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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닭이 달걀보다 먼저인 이유 (시 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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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달걀보다 먼저인 이유 (시 24:1-6) 
 
 
얼마 전 신문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해묵은 논쟁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는 재미있는 내용이 실렸습니다. 온라인 과학전문 매체인 유레카얼러트(www.eurekalert.org)에 따르면 영국 <워위크대>와 <셰필드대> 과학자들은 닭의 난소에 존재하는 <오보클레디딘-17>이라는 단백질이 <탄산칼슘>을 결정체로 전환해 달걀 껍데기를 만드는 것을 규명했다고 합니다. 닭의 난소에 존재하는 이 단백질이 없으면 달걀이 만들어질 수 없으니, 결국 닭이 있기 때문에 달걀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닭이 달걀보다 먼저라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도 아닌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저는 성경을 보고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20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가 날으라>고 하셨지, 새 알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닭도 새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닭을 먼저 만드셨지요. 달걀은 그 다음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이야기가 중요할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근원을 생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달걀의 근원은 닭입니다. 그렇다면 닭은 어디서 왔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닭의 근원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의 근원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도, 바다와 땅도, 그 안의 모든 나무와 풀들도, 짐승도, 그리고 우리 각자도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토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선 그것은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선언합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구절을 대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냐?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당신 마음대로 하신다는 뜻이냐? 기분이 별로다>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씀을 소유의 개념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돌봄과 보호>의 개념으로 읽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든 주인을 잘 만나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동차가 주인을 잘 만나면 늘 깨끗합니다. 손질을 잘해서 언제나 잘 달립니다. 그러나 주인을 잘못 만나면 차가 늘 더럽고 부품도 제때 갈지 않아서 엉망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우리의 자유가 없어지고, 우리가 종처럼 속박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큰 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지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로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보호하시는데, 그 절정은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서 빠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모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로서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자녀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과 같습니다. 부모님이 낳았기에 자식을 사랑하듯이, 하나님도 당신께서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기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요, 우리가 그 분의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평생 살아가면서 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 존재는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우리도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위대한 작품인 <기독교강요> 첫 부분에서 이 사실을 잘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강요>의 제 1권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인데, 제1권 제 1장의 제목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은 연결되어 있다. 그것들은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가>입니다. 그는 인간이 누구인가를 알려면 반드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1장의 제2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도 없다>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알아도 자신을 모른다면 인생을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값어치, 자신의 존엄성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조금만 어려우면 자살을 기도합니다. 그런가하면 자신의 한계를 잘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고만장하여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르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6장 3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성공적인 인생의 비결도 알게 됩니다. 앞에서도 자동차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자동차를 오래도록 잘 쓰는 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동차 사용설명서대로 자동차를 운전해야 합니다. 부품은 정품을 사용하고, 규정대로 운전을 해야 차가 오래 갈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생 사용설명서>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3-4절을 보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 그 거룩한 곳에 우뚝 서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려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매뉴얼, 인생 사용설명서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아름답고 견고한 삶을 살게 되길 기원합니다. 

또 살아 가다가 잘못되어 삶이 망가지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 때는 자동차가 고장났을 때처럼 해야 합니다. 자동차가 고장났을 때 길가는 아무나 붙잡고 고쳐 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자동차를 제조한 회사에 문의하고, 지정수리공장에 수리를 맡겨야 합니다. 고장난 인생은 하나님께 수리를 맡겨야 합니다. 

부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정 부품을 사용해야 합니다. 가짜를 사용하면 큰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도 많은 부품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인생에 꼭 필요한 부품 중 하나가 평안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가짜 평안이 많습니다. 예수님도 이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순정품 평안과 세상이 주는 가짜 평안이 언급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가짜입니다. 그것을 품고 살면 얼마 못 가서 인생이 고장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을 끼우면 고단한 인생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고백하길 <아버지, 당신의 품에서 안식하기까지는 참 평안을 몰랐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가짜 평안을 찾아다녔습니다. 세상의 가짜 기쁨,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의 인생을 깊은 골짜기로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품에서 비로소 평안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께서 칠십 세가 넘어 지성에서 영성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그 분이 비로소 순정 부품들을 영혼에 끼우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짜에 속지 마십시오. 기쁨, 위로, 평안, 능력, 인생의 목적, 사랑, 등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순정 부품으로 채우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복된 삶을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야 하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5-6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족속,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복을 얻고, 구원의 의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만 향하여 걸어가십시오. 하나님만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지 마십시오. 어떤 목사님이 교인과 상담을 했습니다. 그 교인은 돈에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돈 되는 일이라면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웃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원에서 당뇨가 심하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께서 보리밥 조금과 두부 반 모씩만 먹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병원 문을 나서면서 <남은 생애 동안 보리밥 조금과 두부 반 모만 먹고 살 것인데, 내가 이를 위해 이렇게 살아왔나>하는 후회와 함께 울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향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입니다. 회개란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입니다. 순례란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가는 과정입니다. 그 순례의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늘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시편 24편은 아무런 설명이 붙어 있지 않은 시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이기는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 지어진 시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이 시는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성에 모셔 올릴 때 불렀던 노래로 보고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궤는 실로의 성막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과의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들은 언약궤를 전쟁터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러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은 패했고, 엘리의 두 아들은 전사했고,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이로 인한 충격으로 엘리 제사장도 죽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진노하셔서 재앙을 내리셨고,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그 후 언약궤는 사람들에게 잊혀진 채로 기럇여아림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언약궤는 사울 왕 당시에도 방치되어 있었는데, 다윗이 왕이 된 후에서야 비로소 기억하게 됩니다. 다윗은 여부스 사람에게서 빼앗은 다윗성, 즉 오늘의 예루살렘에 자리를 준비하고 언약궤를 메어 올리게 됩니다. 그 날 다윗은 너무 기뻐서 백성들과 함께 춤을 추면서 언약궤를 모셔 올렸습니다. 

언약궤를 모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는 의미였습니다. 언약궤를 모시는 것은 다윗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려서 사무엘로부터 왕이 되라는 소명을 받은 후로부터 시작해서 무수한 전쟁터를 통과하면서, 사울 왕의 칼을 피해 다니면서 매 순간 마다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그가 의지한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셨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인이시고, 온갖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전 생애에 모시고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는 이 시의 후반부에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라고 노래합니다. 이제 위대하신 왕, 여호와 하나님께서 들어가려고 하시니 문들은 머리를 들어 길을 넓혀 왕을 모시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었기에 백성들은 그가 지나가려고 하면 길을 활짝 벌려 주었습니다. 다윗이 백성들에게 왕이었다면,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왕이셨습니다. 그는 문을 활짝 열어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에, 궁궐에, 가정에, 나라에 모셔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제게로 오십시오. 제게 임하여 주옵소서. 두 손을 들어 왕이신 하나님을 영접하나이다>, 이게 다윗의 고백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를 모셔들이십시오. 삶의 기초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근대 문명은 인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17세기 이후 세상은 인간의 이성을 앞세운 철학과 이성을 근간으로 한 자연과학으로 뒤덮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태어나면 예배당에 가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결혼하고 살다가 인생의 끝, 장례식도 예배당에서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나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대 전제로부터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위에서부터 시작하는 대신 아래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형태의 삶>을 추구했습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세상의 출발점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되었습니다. 근대 문명은 각 영역에서 하나님을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얼마든지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18-19세기에 과학이 발전되자 이런 꿈은 금방 실현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인류는 큰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인류는 그 믿었던 철학과 과학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낙원은커녕 오히려 그 과학의 힘으로 만든 무기가 수백만 명을 학살하는 것을 보았고, 그렇게 위대하게 보였던 철학은 인간이 가진 잔인함과 폭력성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류는 좌절했습니다. 더 이상 과학과 철학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근대 문명에 기초하여 우리나라도 과학과 경제가 발전하고 있지만, 오늘에 와서 과연 사람들은 더 바른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더 행복해졌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자살 공화국이 되었고, 이혼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문명이 가져다 주는 것은 일부의 편리함일 뿐, 결코 근원적 구원은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과학도 재대로 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제대로 된 천문학자라면 결코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광활한 우주 공간을 연구하다보면 당연히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의 능력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근원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십니다. 하나님은 존재와 생명과 복의 샘입니다. 그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동원 목사님의 <짧은 이야기, 긴 감동>이란 책에 이런 글 하나가 실려 있습니다. <조지 베브리 쉐아(Georage B. Shea)>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 보험회사 직원이었는데, 1931년 어느 날 라디오 공개방송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전 미국 사람을 매료시켰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는 평범한 보험회사 사원에서 갑자기 유명 스타가 되었고 출세와 돈이 보장된 스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기쁨보다 두려움이 더 많았고, 그는 머리 숙여 기도했습니다. 그의 어머니께서 그에게 조그마한 쪽지를 주었습니다. 종이에는 어머니가 자주 애송하던 밀러 부인의 성시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는 성시를 읽다가 감동을 받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울려나오는 멜로디를 종이에 써 내려갔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1938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그가 이 찬송을 불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박수가 끝난 후 그가 남긴 한 마디는 모든 사람들을 숙연케 했습니다. <제게 이처럼 박수를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여러분의 박수갈채와 예수 그리스도를 바꾸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모두 그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즐겨하면서, 그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하나님만 찬양하면서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더운 여름, 우리 모두에게 시원한 얼음 냉수와 같은 은혜를 내려주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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