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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에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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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에 7:1-7)


I. 일제 강점 100년

금년은 일제 강점 100년을 맞는 해입니다. 

일본의 간 나오토 총리는 지난주 “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가 가져온 많은 손해와 고통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 부터의 사죄를 표명한다”는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고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빼앗아 갔던 도서를 넘겨주겠다고도 했고 8월 15일이 되면 총리와 각료들이 2차대전 전범을 제사하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일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한일간의 앙금을 풀어보겠다는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 할 만하지만 상처를 준놈들의 마음과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은 사뭇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1910년 8월 29일 이루어진 합병조약이 불법이요 무효임을 밝히고 한국인 강제징용피해자, 위안부 문제해결, 독도문제, 왜곡된 일본역사 교과서 문제 등을 일순간에 사죄했더라면 좋았을 뻔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교만했던 일본이 최근 급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우려와 함께 한국의 위상에 대한 일본의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음은 불행 중 다행스런 일입니다. 한국은 폐허위에 세계무역 제9위 선진국을 건설해 놓았습니다. 원조를 받던 나라가 원조하는 나라로 바뀌어진 세계 유일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한국은 이제 세계 그 어떤 나라가 얕잡아 볼 나라가 아닙니다. 

2010년 8월 15일 오늘은 해방 65주년을 맞는 조국광복 감사주일입니다. 이웃 국가에 아픔을 주지도 말아야 하지만 다시는 내 조국을 빼앗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내 나라를 망하게 했던 잘못을 되돌아보고 회개하는 시간입니다.

무엇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가?
간디는 「망국론」이라는 책에서 일곱 가지 요인을 들었습니다.

① 원칙없는 정치   ② 도덕없는 상업  ③ 노동없는 부     ④ 인격없는 교육
⑤ 인간성없는 과학 ⑥ 양심없는 쾌락  ⑦ 희생없는 신앙입니다.

90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상황을 예언하고 있는 듯 하지 않습니까?
지도자들이 무능해도, 백성들이 타락해도 나라는 망합니다.

작금 한반도 주변은 구한말의 국제정세를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해방 무렵 일본 한 신앙인의 충고를 생각나게 합니다. 미국 믿지 말고, 소련에게 속지 말고, 중국 중무기로 무장하고 일본 일어난다. 조선아 조심하라!

여러분! 기독교엔 국경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겐 조국이 있습니다. 
모든 애국자가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애국자입니다. 


II. 민족의 위기를 기회로

오늘 본문 에스더서는 이스라엘 해방절인 부림절의 유래를 기록한 책입니다. 

“부림”이란 “제비뽑기”라는 뜻입니다. 제비를 뽑아 유대인을 진멸하려했던 사건이 제비가 뽑히듯 원수가 멸망한 대반전의 날입니다. 부림절은 페르샤 제국내의 모든 유대인 말살 음모로부터 최후의 순간에 극적으로 구출된 날입니다. 민족적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위기가 변하여 민족이 새로워지는 기회가 되었던 날입니다. 

신구약 66권 중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란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역사의 배후에서 역사를 운행하시는 강력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보게 하는 책입니다. 그것이 바로 에스더서입니다.

에스더서의 이야기는 페르시아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주전 500년을 전후로 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에스더는 일찌기 고아가 되어 사촌 오라버니 모르드개의 집에서 자라났으나 그는 미모와 믿음과 지혜가 뛰어나 페르시아 임금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때에, 오만 불손하기 짝이 없는 하만이라는 총리대신이 있었는데 하만은 유대민족을 미워했고 특히 모르드개를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고분고분하지 않고 아부하지 않았던 모르드개를 당장 처형하고픈 마음이 수십번씩이나 있었지만 왕후 에스더의 사촌이라는 이유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만은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안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을 몰살시키기 위한 치밀한 음모를 꾸몄고, 마침내 전 유다인을 학살해도 좋다는 결재를 아하수에로 왕에게 받아 냈습니다. 엄청난 뇌물을 주고 왕의 결재를 받은 하만은 쾌재를 부르며 서기관들을 소집하여 대신들과 각 지방 총독과 관리들에게 보낼 조서를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각 지방과 민족의 말로 번역하여 왕의 반지로 인을 친 다음 전국 각처에 그 조서를 공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조서의 내용인즉, 12월 13일 하루 동안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유다인을 모조리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때 에스더의 사촌 오빠 모르드개는 이토록 무시무시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에스더 왕비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다 얘기한 후 에스더에게 한 두가지 충고를 하게 됩니다.

첫 번째 충고가 4:13에 있는 말씀입니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들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런 민족적 위기는 높은 자리에 있다고 살고, 낮은 자리에 있다고 죽는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에스더를 향한 모르드개의 이 충고는 비록 2500년전의 얘기만은 아닙니다. 바로 오늘 나와 여러분을 향한 충고입니다. 즉 민족의 문제는 우리에게 가정이 있고, 직장이 있고, 하루 하루를 편히 산다해서 무관심해도 좋은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있는 것이고, 신앙인은 신앙인으로서의 사명이 있으며, 국민은 국민으로서의 갈 길이 있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나 혼자 편히 잘먹고 잘산다 해서 숱한 이 민족의 문제를 외면한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위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런 경우를 이름하여 “공동 운명체”라고 합니다. 자식이 죽어가는데 어찌 부모가 가만히 있을 수 있으며 남편이 파멸되어 가는데 어찌 아내된 사람이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가정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회나 국가나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 운명체란 마치 태평양에 떠 있는 한척의 배와도 같은 것입니다. 배가 침몰하면 선장도 갑판장도 선원도 승객도 다 함께 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국가가 잘되어야 개인이나 가정이 잘되고 개인이나 가정이 잘되어야 국가가 잘되는 것은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운명이 반드시 공동체의 운명일 수는 없으나 공동체의 운명은 그대로 개인의 운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가 멸망하면 개인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III. 민족의 아픔은 나의 아픔

서울 한 복판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놀던 어린아이 하나가 자동차에 치었습니다. 운전사는 피를 줄줄 흘리는 어린아이를 가슴에 안고 한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너무 위독하여 치료 가운데 어떻게 잘못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 부모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싸인을 받을 수 없어 치료를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운전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거절당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침내 이 어린 소녀은 운전사의 품에 안긴 채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사후에 조사를 해 보았더니 이 어린아이는 맨 처음에 치료를 거부했던 병원의 원장 딸이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나라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 이웃의 문제, 그것은 곧 내 문제입니다. 내가 버린 나라, 내가 버린 이웃,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투옥당했던 마틴 니뮬러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독일에서 그들은 반대 정당 사람들을 숙청할 때 나는 정치가가 아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유다인들을 잔인하게 죽였는데 나는 유다인이 아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노동조합에 가맹한 노동자들을 체포하러 왔는데 나는 내가 노동조합원이 아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 그들이 카톨릭교도를 잡으러 왔는데 내가 개신교도였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나를 잡으러 왔습니다. 그땐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명심하고 기억해야 될 대목이 아닐런지요!

오늘 이 민족적 위기와 아픔속에서 회복해야 할 과제가 있다면 바로 공동체 의식입니다.

한국에서 26년동안 살아온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라는 사람이 오래전 재미있는 책을 한 권 냈습니다.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이란 책입니다. 언젠가 그가 방송에 나와 ‘나 밖에 모르는 한국인’이라는 프로그램 타이틀로 서스럼없이 한국인을 비판했습니다. “한국 사람은 영리하고 똑똑한데 자기 밖에 모른다. 일본 사람은 아무리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이익이 되어도 나라에 손해가 되면 그짓을 안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나라야 망하든 말든 자기 개인에게 유익이 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얘기입니까? 그의 책 가운데 10년전에 일본과 한국이 20년쯤 차이가 났는데, 지금은 100년도 더 차이가 난다고 얘기했습니다. 경제가 1만 달러면 무엇하는가? 의식이 100달러도 되지 않는 민족이라고 혹평을 거침없이 토해냈습니다. 독도가 문제가 아니다.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길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일본에서는 물건을 어디서든지 잃어버리면 99.9%는 돌아온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그 반대로 99.9%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제는 저들보다 더 정직하고 저들보다 더 근면하고 저들보다 더 진실하지 아니하면 일본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던지는 조언이 있습니다. 
정치가들은 이제 파당적 이기주의를 버리시오. 
경제인들은 정직하게 벌어 정직하게 나누시오.
종교가들은 이 시대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시오.
학생들은 두 주먹 불끈 쥐고 내일을 준비하시오.
노동자들은 한푼 더 받겠다고 싸우지 말고 양질의 제품을 만드시오. 
공무원들은 애국심 애민심을 키우시오!

모르드개의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는 충고에 대한 에스더의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16절에 보면 “수산에 있는 모든 유다인이 모여 금식하며 합심하여 기도하자”는 말씀입니다. 공동체의 문제이니 만큼 모두 하나가 되어 해결하자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모든 위인들은 위기때마다 기도했습니다. 위대한 민족은 위대한 기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백성은 위대한 회개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라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기도하는 사람이 없어 나라가 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라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고 내 일만 하고 편안히 누워 있는 것만을 즐겼더라면 우리는 분명 이렇게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아, 내가 나라를 망치고 있구나!”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가 조금 어렵다고 민족이 망하지는 않습니다. 사업이 조금 안된다고 굶어 죽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라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 역사의 문을 닫으십니다. 그 날이 바로 이 민족이 망하는 날입니다. 

일찍이 나라사랑에 생애를 바쳤던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일본이 아니요 이완용도 아니요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요. 내가 왜 일본으로 하여금 내 조국 안방을 차지하게 하였으며, 이완용으로 하여금 조국을 팔도록 내버려 두었소? 

그러므로 망국의 책임자는 곧 나 자신이요. 자손은 조상을 원망하고, 후진은 선배를 원망하고 민족 불행의 책임을 자기 이외로 돌리려 하니, 왜 남만 책망하시오? 우리나라가 독립이 못되는 것이 ‘아! 다 나 때문이로구나!’하고 가슴 두드리며 뉘우칠 생각은 왜 못하고, 어찌하여 그 놈이 죽일 놈이요, 저 놈이 죽일 놈이라고만 하시오? 진정 내가 죽일 놈이라고 왜들 깨닫지 못하시오?”

그렇습니다. 바로 나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새로워지면 나라가 새로워집니다.

온 백성과 함께 금식하며 기도하고 일어선 에스더의 용기를 보십시오. “규례를 어기고 왕께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여기에 잠시 페르시아 왕궁의 관습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왕비라고 할지라도 왕이 부르지 않으면 왕 앞에 나갈 수 없는 것이 궁중법도 였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만이 유다인을 몰살 시키기로한 12월 13일은 다가오고 왕은 에스더를 부른지 30일이나 지났습니다. 그렇다고 궁중법도를 어기고 그냥 왕 앞에 나아갔다가 이 일 저 일도 그르치게 될 위기를 맞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바로 그때, 에스더는 자신과 온 민족이 금식하며 기도하자고 요청한 것입니다. 

기도하자! 민족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자! 일이 다급하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자! 내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위기나 민족적인 문제 상황속에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자명한 결론 아니겠습니까?

기도만이 이 민족을 구원합니다.
기도만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기도하는 민족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IV. 기도하는 백성에게 해방과 자유를

에스더를 향한 모르드개의 두 번째 충고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4:14절 “..네가 오늘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 말씀은 에스더의 사명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이 때를 위함이 아니더냐?” 살만큼 사는 이유가, 배울만큼 배운 이유가, 내가 먼저 믿은 이유가, 이때를 위함이 아니더냐? 이 충고를 듣고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단하고 분연히 일어섰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로마의 박해자들이 기독교를 이기지 못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그리고 지혜를 얻은 에스더는 임금님께 나아갔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고 임금 앞에선 에스더의 절규가 무엇이었습니까?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왕후 에스더가 요구하는 소청은 부귀나 영화나 관능이 아니었습니다. 진멸 위기에 처한 자기민족을 구원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부귀 영화와 관능에 빠져 시동생 헤롯과 함께 살던 왕후 헤로디아는 자신의 부정을 책망하는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소청했습니다. 민족을 살리고 인간을 구원하는 소청이 아니라 의인의 목을 자르라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왕후의 자리에서 에스더는 민족을 구원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고, 헤로디아는 의인을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소청이 한 사람은 만고의 애국자로 다른 한 사람은 만고의 악녀로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명도, 우리의 기도제목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오 주님, 이제 내 민족을 주소서. 
내 민족을 당신의 백성 삼으소서! 당신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기도했던 에스더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버리셨나요? 

1. 유다인을 죽이려고 세워두었던 사형대에 대적 하만이 달리는 통쾌한 역전극이 펼쳐졌습니다.
2. 에스더는 왕비로서의 그 지위가 더 높아졌고 왕의 사랑을 더욱 받게 되었는가 하면 
3. 모르드개는 하만이 앉았던 총리대신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사건입니까? 

나아가 에스더서의 결론 - 마지막절 10:3을 보십시오.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받고 그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할렐루야!

민족적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는 백성을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습니다. 위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기에 망하는 것입니다. 민족적 위기, 공동체의 아픔을 십자가 앞으로 가져오면 오늘도 하나님은 민족적 위기와 아픔을 영광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할렐루야.

보십시오. 민족이 송두리째 진멸될 위기를 영광의 기회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내가 달려 죽을 그 자리에 원수를 메달고 원수가 앉았던 그 영광의 자리에 내가 앉게 하셨습니다.


V. 참된 해방의 그날을!

그렇습니다.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 아픔을 가슴에 끌어안고 우는 것입니다. 함께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 백성에게 영광을 달라고 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고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되는 이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쓰지 않으면 안되는 이 역사. 섹스피어를 못읽고 괴테를 몰라도 이 역사는 알아야 한다. 그래! 수천년을 두고 매맞고 짖밟히고 조롱받고 속임당하는 이 백성을 생각하면 눈물없이 넘어 설 수가 없다.”

한국의 간디라 일컫는 고당 조만식 선생님이 계십니다. 그는 “내가 죽거든 내 무덤 비석에 두 눈을 새겨다오. 한 눈으로는 일본이 망하는 것을 보고 한 눈으로는 조국이 독립하는 것을 보리라” 했던 민족 지도자요 애국자였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이북은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김일성은 조 장로님을 평양 어느 여관에 연금하였습니다. 용감한 애국청년 몇 명이 담을 넘어 들어가 장로님을 위하여 대동강 나룻터에 배가 준비되었으니 이남으로 내려가자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때, 조만식 장로님은 눈물을 흘리며, “이북에 있는 일천만 내 동포가 다 지옥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데 나 혼자 편히 살겠다고 이 밤에 도망치겠나, 내가 설땅은 여기니 살아도 여기서 살고, 죽어도 여기서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 답게 살았고, 그리스인답게 죽었습니다. 그는 죽었으나 지금도 살아서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았고, 조국을 사랑하되 그리스도처럼 조국을 사랑한 애국자였습니다. 

일제치하의 시인 심훈은 “독립이 오면 내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고 축하 행렬에 앞장서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새롭게 일기를 바랍니다.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해야 할 때입니다.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사직을 한 손으로 붙들고 송죽교 돌다리 위에서 피흘리고 돌아간 정몽주 선생의 한 많은 눈물이 이 땅을 적시어야 하며, 망하여 가는 조국을 바라보면서 울분을 참지 못하여 도끼로 자진한 민영환의 눈물이 이 땅을 적시어야 되며 저 노량진 새남터에서 죽어가던 사육신의 피눈물과 민족 얼이 그리운 때입니다. 진정한 이기심을 버리고 통일을 위해 울어줄 정치 지도자와 사회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조만식 선생의 눈물이 되살아나야 이 나라가 살아납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 설교인 “일사각오”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사참배로 무너져 가는 평양성을 향해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 세대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꾸나” 외쳤습니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로 강도의 소굴처럼 되어갈 때, 주기철 목사님의 “오 평양아, 모란봉아 통곡하자”하던 순교자의 눈물어린 외침대로 우리 민족은 울고, 또 울어야만 합니다.

오, 하나님.
조그마한 내 나라를 이토록 키워 주는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가난하기만 했던 이 나라를 이토록 부하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짓눌리고 억압받던 내 조국을 이토록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입니까?

- 나를 자유케 하시고 이 나라에 해방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 믿음에 부유케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열방에 주의 이름을 높이리이다.
- 주께서 자유케하신 이 땅에 다시 억압과 전쟁의 상처가 있지 않게 하소서.
- 속히 통일의 그날, 모두를 용서하고 모두가 기쁜 진정한 해방과 자유의 날을 주소서. 

주여!
한국교회의 약함과 허물을 용서하소서.
한국교회 일으켜 우리민족 잘 섬기게 하소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이 백성 살려 주소서.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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