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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의 승리 (왕하 6: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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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승리 (왕하 6:8-23) 
 

몇 년 전에 프랑스 미술 협회에서 프랜시스 모드런이라는 사람이 최고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상을 받으러 나왔을 때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의 양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고로 양손을 잃은 그는 두 팔에 나무를 묶어놓고 그림을 그리는데, 그 그림이 기가 막힌답니다. 양손이 없는 사람이 최고상을 받으니 모두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는데, 인터뷰 중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손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호흡이 끊어질 때까지 나는 이 나무손으로 최선을 다해 인생의 아름다움을 그려 나갈 것입니다.” 두 손이 없어도 ‘나는 할 수 있다.’ 하며 최선을 다하니 프랑스 최고의 화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셔도 ‘나는 할 수 있다.’라고 하는 사람은 남다른 일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데 우리가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실 만큼 우리는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노력한다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기적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신비한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웃 나라인 아람의 왕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작전을 세우면 엘리사가 신기하게도 그것을 알아버립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아람 군대가 나아오는 곳을 알려주어 방비하게 하니 아람의 공격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아람의 왕은 자기 신하 중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왕의 오해를 알게 된 한 신하가 엘리사 이야기를 합니다. “이스라엘에 엘리사라는 사람이 있는데 왕이 침실에서 한 이야기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엘리사를 잡아야 겠구나. 그 엘리사라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가 그를 먼저 잡자”, “예, 요즘 도단 성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람의 왕은 많은 군사를 도단성에 보내서 도단성을 포위하게 합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갔다가 도단성을 에워싸고 있는 아람 군대를 보고 놀라서 엘리사에게 그 사실을 알립니다. 

그 말을 들은 엘리사가 사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라고 말하고는 하나님께 사환의 눈이 열리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응답 되어 사환의 눈이 열립니다. 그가 보니 아람 군대 보다 더 많은 천군천사들이 아람 군대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다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 무리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말대로 아람 군대의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엘리사가 눈이 어두원진 아람 군대에게 “여기는 여러분이 찾는 그 곳이 아니요 내가 인도하겠으니 나를 따르시오.”라고 말합니다. 엘리사는 자기를 따르는 아람 군대를 사마리아 성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엘리사를 죽이려고 도단성을 포위 했던 아람 군대가 이제는 이스라엘 군대에게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원수인 아람군대를 진멸할 기회가 왔으나 엘리사에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묻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엘리사가 대답합니다.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을 돌려보내십시오” 그래서 왕이 원수 아람 군대에게 음식을 많이 베풀어 풍성한 대접을 한 후 돌려보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몇 가지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이 큰 복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던 것이 큰 복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람은 이스라엘 보다 월등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람과 싸운다면 패할 수밖에 없는 전력이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있었습니다. 엘리가가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주를 불러오는 사람이 있고 복을 불러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복을 불러오기를 바랍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 배는 요나를 태웠기 때문에 대풍을 만나게 되고 거의 파선의 위기까지 갔습니다. 요나가 자기 때문에 배와 사공들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자기를 바다에 던지게 합니다. 요나가 배에서 나가니 그 배를 삼키려고 했던 대풍이 잠잠하게 됩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지만 자기가 탄 배에 저주를 불러오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의 배에 요나가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사업의 배에 요나가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큰 죄를 짓지 않았어도 여러분의 배에 요나가 탔다면 여러분도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한 집사님 집에 심방을 갔더니 집사님께서 “목사님, 참 희한한 일이 있습니다.”라고 하시며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집사님의 앞집에 정신이 조금 이상한 남자분이 이사를 왔는데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같은 노래만 부른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들려오는 ‘타향살이 몇 해던고’라는 노랫소리 때문에 집사님이 스트레스가 쌓여 얼마나 힘든지 몰랐답니다. 

그래서 ‘어쩌다 우리 앞집에 저런 이상한 남자가 이사 와서 이렇게 어렵게 하나?’하며 불평했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집사님이 자기도 모르게 ‘타향살이 몇 해던고’하면서 같이 그 노래를 부르고 있더랍니다. 빨래하면서도 ‘타향살이……’ 하고 있더랍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사람 10명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소돔의 멸망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의 멸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듣자마자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립니다. “하나님, 소돔 성에 의인 50명이 있는데도 멸망시키시겠습니까?”, “아니, 의인 50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 “그럼 45인이 있으면요?”, “45인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을게”, “그럼 40명은요?”, “의인 40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의인 30명이 있으면요?”, “30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만약 의인 20명은요?”, “20명만 있어도 살려주마”,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인 1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 의인 10명만 있어도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돔성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유황불로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소돔성에 의인이 10명만 있었어도 그 성이 그렇게 비참하게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셔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그가 가는 곳에는 하나님의 복이 임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 보디발의 집은 요셉을 형통케 하신 하나님의 역사로 풍성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창 39:5에 보면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고 말씀합니다. 요셉 때문에 보디발이 복을 받은 것입니다. 보디발이 그것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나는 어떤 상태라고 생각합니까? 요나처럼 풍랑을 몰고 오는 사람은 아닙니까? 요셉처럼 복을 몰고 오는 사람입니까? 요셉처럼 복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이 나라에 믿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믿지 않는 네티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비하시키지만 이 나라에 믿음의 사람들이 있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큰 복입니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사실은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이 나라의 국력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는 것도 복입니다. 잠 27:17을 보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사귀느냐에 따라서 내 얼굴에서 나가는 광채가 달라집니다. 의인과 사귀면 여러분의 얼굴은 햇빛처럼 빛나게 될 것이지만 악인과 사귀면 여러분의 얼굴빛은 사망의 빛으로 가득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옛말에 “봉생마중이면 불구이자직 (縫生麻中而 不嘔而自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쑥 하나도 길가에서 자라면 제멋대로 구부러지지만 삼밭에서 자란 쑥은 삼처럼 덩달아 곧게 자란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의인들과 사귐으로 하나님의 복을 넘치게 받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에 순종하므로 승리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아람 군대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영감으로 받은 말씀에 순종하므로 번번이 아람의 공격을 대비하고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혜의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항상 우리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받아 살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첫 번째 만난 성이 여리고 성입니다. 여리고는 견고한 성이라 이스라엘의 전력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단 7일 만에 아주 가볍게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받았고 그 지혜대로 행했더니 여리고가 무너졌습니다. 여호수아가 받은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이었습니까?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앞서고 백성들은 그 뒤를 따라서 여리고를 돌라는 것입니다. 

첫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칠일 째는 일곱 바퀴를 돌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작전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바라보면 미련하기 짝이 없는 방법입니다. 여리고가 얼마나 견고한 성인데 열세 바퀴를 돈다고 무너집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그 방법을 말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여리고는 무너졌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지혜로 살면 반드시 승리하고 성공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울이 아말렉과 전쟁하고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고 승리 후에는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왜 애를 써서 싸워 이겼는데 모든 것을 진멸합니까? 사람들은 종을 삼으면 될 것이고, 짐승들은 살려두면 양식으로 삼을 수도 있고, 소는 밭일을 하는데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고, 양은 젖을 짜서 먹을 수도 있는데 무엇 때문에 진멸합니까? 사울 왕이 아마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따르지 않고 자기의 지혜를 따라 행합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고 비참한 인생을 살다가 전쟁터에서 두 아들과 함께 같은 날 전사하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너무 피곤해서 자리에 누워 주무시는데 얼굴에 무언가 자꾸 부딪치는 느낌이 들어서 눈을 떠보니 9개월 된 외손자가 자기 얼굴을 목사님 얼굴에 부비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자는 척하고 가만히 있었더니 얼굴을 부비던 아이가 다른 곳으로 기어가서 자기 혼자 놀았습니다. 그러다 2-3분 후에 또 와서 목사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부볐습니다. 그리고는 기어가서 놀다가 또 와서 얼굴을 부비곤 했습니다. 

일곱 여덟 번, 계속해서 반복했습니다. 혼자 놀다가도 할아버지가 있으니 안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아이가 예쁜 짓을 하니 목사님이 그 아이의 예쁘고 귀여운 모습에 홀딱 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 아이를 위해서는 내가 못할 일이 없겠고, 아낄 것이 없겠다.’ 싶더랍니다. 

그때 목사님이 ‘바로 이거다!’ 하고 깨달았습니다. 내가 회사에서 일하다가 하나님께 다가가 하나님 얼굴에 내 얼굴을 부비고, 부엌에서 설거지하다가 잠시 쉬는 사이에 내 얼굴을 하나님 얼굴에 부비고, 공부하다가도 하나님 얼굴에 내 얼굴을 부비고, 범사에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귀여워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안심하고, 또 하나님 때문에 안심하고 하나님께 자꾸만 부벼 대면 하나님의 귀염둥이가 될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손자를 귀여워하듯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여워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귀염둥이 손자처럼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좋아하고 찾기만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좋아하시는데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대로 산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해주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자꾸만 물어보세요. “하나님, 이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건 해야 하나요 하지 말아야 하나요? 하나님, 저는 지혜가 부족해요 지혜를 주세요. 가르쳐주세요.”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대로 행한다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예뻐하시겠습니까!

3. 하나님은 믿는 사람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담대 합시다. 

아람군대는 도단성에 있는 엘리사를 잡기 위해서 도단성을 포위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기도하니 사환의 눈이 열리고 사환의 눈이 열려서 보니 아람 군대보다 더 많은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람 군대보다 더 강력한 하늘의 군대를 보내셔서 엘리사를 보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죤·C·패톤 선교사의 간증입니다. 

선교지에 가서 거주하며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그런데 원주민들이 쉽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경계의 눈빛을 가지고 지켜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원주민 한 떼가 선교사의 집을 포위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 선교사 때문에 부정 타서 마을에 저주가 임할 거라고 오해를 한 겁니다. 그들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집을 둘러싸고 불을 지르려고 합니다. 그 광경을 보고 선교사 부부는 공포에 질렸고,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기도하는데 사방이 조용해졌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무서워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밤새 기도했습니다. 아침이 밝아오자 선교사 부부는 조심스레 밖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살기등등했던 원주민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문을 몰랐지만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후로 원주민들이 해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원주민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1년쯤 지난 후에는 마침내 추장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조금 친해지자 추장에게 예전의 일에 대해 물었습니다. “왜 그때 집에 불을 지르고 우리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오히려 추장이 놀라며 되묻는 것이었습니다. “당신 집 주위에 보초 서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그때 저의 집에는 저와 제 아내 둘 밖에 없었는데 ... ” “그래요? 그때 당신 집 주위에 수백 명쯤 되는 건장한 사람들이 빛나는 옷을 입고 지켰는데 ... 하긴 그 후 그들이 없어져서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죠.” 그 말은 들은 선교사 부부는 그때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주셨음을 깨닫고 새삼 감격하며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경산에서 열차 사고가 났을 때의 일입니다. 모 권사님이 딸네 집에 다녀오시면서 손녀를 데리고 기차에 타셨는데 손녀가 갑자기 칭얼대며 “할머니, 할머니. 앞으로 가요.”라고 했습니다. 권사님이 “얘야, 여기가 우리 자리다.”라고 하는데도 손녀가 막무가내로 권사님을 끌고 앞으로 갔습니다. 아이에게 못 이겨 앞차로 옮기자마자 열차가 탈선하여 처박혔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은 앞 칸으로 옮긴 덕분에 무사했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압니까? 하나님께서 아이를 통하여 그 권사님을 구원하신 줄 믿습니다.

한상동 목사님이라는 아주 귀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를 기록한 책을 보면 기적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어떤 도둑이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시는 목사님을 보고 돈 많은 부자인 줄 알았습니다. 양복을 입은 신사가 가방을 들고 걸어가니 돈을 많이 가지고 가는 줄 알고 목사님을 따라가다가 으슥한 길이 나오자 앞질러 가서 숨었습니다. 목사님이 그곳에 도착하면 목사님의 가방을 빼앗으려 했던 것입니다. 도둑이 목사님을 덮치려 하는데, 신비로운 빛이 나는 어떤 사람이 목사님 뒤에서 목사님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걸어가시지만 도둑은 그것을 보고 놀라서 목사님을 덮치지도 못하고 목사님 뒤만 따라갔습니다. 으슥한 길이 끝나니 신비로운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희한한 광경에 놀란 도둑은 ‘도대체 이 사람이 무엇 하는 사람인가?’하고 끝까지 목사님을 따라갔습니다. 목사님이 교회로 들어가니 도둑도 교회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도둑이 그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도둑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자기가 본 광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회개를 했답니다. 하나님께서 한상동 목사님을 천사로 보호해주신 줄로 믿습니다. 

저도 개인적인 체험이 있습니다. 풍납동에 개척해서 전도사로 사역을 할 때였습니다. 그 때는 자동차가 없어서 자전거로 교회를 오갔습니다. 한번은 풍납동에서 성내동 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제 머리 몇 m 위에 천사들이 저와 같은 속도로 이동을 하는 모습을 본 일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 천사들은 저를 보호하는 수호천사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시 91:4에 보면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방패와 손방패가 되신다는 말은 그분이 보호자가 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4. 원수를 사랑합시다. 

아람 군대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물론 엘리사의 영감으로 그들을 다 막아냈지만 이스라엘의 원수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번에는 엘리사를 잡기 위해서 도단성을 포위했다가 사마리아성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스라엘 군대에 포위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원수들을 엘리사는 어떻게 대했습니까? 일반적으로 그런 경우라면 그들을 몽땅 죽여야 하는데 엘리사는 오히려 그들에게 떡과 물을 주게 하고 그들의 나라로 돌려보내어줍니다. 

구약 시대는 율법시대입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아주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원수들을 사랑으로 대접해서 보냅니다. 그는 시대를 초월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일 4:8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을 떠나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요 3:16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 받을 조건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롬 5:8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사람 중에는 자기 속에는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건 잘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롬 5:5에 보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랑을 선택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원수를 만나게 되면 자신 속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면서 사랑하라고 할 것이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원수를 미워하고 공격하라고 할 것입니다. 이 때 성령을 따르면 원수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을 따르면 원수를 미워하고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터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터키인들은 그 곳에 살고 있는 알루메니아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터키인이 알루메니아 인이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가서 마구 학살할 때였습니다. 남매가 살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오빠를 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죽이려고 하는 데 동생이 겨우 도망쳐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이 동생의 직업은 간호사였습니다. 수개월이 지났습니다. 병원에 한 환자가 들어 왔는데 얼굴에 부상을 당하여서 얼굴이 누구인지 알아 볼 수도 없었고 형편이 없었습니다. 

그 간호사는 정성을 다 하여 치료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환자의 얼굴을 보니까 자기 오빠를 죽인 사람이었습니다. 그 간호사의 마음에서는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간호사가 치료를 포기하면 그 삶이 죽게 될 것인데 한족 마음에서는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고 다른 마음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 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갈등 속에서 간호사는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내가 이 사람을 죽여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간호사는 갈등을 이기고 이 사람을 잘 치료하여 주었습니다. 

정성을 다 했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이 사람이 회복되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을 뜨고 자기를 그 동안에 치료하여 준 간호사를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자기가 죽이려던 여자였습니다. 그는 간호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오빠가 수개월 전에 죽었지요?”, “예”, “누가 죽였는지 아십니까?”, “예. 알지요.”, “누가 죽였습니까?”, “바로 당신이 죽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를 이렇게 정성껏 치료시켜 주었습니까?”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독한 마음을 먹었었지요.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더 열심히 치료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지금 이렇게 나은 것을 보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터키인은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믿는 기독교가 이와 같은 것이라면 나도 이제부터 예수를 믿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성령께서 와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따라서 원수를 대하면 안 됩니다. 우리 속에 부어진 주님의 사랑을 선택하고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승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늘 승리하시며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들을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승리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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