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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작 인생 (마 21:3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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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 인생(小作人生)

(마21:33-46)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1. 어느 유명 인사가 무언가 잔뜩 실린 세계 최고급 차를 끌고 천국문에 도착했습니다. 베드로가 뭘 그리 잔뜩 싣고 왔나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세상에서 그토록 소중히 모아둔 각종 값비싼 패물들과 명품들, 그리고 세상에서의 최고의 학벌을 자랑하는 여러 학위증서, 화려한 경력들을 자랑하는 이력서, 세상이 다 알아주는 각종 메달과 수상 상패 등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갈릴리 어촌 출신 베드로가 그 사람이 끌고 온 차 통째로 쓰레기 소각장에 던져버리고 그 사람의 가발을 벗겼습니다. 이마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마를 보니까 보톡스했던 것이 풀려 움푹패여서 그런지 ‘어린 양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넓은 문’으로 보내졌습니다. 천국, 하나님 나라는 오직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죄 사함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하나님 나라는 어린 양의 피로 죄 사함받아 깨끗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는 그 무엇으로도 사함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한 맺힌 삶을 살았노라며 눈물 많이 흘려도 죄를 씻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말과 뜻과 행실이 착하고 선하게 살았었노라며 아무리 힘주어 강조해도 죄를 씻지 못합니다. 인류 번영과 사회발전을 위해 온 생을 다 바쳤다 해도, 그래서 지대한 공헌과 공로를 쌓았다 해도 그것들이 자신의 죄를 씻지 못합니다. 

험한 세상에서 험악한 세월을 살았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아니하고 살았든, 긴 세월을 살았든, 너무나 아쉽게도 일찍 세상을 접었다 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십자가 피로써만 인간은 죄를 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떠한 모습으로 살았을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면 인생은 너무나 허무하고 불쌍한 것입니다. 

(계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 14:1)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2. 오늘 본문은 ‘소작농(小作農)의 비유’입니다. ‘소작’은 농토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이 남의 농토를 빌려서 농사를 짓는 일을 말하고 그와 같은 농가 또는 농민을 ‘소작농’이라고 합니다. ‘소작농’은 토지소유자에게 임대료(賃貸料)를 지불하여야 하는데, 이를 ‘소작료’라 합니다. 소작료는 논에서는 벼, 밭에서는 감자·보리·콩 등으로 납품하는데 이것을 물납(物納)소작료라 하며, 화폐로 지불하는 것을 금납(金納)소작료라 합니다. 

한국에서는 소작료를 3·7제로 실시하다가 1950년의 농지개혁으로 소작제도가 없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을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재배에서부터 추수 생산에 이르기까지 그에 필요한 온갖 시설들을 완벽하게 갖추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추수 때가 되어 소작 실과를 받기 위해 자기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소작농들이 소작료를 받으러 갔던 주인의 종들을 심하게 때려 중상을 입히기도 했고, 또 하나는 돌에 맞아 중태에 이르기도 했고, 또 하나는 아예 죽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인이 더 많은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보내는 족족 핍박하여 죽이기를 일삼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최후의 방책으로 사랑하는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주인의 아들에게는 감히 그렇게 하지 않고 존경하여 잘 대접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소작농들은 집 주인의 아들을 보고, ‘이 사람은 상속자다. 자, 죽여 버리자. 그러면 그의 유산이 우리 것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하며 주인의 재산을 몽땅 차지하기 위한 기회로 삼아 그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끌고 나가 죽여 버렸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포도원 주인이 돌아왔을 때 이 소작농들을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누구라도 분명히 대답할 것입니다. 그 악한 소작농들을 단번에 처단하고 그 포도원은 다른 소작 농부들에게 줄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소작 주인이 포도 수확에 필요한 모든 시설들은 물론 심지어 수확물 보존과 보호를 위한 망대에 이르기까지 제반 설비들을 완비하여 소작농들에게 포도원을 맡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삶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들을 맡겨주셨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하나님께서는 각각 그 재능대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긴 것처럼 모든 인생들에게 ‘소작’을 맡겼습니다. 재능만이 아니라 필요한 능력과 지혜, 보이는 물질이나 환경만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지혜와 지식 등 유무형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들입니다. 자신의 건강이나 생명도, 가정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소작농’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작 주인에게 소작료 지불하기를 거절하고 오히려 주인의 종들을 조롱하고 구타하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소작농’이 소작 주인에게 ‘소작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그 포도원과 그에 필요한 모든 시설들, 그리고 포도 수확물까지 모두가 다 주인의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포도원과 모든 수확물은 다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단지 ‘소작 인생’(小作人生)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재능, 지혜나 지식, 그리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분명하게 깨우치는 예수님의 비유를 보겠습니다. 

<어떤 부자가 농사가 풍년이 들어 엄청난 추수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에 부자는 속으로 ‘어쩌지? 이렇게 많은 수확물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다, ‘이렇게 하자. 창고를 헐고 더 크게 짓자. 그리고 내 곡식과 재산을 다 모아 거기에다 쌓아 두자.’ 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에게 말합니다. ‘잘했다. 너는 크게 성공했으니 이제 은퇴해도 좋다. 그 정도면 평생 편안히 네 인생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이제 네 인생을 즐겨라.’ 

그러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 너는 죽는다. 내가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창고에 가득찬 네 재산은 누구 것이 되겠느냐?’ 그리고 예수께서 그 비유 끝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니라.”(누12:13-21)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재물이나 재능, 자기 가정이나 자기 생명도 자기 것으로 착각하거나 망각하고 삽니다. 인생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온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욥은 자녀 7남 3녀를 둔 동방의 거부였습니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운데 하루아침에 전 재산이 약탈당하고 자녀들은 한꺼번에 압사 당하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욥은 일어나 자기 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져온 것 없었으니 죽을 때에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리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원하노라.’(욥1:1-22)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범죄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게 된 것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원하노라.’는 가치관입니다. 

자신의 모든 재산과 자신의 자녀, 가정 등 모든 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것, 하나님께서 그 소유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가치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하나님께서 도로 가져가시는데 내가 원망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모든 만물의 소유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유(萬有)의 주(主), 즉 만물의 소유권을 가지신 주인이시라고 부릅니다. 다윗 왕은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면서 이렇게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역대기상 29:11-14입니다. 

(대상29:11-14)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성도 여러분, 욥과 다윗과 같은 신앙고백으로 사는 지혜롭고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소득의 십일조는 왜 드립니까?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벌어들인 내 재산이 아니라, 내게 건강주시고 재능과 능력을 주시고 일터를 주시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내 모든 소득이 전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하는 고달프고 외로운 길에 해가 져서 누워 자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가 땅 위에서 하늘까지 닿았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닥다리 위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게 된 것입니다. 귀로 들었던 하나님께서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남김없이 다 이루어주시리라는 말씀을 듣고 야곱은 잠이 깨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며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뜻을 가진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곳 벧엘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십일조를 약속했습니다.(창28:13-22) 자신의 생사화복이 모두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십일조를 통해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십일조는 자신의 모든 소유와 소득에 대한 소유권이 모두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악한 소작농과 같습니다.

(말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그럼에도 인생들 대부분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임을 알고도 마치 자기 것인양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 앞에 ‘소작 인생’임을 깨닫고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과 재능, 소득과 생명까지도 그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잘 관리하고 사용하여 장차 하나님 앞에 설 때 풍성한 삶의 열매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던 조셉 하이든은 훌륭한 음악들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하이든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는 영감을 어디에서 얻습니까?” 하이든이 대답합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혜를 주셔서 내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음악을 주님 앞에 드릴 것입니다.’ 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가 작곡한 곡 가운데 유명한 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 창조’입니다. 성경의 창세기와 존 밀톤의 ‘실락원’에 근거해서 그는 이 위대한 ‘천지 창조’를 작곡했습니다. 이 곡이 비엔나에서 공연하게 되던 날입니다. 그때 하이든은 몸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곡이 공연될 때 그는 환자로서 뒷좌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날 지휘자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이 음악을 지휘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지휘자에게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때 지휘자는 청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뒷좌석 발코니에 앉아 있는 하이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입니다. 저 분이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돌려서 하이든을 바라보며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든이 갑자기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말합니다. “아니오.” 그는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연약함을 아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러므로 자신의 재능과 물질만이 아니라 자신의 몸, 자신의 가정 등까지 자신의 모든 것들을 잘 관리하여 하나님 앞에 설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 는 칭찬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소작 인생’을 망각하거나 착각한 소작농은 주인이 소작료를 받고자 보낸 종들을 번번히 조롱하고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주인이 최후로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면 감히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존경하며 소작료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소작농들은 오히려 주인의 아들을 죽여 버리면 주인의 재산이 ‘자기들 것’이 될 것으로 착각하고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믿지 않는다고 해서, 아예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다고 해서 주인의 것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고 주인의 재산을 통째로 먹으려했던 악한 농부들이 주인에 의해 진멸당하고 다른 농부들이 소작농이 된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열매 맺는 사람들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였다고 해서 포도원 자체가 그 농부들에게 넘어가거나 폐지되지 않습니다. 

성경 시편 118:22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처럼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여 버렸지만 그 버려진 돌이 결국 전 인류를 구원하는 교회로 세워진 것입니다. 

(시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예수께서 ‘사망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내 교회를 반석위에 세우리라.’고 말씀하신 교회를 세워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의 주인이 되셔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더욱 분명히 깨우치는 사도행전 4:11-12을 보겠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그러므로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다시 말해 교회를 통해 전파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심을 믿고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가겠지만, 예수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자는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는 것’처럼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를 듣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등 종교 지도자들은 ‘악한 농부들’이 자기들을 가리킨 것임을 알고 예수를 잡아 죽이고자 했지만 당시 여론이 무서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시 백성들은 예수를 의로운 선지자로 여기는 추세여서 백성들의 반응이 두려워 공식적인 석상에서 체포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들로 그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버리움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는 열매 맺는 백성들이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열매를 맺는 삶을 위해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5:1-8입니다.

(요15:1-8)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이 비유에서 ‘참 포도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가지’는 인생들을 의미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만 그 가지에 열매를 맺히는 것처럼 인간은 참 포도나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있어야만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참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 곧 ‘내 안에 거하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가지가 참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음같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영광스러운 삶이 되어 넉넉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사를 받았습니다.?그는 거룩한 생활과 받은바 은사로 영적인 권위와 권세가 나타나 유명해졌고, 그의 소문을 들은 황제가 그에게 가르침을 얻으려고 그를 궁전으로 불렀습니다.?그를 만나본 황제는 몹시 흡족해서 많은 금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 성도는 금으로 투자가치가 많은 상당량의 땅과 집 몇 채를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과거에도 종종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날 사람들이 귀신들린 사람을 그에게 데려왔습니다. 그 성도는 귀신에게 외쳤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떠나라!” 그랬더니 귀신이 “나는 이제부터 당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소.” 라며 떠나기는커녕 오히려 대드는 것이었습니다.?황제의 부름을 받기 전에는 한 번도 그런 경우를 당해 본 적이 없어서 무척 놀라 물었습니다. “어째서 네가 나의 말을 듣지 못하겠다는 거냐?” 귀신이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만 주신 임무를 포기함으로써 당신은 이미 우리와 같이 되었소.그러므로 당신은 나에게 명령할 힘을 잃은 것이오.” 

성도도 거액의 물질을 소유하거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소유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야만 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값으로 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만 합니다. 고린도전서6:19-20을 보겠습니다.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 성도들의 몸은 이처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살아도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하나님을 위해 죽어야만 합니다.

(롬14:7-9)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우리 인생은 ‘소작인생’임을 깨닫고 삶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사시므로 성도 여러분의 삶이 복되고 영광스럽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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