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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전에 지나보지 못한 길 (수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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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지나보지 못한 길 (수 3:1-6)


양주동 선생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 분이 중학교에 처음 진학했을 때 기하학이라는 수업을 보고 미리 기하학이 무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한문을 찾아봤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몇 기(幾) 자에 어찌 하(何) 그래서 한문만을 가지고는 기하학이 어떤 학문인지 알 수 없어서 기하학 첫 시간에 손을 들고 선생님께 물어봤습니다. ‘선생님, 기하학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몇 기 어찌 하, 몇 어찌라니요?’ 그랬더니 학생들이 와 웃더랍니다. 

선생님이 장난으로 물어보는 것인지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인지 먼저 확인한 다음에 그리고 설명하시기를 기하학을 영어로 Geometry라고 하는데 그것을 처음 한문으로 표기할 때 Geo라는 것을 기하로 표기해서 기하학이 되었다고 대답해 주시더랍니다. 

우리는 질문하지 말라고 배웠어요. 질문하는 것은 불손한 것이고 자칫하면 말대답하는 것이고 또 반항처럼 보일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이것이 권위주의 교육의 산물입니다. 그러다보니까 학교에서도 질문을 잘 하지 않고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도 별로 질문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첫째로 질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만일 여러분이 질문이 없으시다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또 신앙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보지 않았다는 뜻이고 또 깊은 생각이 없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질문하셨고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말씀 중에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써 하신 말씀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같으면 ‘누가 내 이웃이니이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 답변의 차원으로 하신 비유이고 ‘너희가 거듭나야 된다’는 말씀, 또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말씀도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답하는 차원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시지 못하신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하던 우리의 질문에 대해서 언짢게 생각 하신다든가 불편해 하신다든가 당황하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금하는 종교의 대표적인 예가 이슬람입니다. 이슬람은 권위주의의 극치에요. 안 믿을 자유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슬람은 나라의 법으로 믿는 것을 강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에서 다른 것을 믿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고 신앙 자체를 저버리는 것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안 믿을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것 뿐만이 아니고 질문의 지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현재 방식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열린사회 ․ 민주주의 ․ 자유 그리고 기독교입니다. 기독교 사상이 사람들에게 들어올 때 그것이 이슬람의 율법주의와 얼마나 대비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독교를 제일 두려워하고 제일 적대시하고 기독교 선교를 절대적으로 가로막으려고 합니다. 

아마 저는 여러분보다도 질문을 더 많이 하는 기독교인에 속할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answer man, 답변을 제공하는 사람이 돼야 되지만 그러나 어떻게 질문 맨이 되느냐. 제가 질문을 해야 답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묻기 전에 답변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제 자신이 성경에 대해서든 신앙의 삶에 대해서든 질문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서적에서 답변을 찾기도 하고 기도 중에 찾기도 하고 또 믿음의 선배를 통해서 찾기도 합니다. 

우리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첫째는 내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의 삶이라면 넘어가도 됩니다. 그러나 내 삶이기 때문에, 내 인생, 내 미래, 내 영혼, 내 운명, 내 구원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물어봐야 됩니다. TV 임플란트 광고에 이런 것이 있지요. ‘큰 돈 들여서 하는 건데 아무거나 할 수 있나. 꼭 물어보세요.’ 그래서 치과 의자에 앉아서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물어보지 않습니까. 자기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임플란트 하는 것이니까 제대로 하는 것인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남의 일이라면 물어보지 않습니다. 내 신앙, 내 인생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물어봐야지요. 물어보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건 그냥 이론이 아니에요. 이건 어떤 형식이 아니고 사람의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데 우리의 인생을 투자하는 것에 대해서 당연히 물어보지 않겠습니까. 이건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리스크가 있어요. 모든 믿음에는 리스크가 있습니다. 다윗이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리스크가 없다면 그건 미련한 생각입니다. 당연히 리스크가 있지요.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그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이겼기 때문에 놀란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도 당연히 큰 리스크이지요. 그 놀라운 이유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그들이 이루었다는 것에 대해서 믿음의 위대함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믿음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공통적으로 감수한 게 있다면 리스크에요. 아브라함이 나이 75세 때 새로운 길을 떠난 것도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도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이기 때문에 당연히 여기에는 위험이라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것이지요. 만약 리스크가 없다면 믿음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남의 일이라면 리스크가 없지요. 내 일, 내 영혼에 대한 것이고 내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여기에는 위험부담이라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어느 젊은 학생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한 가지만 여쭤 보겠다고, 한 가지만 대답해 달라고 그게 무엇이냐고 했더니 ‘천국이 정말 있습니까?’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천국이 정말로 있느냐. 내세가 정말로 있느냐. 사실 목사님에게 여쭤보면 안됩니다. 목사님도 가 본적이 없거든요. 가봤다면 말할 수 있지만 본인도 가 본적이 없어요. 그리고 가 본 사람 중에 돌아온 사람은 예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다 건너가고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신학이냐 고등비평이나 이런 저런 것을 따지기 이전에 한 가지 천국이 정말로 있느냐, 내세가 정말로 있느냐 여기에 대한 만족한 답변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이외의 것도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인데 만약 천국의 존재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 이외의 것을 배운들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까지는 믿겠는데 내세라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지, 성경이 천국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사실 많이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건 우리가 가 본 다음에 보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내세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말씀하시지 않았고 성경도 천국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말한 것 같지 않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실 때 그것을 약속의 땅이라고 부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부르셨지만 그 땅이 어떤 땅인지는 구체적으로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가면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땅이 있다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가는 것으로 족하고 그 땅이 과연 어떤 땅인지는 들어가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우리에게 많은 것을 불필요하게 보여주시지는 않고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만큼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하나님이 판단하시기에 필요한 만큼만 말씀하시고 그 다음은 우리가 신뢰하고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가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들이 요단강을 앞에 두고 요단강을 건너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는데 사실 이 땅에 들어가 본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밖에 없습니다. 이 이외의 사람들은 한 번도 지나보지 못한 길을 가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이 ‘너희가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어떻게 보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많은 것을 알고 많은 지식과 경험이 있고 내가 모른다는 말을 듣는 것을 자존심 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인생과 신앙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 번도 지나보지 못한 길이 분명히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천국에 가본 적이 없고 또 믿음을 우리 삶에 실천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여러분이나 저나 처음 해보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순종한다든가 또 섬긴다든가 이런 일에 있어서는 과거에 많은 경험이 있는 게 아니고 처음해보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도 지나본 적이 없는 길이에요. 남들은 지나본 적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처음인 경우가 많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첫째로 teachable, 배울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배워야 됩니다. 배울 수 있어야 됩니다.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배울 수 있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고 온유한 사람입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배울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것은 나이가 들수록 배우기를 포기하는 부분이 많이 있지요. 

제가 여러분에게 벌써 수 주째 트위터를 어떻게 받을 수 있느냐를 말씀드리지만 하시는 분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트위터를 하려면 인터넷을 해야 되고 스마트 폰이 있어야 됩니다. 제가 어떤 대학생에게 트위터를 하느냐고 했더니 트위터가 뭐에요? 젊은이도 그런 질문을 하는데 이런 것은 사실 이제 배우려면 좀 귀찮은 면이 있지요. 그러나 신앙만큼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 배우기에 나이가 너무 많다 그러면 지옥 간다는 얘기입니다. 그렇지요. 신앙만큼은 내가 배울 자신이 없다 그건 불신입니다. 불순종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한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어떻게 거듭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서 거듭날 수 있겠습니까.’ 아주 중요한 질문이지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된다’고 영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말씀하셨는데 니고데모의 질문은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어떻게 새로 시작할 수 있느냐, 어떻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느냐, 어떻게 배울 수 있느냐,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때 예수님 말씀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너에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결국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정치인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국민을 위한 정당으로 거듭나겠습니다. 제발 거듭나겠다는 말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에서 따와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자기 멋대로 거듭나겠대요. 한 번도 거듭나는 거 못 봤어요. 정치인들, 정당, 거듭나는 거 한 번도 못 봤어요. 말만 그런 식으로 하지요. 원래 거듭나는 건 사람이 자기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성령으로 거듭나야 됩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을 감동해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것처럼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하고 믿을 것이냐 믿고 이해할 것이냐를 말할 때 믿고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모든 것이 이해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한다면 영원히 기다려도 모든 것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으면 이해가 됩니다. 성 어거스틴이 말한 것입니다. 내가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고 했습니다. 믿으면 이해되는 부분이 많이 있고 믿으면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으면 더 이상 옛날에는 이런 저런 질문을 많이 했는데 믿고 나니까 많은 질문들이 사라지는 겁니다. 믿고 나니까 많은 번민이 사라져요. 그렇기 때문에 믿으면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어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천국지옥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많은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질문을 보면 몇 가지로 압축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 간다고 하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지옥에 갔다는 얘기냐, 믿을 기회가 없는데 지옥에 가면 불공평한 것 아니냐, 예수님만 믿어야 된다면 배타적인 게 아니냐, 몇 가지 질문인데 그건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인데 왜 사람이 거기에 대해서 담판을 지으려고 합니까. 그건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시고 하나님이 심판하실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게 믿을만한 기회가 있는데 이런저런 나의 고집 때문에 믿기를 거부한다면 그건 내 책임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그들이 믿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지금 그 말을 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는 불공평한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믿을 기회가 있는데 내가 내 고집 때문에 거부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불공평한 게 아니고 내가 미련한 것입니다. 중

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게 지금 믿을만한 기회를 주셨다는 것이고 그리고 내게도 이런 기회를 주셨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긍휼을 베푸신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긍휼을 베푸시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신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배울 수 있는 사람, 왜냐하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기 때문에. 

두 번째는 당연히 용기가 필요하지요. 가본 적이 없는 길이기 때문에, 해본 적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결과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리스크가 있습니다. 모든 투자는 리스크가 있습니다. 리스크가 없는 투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리스크를 완전히 없애려면 자기가 돈을 갖고 있으면 됩니다. 벽장 안에 돈을 넣어두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리스크가 더 많아집니다. 

누가 훔쳐갈 수도 있고 불이 나서 타버릴 수도 있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고민이지요. 돈이 없으면 고민이 없어요. 돈이 많아서 여기저기 투자하면 그때부터 고민이 생깁니다. 주가가 떨어졌느니, 집값이 떨어졌느니, 리스크가 없을 수 없지요. 마찬가지로 이 신앙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투자입니다. 신앙처럼 큰 투자가 없습니다. 하나님 한분 믿고 자기의 진로를 바꾸고, 하나님 한 분 믿고 직장을 바꾸고, 하나님 한 분 믿고 탐탁지 않은 사람에게 시집가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 한 분 믿고 외국으로 떠나가는 사람도 있고, 신앙으로 인해서 엄청난 투자를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지요. 그런데 결과는 하나님이 보장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의 위대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기의 필요성은 당연히 믿음의 필요성으로 연결됩니다. 위험하기 때문에 믿음 없이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결과를 하나님이 보장하십니다. 

나는 가본 적이 없지만 예수님이 가보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다’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부활하신 후에야 하실 수 있는 말씀이 기록된 것처럼 생각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말씀도 예수님이 부활 전보다는 이후에 하셨을 것 같은 말씀입니다. 또 ‘내 아버지 집에는 너희가 거할 곳이 많다’는 말씀도 부활하신 후에 하셨을 것 같은 말씀인데 아무튼 우리는 가본 적이 없지만 예수님이 가보신 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 돼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길을 보여주시는 것뿐만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길이에요.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 가는 것이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예비하신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나는 양의 문이라 나로 인하여 양들이 들어오며 나가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행할 길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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