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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참 자유 (요 8: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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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자유 (요 8:32-36)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오늘은 ‘8.15 광복기념주일’임과 동시에 ‘남북 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이기도 합니다. 세계교회 협의회(WCC)의 도움으로 한국의 ‘한국기독교협의회’(NCCK)와 북한의 ‘조선그리스도연맹’의 지도자들은 은 1986년 스위스 ‘글리온’에서의 첫 만남에 이어 1988년 "제2차 한반도 평화통일 협의회" 를 갖고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해서 남북의 교회는 매년 8.15 광복절 직전 주일을 공동기도 주일로 지키며 또 이날을 위해서 공동기도문을 채택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나아가 세계의 모든 회원교회들이 이날을 함께 지켜줄 것을 세계교회 협의회에 요청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세계교회 협의회는 1989년 열린 중앙위원회에서 전 세계 회원교회가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세계 공동기도주일’ 에 동참해 줄 것을 권고하는 결의를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989년부터 매년 8.15직전 주일을 세계기독교인들과 함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도하는 주일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65년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하는 광복절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겼던 나라와 주권을 도로 찾은 것을 기념하는 국경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날은 우리 민족이 자유를 찾은 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해방과 함께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 속에 살아가면서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2:16)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값진 선물중 하나는 자유입니다. 인간은 자유 속에 있어야만 인간다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자유를 누리는 특권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영역에서입니다. 외적 환경으로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인간의 내면에는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본의 성서연구중심의 복음운동가인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면적 자유가 없는 외부적 자유란 무가치한 것이다. 비록 내가 외부적 폭압에 의한 굴복에서 벗어났다 할지라도 무지, 죄악 이기주의 공포 등의 결과로 자기 마음을 지배할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다음과 같은 사람 만이 자유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그 속에 교만 분노 태만 등이 승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힘이 없이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용기가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참 자유의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찾아야 할 내면의 자유는 무엇이 있습니까?

자기 의에서 자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자기의 의에 가두어 두고 있기에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이면 백사람모두가 자기가 틀렸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며 그렇다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옳다는 것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 옳다고 하는 것인데, 내 자신이 기준의 중심이기에 그 옳다는 것은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어떤 가치나 보람이나 즐거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가치성과 보람과 즐거움은 나 중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자기 의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의의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의가 되어야 그곳에 가치가 주어지는 것이고 그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될 때에 즐거움이고 보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기 의에서 자유로워야만 합니다.
  
오순절기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무리가 삼천이나 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직접 참여했거나, 함께 동조했거나, 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선동된 무리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당하게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예수님을 보고도 방관한 무리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의로 판단할 때에 자신들의 행한 일이 옳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을 향한 베드로의 설교의 결과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6-37)
   
설교를 들은 무리들은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서 자기들을 돌아볼 때에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의에서 자유 하도록 회개하여 하나님의 의의 자리로 돌아선 것입니다.  

  
병든 감정에서 자유
  
인간의 내면에는 감정의 영역이 있습니다. 일상생활 중에서 무시를 당하거나 상처를 입을 때에 감정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또는 관계성의 건강하지 못함과 불균형 속에서 만들어지는 조건들이 감정을 병들게 합니다.
  
이런 감정들의 형태는 “열등감, 의심, 불안, 증오, 미움, 비하시키는 판단, 저주의 감정들”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감정에서 자유하지 못하고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초대교회의 스데반 집사는 무리들을 향하여 책망의 설교를 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행7:51-53)
  
이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군중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7:53)
  
이들은 자유로워야 할 감정에서 자유하지 못함으로 스데반의 말에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그에게 일제히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스데반의 감정은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죽이는 무리를 향하여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59-60) 
병든 감정에서 자유 해야 참으로 자유로운 것입니다. 

  
사상의 편견과 노예화에서 자유
  
사상은 지식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내가 어떤 지식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지식이 그의 사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상은 선택사항입니다. 
  
사상은 아주 중요합니다. 사상은 우리에게 순종과 함께 행동화를 요구합니다. 어떻게 보면 순수하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일수로 자기의 사상에 적극적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사상에 편승하고 그 사상을 맹종하는데서 사상에 대한 편견과 노예화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자유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요즈음 ‘한 상렬’ 목사라는 분이 불법으로 입북하여 그곳에서 할 말과 안할 말 가리지 않고 해놓고, 15일인 오늘 판문점을 통하여 귀환을 하겠다고 하여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분의 기사를 읽으면서 사상의 편견과 노예화에서 자유 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사상의 편견과 노예화에서 자유 해야 모든 사상을 객관적이고 유익한  지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율법사상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그의 율법의 깊은 지식은 그에게 율법사상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상을 위해 사는 적극성과 그 사상을 따르려는 열정이 지나쳐 편견과 노예화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스데반을 돌로치는 자들의 옷을 맡아 주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는 것이 의로움이라고 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자신의 분노가 올바른 의분이고, 율법에 대한 자기사상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런 바울이 참 자유를 찾았습니다.     
  
인간의 인간됨과 위대함은 참 자유 함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참 자유함에서 하나님이 그려주시고 만들어 주시는 인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그랬고 요셉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고 바울이 그랬습니다.  
  
인간의 참 자유함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실 뿐 아니라 외적 부자유함의 역사에서 자유하게 하시고, 자유하지 못한 우리의 내면의 영역에서도 자유하게 하십니다. 바울은 이 예수님을 체험함으로 참 자유를 얻었습니다. 참 자유 함을 가짐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시고 만드시는 인생으로 이방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내면의 영역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도록 그 분이우리 안에 계시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역사는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우리 안에 거하시기도하고 성령으로 계시기도 하시며 말씀으로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바울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심으로 주시는 참 자유 함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7)
  
팔이 하나 없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처녀 때부터 20여 년 동안 팔이 없이 살았으므로 그 여인은 열등감에 젖어 살았습니다. 마음속에는 깊은 상처가 잠재해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나 길을 갈 때에 팔이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하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쳐다보거나 뒤에서 큰소리만 나도 그녀는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감사와 찬송에 관한 말씀을 듣는 중에, 팔 없는 것을 감사하고 찬송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처음으로 팔이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송을 했습니다. 그때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자기 몸을 결박하고 있던 것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후 그녀가 외출을 하려고 했을 때 위장을 하고 다니던 팔의 스카프를 풀어 버리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것만은 풀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진실로 내게 감사하였다면 위장하고 다니던 것을 풀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그 음성에 순종하여 스카프를 풀었는데 그때에 참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팔이 하나 없는 것을 인정하고 난후, 숨길 것이 없고 보니, 참 자유를 느껴서 진심으로 찬송하고 감사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불구됨을 찬송함으로써 마음속 깊은 상처가 나음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자유하지 못하면 하나님 밖의 영역에 있게 됩니다. 자유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그의 의도대로 그리시고 만들어 가시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기에 생활 속에서 거칠고 무례하며 잔인하고 위험한 행동을 주저함 없이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의 위험성을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호주 시드니의 교도소에 수감된 한 죄수가 탈옥을 꿈꿨습니다. 그는 빵 배달차가 일정한 시간 교도소에 오는 것을 눈여겨봤습니다. 그리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은밀히 그 차 안에 숨어들었습니다. 차 안은 산소가 부족해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습니다. 온몸이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면 펼쳐질 자유로운 삶을 상상하며 고통을 꾹 참아냈습니다. 이윽고 차가 멈추었습니다. 그는 주위를 살핀 후 차에서 내렸습니다. 이제는 어떤 구속도 없는 행복하고 자유스런 삶을 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배달차가 도착한 곳은 인근 교도소 구내였습니다. 그는 곧바로 붙잡혀 다시 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가 자유를 소망하며 탈출한 곳은 결국 다른 감옥이었습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적인 자유를 소유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는 다른 감옥으로 탈출하는 어리석은 죄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면의 감옥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 비로소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십시오. 예수님을 모시고 사십시오. 그럼으로 나 자신의 의에서, 병든 감정에서, 사상의 편견과 노예화에서 자유하십시오. 참 자유 함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자랑하는 인생이 만들어 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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