ‘열국의 아비’라는 뜻을 가진 ‘아브라함’으로 개명(改名)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불렸던 ‘아브람’은 ‘높으신 아버지’(exalted father)라는 뜻입니다. 한 가정에서 존경받는 아버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가정에서 존경받는 아버지에서 ‘열국의 아비’로 존경받도록 하기 위해 ‘아브라함’으로 개명하신 것입니다. 

이제 한 가정에서 영향력을 가진 아버지로 머물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영향력을 가진 아버지가 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조상에서 예수 믿는 모든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이 유대인을 넘어 예수 믿는 모든 사람에게도 이루어지게 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과연 처음에 약속하신 말씀,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는 말씀을 성취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혈육에 국한 되는 축복, 자기 핏줄, 자기 가문의 축복만을 위한 존재에서 이웃 모든 사람의 축복을 위한 존재, ‘열국의 아비’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웃의 모든 사람을 내 가족처럼 여기고 믿음을 통해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축복을 베풀어줄 수 있는 ‘열국의 아비’가 되라는 것입니다. 혈연이나 지연 등에 매이지 말고 모든 이웃들에게 축복을 미치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한 평생 자기 가족만을 위해 살지 말고 다른 가족들에게도 축복을 나눠줄 수 있는 ‘열국의 아비’가 되라는 것입니다. 축복의 지경을 한 가족에서 모든 가족으로 넓혀서 살라는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만의 이기주의(利己主義) 삶에서 모든 이웃들을 위한 이타주의(利他主義)의 삶으로 변화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하나님의 집으로 여기며 세상에 모든 민족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며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으로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열국의 아비’가 되라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기 위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그리고 ‘사래’를 “열국의 어미”라는 ‘사라’로 개명해 주신 다음 얼마 가지 않아서 사라가 잉태하여 ‘이삭’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약속의 자손’입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합작해서 몸종 하갈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은 그냥 ‘여종의 아들’이며 약속 밖의 자식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낳은 약속의 자녀입니다.(갈4:21-31) 이 언약은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과도 세워지는 영원한 언약입니다. 오늘 본문 7-8을 보겠습니다. 

(창17:7-8)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에게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모든 사람과 언약을 세워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하며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이 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되시고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에 대해 설명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의 육체는 썩어 흙이 된 지 오래지만 그 영혼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실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 마태복음17:1-3을 보겠습니다.

(마17:1-3)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구약시대의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된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말씀하시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또한 ‘부자와 거지’의 사후(死後) 모습을 통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16:19-31 내용입니다. <한 부자가 죽어 지옥에 갔는데 그 부잣집에서 구걸하며 살던 거지 나사로도 같은 날 죽어 천국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보니까 생전에 자기 집에서 구걸하던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천국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자가 아브라함과 나사로를 바라보며 간청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그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는 분명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대인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 부자는 아브라함의 자손됨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처럼(마 3:9) 혈통적 특권에 의지하여 긍휼을 얻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혈육으로만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부자의 간청에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느니라.” 아브라함이 “얘” 즉 ‘아들아’라고 부름으로써 그 자손됨을 시인(是認)하였지만, 선택된 민족이라고 하는 유대인만의 특권이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치로는 인정되지 않음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 부자는 재물만을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무관심한 죄 때문에, 즉 믿음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정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신 것처럼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영원한 아버지 하나님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시고 아브라함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약2:20-26) 

성도 여러분의 믿음이 이웃 모든 사람의 축복으로 나타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의 살아있는 믿음과 전도가 이웃 모든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의 축복으로 나타나도록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로 쓰임받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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