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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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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행 3:1-10) 


현대사회를 대변하는 3가지 중요한 사상이 있습니다.  첫째는 '물질주의'입니다.  황금만능주의라고도 부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사고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배우자의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을 능력으로 꼽습니다.  아무리 인품이나 집안이나 외적인 조건이 출중해도 능력이 없으면 아예 선을 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유대관계도 재산에 좌우된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자식들이 돈 없는 부모를 찾는 일은 드물다는 것입니다.  특히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자녀의 방문 횟수가 줄어든다고 합니다.  물질주의는 교회까지도 영향을 받습니다.  어느새 교회 안에도 물량주의의 사고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큰 건물이 성공의 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작은 교회, 시골교회, 미자립교회는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교회는 오직 교회일 뿐인데 이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주의'입니다.  점점 사회가 자기중심적으로 변합니다.  남에게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내가 중요하니까 나부터 살고, 잘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어떻게 보면 좋게도 보일 수 있지만, 이젠 개인주의를 넘어 점점 이기주의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기주의는 나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피해가 가든 말든 상관이 없고, 오직 자기에게만 집중합니다.  이것이 젊음이들 사이에 급속도로 번지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에는 선조에 대해 별 관심이 없습니다.  어른이나 스승을 공경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라를 생각하는 것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옛날처럼 몸을 던지던 선조들의 모습을 찾기 매우 힘듭니다.  혹이라도 전쟁나면 어떻게 될까 염려가 됩니다.  또한 후손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낳지 않습니다.  지금은 다음세대를 외치지만, 점점 다음세대를 말하는 이들도 없어질 상황입니다.

그리고 '상대주의'입니다.  물질주의와 개인주의가 눈에 보이는 사회를 주도한다면, 상대주의는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와 신앙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젠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적인 종교가 없습니다.  불교나 모슬렘이나 기독교나 무슨 종교이든지 천국만 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에 다 구원이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에서 그토록 외치던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유일한 구세주는 없습니다.  종교를 단지 종교로 인정할 뿐, 자기가 믿는 신앙과 믿음에 절대성을 두지 않습니다.  종교다원주의가 현대인의 정신을 지배합니다.  이젠 신앙이 중심이 아니라 변방입니다.  액세서리가 되어 가고 있는 슬픈 실정입니다.

이런 때에 오늘 우리가 다시 고백합니다.  크로스비 여사가 평생 마음에 고백했던 신앙을 다짐합니다.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를 오직 내 삶의 유일한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하며 사는 자는 무엇이 다를까요?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는 갈 곳을 갑니다.  

우리가 죽으면 갈 곳이 천국이지만, 지금 살아있는 동안 날마다 갈 곳이 어디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전,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사도들의 이야기, 교회의 이야기, 무엇보다도 성령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그 중심에 있던 한 사람이 본문에 나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는 최초로 세워진 예루살렘교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오직 나의 구주로 삼고 살던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땅에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사는 자들에게 변화의 모델이 된 사람입니다.   

본문은 바로 베드로의 중요한 행적을 보여줍니다.  1절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이 말씀은 당시 예수를 구주삼고 살던 베드로가 날마다 찾은 곳이 어디인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는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곳에 올라갔습니다.  성전은 오늘날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는 교회를 찾았고, 그곳에 날마다 가서 머물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구주삼고 살던 믿음의 사람 베드로의 삶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고 갈 곳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찾았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신앙의 일번지 교회를 잊지 않았고, 교회가 그의 모든 삶에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갈 곳을 가던 순례자였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소중한 모습은 한결같이 성전중심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들이 갈 곳은 성전임을 절실히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을 꼽는다면 다윗입니다.  구약시대에 다윗만큼 하나님을 구주로 삼고 살던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면서 그의 중심은 언제나 성전이었습니다.  당시는 성전이 없었기에 정확히 말하면 성막입니다.  나라 곳곳에 만들어 논 예배처소입니다.  그는 그곳을 즐겨 찾았습니다.  왕이 성전을 찾으니까 온 백성도 함께 찾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시대야말로 성전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입니다.  이 때 비로소 성가대가 처음 조직이 되고, 매일 성전에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매번 제사마다 감격과 은혜가 넘쳤습니다.  즐겁고 평안할 때 기쁨으로 성전을 찾았고, 힘들고 어려울 때는 더욱 간절히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다윗인생에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아들의 반역입니다.  왕권이 무너질 위기를 맞았을 때 다윗은 반란군과 싸우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충신들은 강력히 싸울 것을 요청했지만 다윗은 확고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는 광경을 보면, 너무도 슬프고 참담합니다.  그런데 그가 떠나면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이 어디이겠습니까?  바로 감람산에 있었던 예배처소였습니다.  성경은 그곳을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마음에는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갈 곳을 간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엎드려 울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깊이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큰 위로를 받고, 힘을 얻습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삼는 자는 마음과 생각에서 한순간도 떠나지 않아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성전, 교회입니다.  날마다 우리가 갈 곳은 성전입니다.  특히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을 찾아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위로와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삼고, 날마다 성전을 중심으로 승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할 것을 합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삼고 갈 곳이 교회라면,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1절에 보면, 베드로가 성전에 올라간 중요한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 이유는 기도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제9시 기도시간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다고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 베드로의 기도는 보통 기도가 아닙니다.  그의 기도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기도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예전의 한가할 때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성령이 오신 이후 수천, 수만으로 늘어난 성도들과 함께 하는 그의 일상은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도를 잊지 않았습니다.  바빠서 기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빠서 기도합니다.  예수를 구주삼고 사는 자의 신실한 삶의 모습입니다.   

또한 여기 '제 구 시 기도시간'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기도시간’이라는 것에서 그는 한두 번 기도로 끝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습관이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구시’는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 구시는 오늘의 오후3시를 가리킵니다.   그 시간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시간입니다.  베드로는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 앞에 감격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기도는 실패의 극복이라는 것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데리고 겟세마네동산에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깊은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는 다음날 소녀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의 인생에 뼈저린 실패를 경험한 것입니다.  새벽닭이 울 때 그는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런 실패를 경험한 이후 사도행전에서 그는 달라집니다.  가장 큰 그의 변화는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보다도 그의 삶 우선순위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사는 자의 모습입니다.  성령과 피로서 거듭난 자의 삶입니다.  성령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할 것은 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예수를 구주로 삼고 사는 자는 반드시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성령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을 찾게 하시고, 간절히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나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며, 주님 없이 나는 안 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기도하는 자입니다.  겸손한 자는 기도합니다.  주님을 크게 보는 자는 기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 없이 나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노래가 하나 생각났습니다.  '주님 없이는 난 못살아'라는 노래입니다.  가사가 너무도 좋습니다.  '내주님 없인 난 못살아, 내 주님 없인 안 돼, 닻 없는 배처럼 흔들려, 주님 없이 난 못살아, 예수, 오 예수, 그대는 아는가, 뿌리치지 마오, 오 예수, 오 예수, 내 주님 없인 난 못살아' 

주님 없이 우리는 못삽니다.  주님 없이 난 안됩니다.  주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날마다 주님께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우리는 기도하며 사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복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크로스비 여사가 깨달은 신앙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날마다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기도할 때 주님은 그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녀의 작품 가운데 이것을 고백한 노래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이 시간'입니다.  '기도하는 이 시간 주께 무릎 꿇고, 우리 구세주 앞에 다 나아가네, 믿음으로 나가면, 주가 보살피사 크신 은혜를 주네, 거기 기쁨 있네, 기도시간에 복을 주시네, 곤한 내 마음속에 기쁨 충만하네'

여러분,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 없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주님 없이 나는 안 됩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님께 엎드려 기도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살면, 하나님은 분명 기도시간에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기쁨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셋째는 볼 것을 봅니다.  

베드로가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갈 때 눈에 들어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을 나면서 앉은뱅이고, 거지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매일 성전 미문에 나와 구걸하며 지냈습니다.  미문은 성전으로 바로 올라가는 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분주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오고가면서도 누구도 이 사람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따뜻한 말 한마디로, 다정한 미소를 보내지 않았고, 사랑의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관심이 없었고, 선뜻 필요를 건네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를 주목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여기 주목했다는 말은 '눈여겨보다, 뚫어지게 쳐다보다, 눈을 한곳에 고정시키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그를 주목합니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뭔가 인생에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예감을 받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보라고 말하는 베드로를 자기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면서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 일어났고 뛰어서서 걸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에서 성령의 강림과 함께 나타난 놀라운 첫 번째 기적은 바로 베드로의 '주목'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나의 구주로 삼고 사는 자들은 볼 것이 있습니다.  볼 것이  보이고, 보여야 합니다.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남이 듣지 못한 것을 들어야 합니다.  남이 하지 않은 것을 합니다.  거기에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크로스비 여사는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못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떠진 사람입니다.  육신으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마음이 눈으로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를 보며 살았습니다.  영안이 떠진 그녀의 삶은 누구보다도 행복했습니다.  육안은 있어도 영안이 떠지지 않아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한 사람보다 차라리 육안은 보이지 않아도 영안으로 놀라운 세계를 보면서 감격하며 살았습니다.  

그녀의 장애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감사의 조건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육체적으로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찬양을 위함이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찬양케 하기 위한 뜻이라고 믿는다. 만약 나의 육신의 눈을 떠서 세상의 것으로 장애를 받았다면 내 어찌 그토록 많은 찬송시를 쓸 수 있었으리오'  한번은 누군가 그녀에게 보기를 원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소경이어서 좋은 점은 천국에서 내가 맨 처음 볼 얼굴이 주님의 얼굴이라는 겁니다'  참 대단한 믿음입니다.  

마음으로 주님을 본 자의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보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노래에는 '본다'는 말이 참 많습니다.  육안이 아니라 영안을 떠서 보는 하나님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라는 노래에도 드러납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니 이세상에서 내영혼이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온전히 주께 맡긴 내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주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여러분, 이제 영안이 떠져야 합니다.  보일 것이 보여야 합니다.  먼저 주님을 크게 보고, 하나님의 깊은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먼 장래를 보고,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여야 합니다.  결국 예수 믿고 얼마나 보느냐가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나는 무엇을 봅니까?  나는 지금 어떤 것이 보입니까?  나는 얼마나 보지 않던 것들이 내 눈에 보입니까? 

이제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갈 곳을 가고, 할 것을 하고, 또한 볼 것을 보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날마다 승리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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