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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자의 태도 (시 1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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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의 태도 (시 100:1-5)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시편 100:1-5


교회는, 성도요 하늘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들이 모여 성장하고 완성되어 가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역할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을 길러내고 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첫째, 무엇보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일편단심, 하나님을 가장 소중한 분으로 여기고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둡니다. 예수님께서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고 하셨습니다. 

둘째, 이웃을 사랑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헌신이 있고, 늘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려고 애 쓰는 사람입니다. 

셋째, 잠언 31장에 있는 현숙한 여인의 모습처럼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자신을 잘 돌보고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점차적으로 제일 잘 하게 되는 것이 ‘예배’입니다. 

교회에 있어서 예배는 70% 정도의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 26절을 보면 “에노스 시대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에노스는 셋의 아들이고, 셋은 아담의 아들입니다. 아담에게는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인은 인본주의적인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반면에 동생 아벨은 신본주의적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의 중심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예배는 받으셨습니다. 

가인은 질투가 났습니다. “내가 언제 예배를 안 드리겠다고 했나? 내가 원하는 대로 예배를 드리면 어떠냐?” 가인은 결국 질투 때문에 동생을 죽였습니다. 아벨은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다른 아들을 주셨는데 그 아들이 셋입니다. 셋의 아들이 에노스인데 결국 아담의 손자 시대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출발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드높이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배 보러 가자!”고 했습니다. “너 예배 보고 왔니?” “네, 예배 보고 왔어요.” 이 ‘본다’는 표현은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보는 것’은 굿을 보는 것입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다”고 하지요. 하지만 예배는 ‘드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가 예배의 주연배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연배우는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예배의 주역을 담당하는 주연배우입니다. 목사는 PD, 연출 감독입니다. 진짜 예배를 ‘보는’ 관객은 한 분뿐입니다. 누가 예배드리는 여러분을 볼까요? 하나님이십니다. 예배는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주연배우가 늦게 오면 감독의 마음은 조마조마합니다. 시작을 해야 하는데 주연배우가 아직 안 왔어요. 예배 시작 10분 전쯤에는 오셔서 편안히 자리에 앉아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를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다가 예외적으로 한 번씩 늦을 수는 있지요. 하지만 평소에는 시간을 지킵니다. 

대표기도를 마치면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면 예배위원들이 문을 닫았다가 마친 후에 열어 줍니다. 그때가 예배 시작한지 10분 후인데, 기도를 시작한지 2-3분 정도 되었으니 5-7분이 늦어서 밖에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유는 제가 볼 때 한 가지입니다. 예배시간에 정확하게 맞춰 오셔서 그렇습니다. 교회 도착시간이 예배 시작 시간입니다. 12시 예배를 위해 12시에 교회에 도착했는데, 주차를 해야 되잖아요. 지하 1층, 2층이 다 차고 3층까지 내려가서 주차를 하고 본당까지 올라와야 하는데 그것이 5-7분 걸립니다. 오늘도 기도 후에 들어오신 분들은 다음 주에는 마음이 조급하지 않게 집에서 10분 일찍 출발하세요. 

저는 목사라서 예배에 늦은 적이 없지만, 제가 만약 한 명의 성도로서 그런 경우가 된다면 마음이 참 불편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불편하겠죠? 예수님의 예화에도, 신랑을 맞이해야할 처녀들이 준비하고 있지 않다가 신랑이 와서 준비하러 간 사이 문을 잠가 버려서 신랑을 놓친 일이 있었습니다. 

늦게 오는 분 가운데는 성가대가 찬양할 때 들어오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앉아서 봅니다. 그 시간에 아래층에는 들여보내지 않기 때문에 그런 분들은 2층으로 올라가지요. 그런데 성가대가 찬양을 할 때면 저 꼭대기에 있는 카메라가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전체를 보여 줍니다. 그때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 교회 예배는 전 세계로 실황중계가 되는데, 늦게 들어오는 그 사람의 얼굴이 전 세계에 중계가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김상복 목사가 보고 있습니다. 때로는 제 마음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예배를 위해서 미리미리 준비하십시오. 1주일동안 늘 하나님과 함께 살다가 주일이 되면 “나는 1주일 동안 주일을 기다렸다”는 마음으로 헌금도 옷도 미리 준비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여러분의 최선의 모습을 보여 드리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예배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의 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성전이라는 건물이 더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전 자체도 좋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앞선 것입니다. 그리고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6)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고, 죄도 범하고, 수치도 당하고, 거짓말도 한 부족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확실했습니다. 회개한 다윗의 가슴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주님과 가까이 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그 소원이 여러분과 저의 소원이 되고, 예배의 주연인 여러분이 잘 해서 예배가 풍성해 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드릴 때 어떻게 하나? 오늘 본문 시편 100편을 보면 즐거운 찬송을 힘껏 부른다고 했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 찌어다”(1절). 즐거이 찬송을 부를 뿐 아니라, 영어 번역을 보면 “Make a joyful shout”라고 했습니다. ‘shout’는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목청껏 소리를 높여 하나님을 찬송하라.” 이것이 예배에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제일 먼저 성가대가 찬양을 합니다. 그리고 다 같이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그 다음은 여러분이 주연으로서 첫 번째 하는 행동인데,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소리 높여 찬송합니다. 찬송이 끝나고서야 예배에 들어오는 분들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의 위대한 하나님을 드높이는 예배에 주연이 늦게 와서 첫 번째로 해야 할 역할을 못한 것이 얼마나 애석합니까! 

이 첫 번째 회중 찬송은 그 교회의 영적 온도계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첫 번째 찬송 소리를 잘 들어보세요. 그 교회의 영적 온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첫 번째 찬송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곡을 선정할 때도 신중하게 합니다. 여러분이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부를 수 있는 찬송을 선정합니다. 여러분이 찬송을 부르면 그 소리가 제가 있는 앞쪽으로 울려 펴집니다. 저는 여러분의 찬송 소리를 들으면서 찬송을 부릅니다. 오늘 아침에도 너무 좋았습니다. 여러분이 주연으로 나서서 하나님께 예배를 올리는 이 첫 번째 역할에 정성을 다해서 힘껏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예언자도 아니요 예언자의 아들도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한 가지 예언을 하겠습니다. 찬송을 하고 싶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날이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 찾아옵니다. 예배를 같이 드리는 어른들 가운데는 일어서서 찬송을 부르는 시간에 앉아계시는 분들이 가끔 계십니다. 건방져서도 아니고 싫어서도 아닙니다. 일어나 서 있을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찬송 부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제가 성악 하는 분에게 물었더니 노래하는 것이 말하는 것 보다 10배의 에너지가 든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조반 드신 에너지를 찬양에 다 쓰는 것입니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4절까지 부르고 나면 마지막 “아멘”할 때는 기운이 쑥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 중에 하나가 접니다. 첫 번째 찬송은 잘 부르는데 설교와 기도를 마친 후에 부르는 마지막 찬송은 에너지가 모자라 잘 부를 수가 없습니다. 저도 젊은 시절처럼, 성가대처럼 부르고 싶은데 소리가 안 나옵니다. 저만 불쌍하게 쳐다보지 마세요. 누구나 그런 때가 오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건강이 있고 에너지가 넘칠 때 마음껏 찬송하십시오. 가슴속에 있는 것을 다 쏟아드리는 첫 번째 찬송을 통해서 마음이 열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시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찬송으로 예배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2절) ‘섬기며’란 정확히 말하면 ‘예배하며’라는 뜻입니다. 몸으로 일을 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즐겁게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과거 한국교회는 예배를 즐겁게 드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경건하게 드리라고 했기 때문에 즐겁게 교회에 왔다가 강대상에서 종을 땡땡 치면 모두 심각하게 변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모여 드리는 이 대중 예배는 축제입니다. 여러분이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교회에 와서 큰소리로 찬송을 부르며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제가 처음 할렐루야 교회에 왔을 때에는 경건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경건이란 ‘godly’로서 God에 ly를 붙여 하나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godliness’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심각하고 어둡고 웃지 않고 조용한 것만을 경건이 아닙니다. 기쁘나 슬프나 하나님 중심이면 경건한 것입니다. 명절에 자손들이 부모님 댁에 다니러 옵니다. 그런데 모두들 할아버지 앞에서 눈을 감고 말도 안하고 조용히 지내다 간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오랜만에 모인 자손들이 박수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재미있게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것이 기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부모도 자손들이 즐거울 때가 좋습니다. 하물며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찬양하며 축제를 벌이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 줄 모르겠지만 제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즐겁고 기쁘고 웃을 때 기뻐하실 것입니다. 회노애락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우리 성가대가 찬송을 드릴 때 영상에 가사를 띄웁니다. 가사를 음미하며 따라하고 싶은 분은 따라서 부르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 여러분이 주연이니까요. 성가대가 우리를 대표해서 찬양을 하지만 예배는 우리가 성가대의 찬양을 듣고 쳐다보는 공연시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함께 동참할 수 있습니다. 특송이나 성가대 찬양이 있을 때 따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도 종종 따라합니다. 이것은 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연이거든요. 주연이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예술의 전당에서 연주를 따라했다가는 큰일 나겠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배는 가족들이 모이는 축제요 여러분이 주연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고 계심을 의식하면서 마음을 다해 정성껏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중에 대표 한 분을 세워서 기도를 하는데, 우리는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준비하도록 부탁합니다. 그 분은 한마디, 한마디를 준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할 때 그분의 기도를 듣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동참합니다. “아멘”, “아멘”하는 것은 동참하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들으면서 ‘저분이 왜 저런 단어를 쓸까? 목소리가 너무 낮아!’라고 하는 것은 예배를 ‘보는 사람’에 해당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그 기도자의 한마디 한마디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저 분의 기도가 제 기도와 같습니다. 저분의 기도에 동의합니다. 아멘!”이라고 동참합니다.

그런데 “아멘”을 하고 싶어도 기도하는 분이 너무 긴 문장을 써서 아멘 할 기회를 찾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 대표기도하시는 분들은 짧은 문장을 써서 우리가 “아멘”을 많이 할 수 있도록 해 주여야 합니다. 짧은 문장으로 잘라서 기도하면 우리가 그때마다 “아멘”을 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주연은 저와 여러분입니다. 관객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예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십시오. 그래야 예배가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냥 보고만 계시면 집에 갈 때 예배를 보았기 때문에 평가자가 됩니다. “오늘은 예배 죽 쒔어!” 죽을 쑨 것은 예배가 아니고 여러분임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예배에 동참하셔서 예배가 살아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습을 보시고 ‘내 아들 예수의 피로 구속한 나의 아들딸들이 저렇게 즐겁게 나에게 영광과 찬송과 예배를 올리는구나!’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헌금 순서가 지나고 나서야 들어오시는 분도 있습니다. 최소한 헌금시간 전에는 들어 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표현해야 합니다.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중요한 시간인데 그 시간이 끝나고 들어오셨기 때문에 준비한 헌금을 못 내고 도로 가져갑니다. 주머니에 헌금이 있으니까 써버립니다. 결국, 마음이 무겁지요. 우리가 예배에 성실하게 임해야 우리의 영혼이 기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좋은 예배가 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예배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고, 나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셨고, 육신의 생명을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하셔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 주신 당신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위대하고 높고 크고 능력 있는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입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절).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생명을 주셨고 나를 오늘까지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신 분이십니다. 찬양합니다.’ 이렇게 인정하는 신앙고백의 시간입니다. 

또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라 했습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4절). 찬송은 하나님의 좋으심, 위대하심, 그리고 그 분이 우리의 사랑의 대상임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결혼 전에 상대방에게서 “당신을 사랑해!”, “당신은 너무 멋져!”라고 하는 말을 수없이 듣고 거기에 넘어가서 결혼하는 것과 같아요. 찬양은 하나님께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좋다고 하고, 그의 좋으심과 위대하심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그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 내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셨고, 오늘까지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고, 오늘 아침에도 믿음 주시고 건강 주신 것, 가족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것을 다 누리고도 누가 준 것인지조차 모른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섭섭하시겠습니까? 감사할 제목이 보이면 축복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찬송과 말씀으로, 기도로 표현 하십시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손에 헌금할 수 있는 돈이 있는 것, 얼마나 감사합니까. 없어서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의 일부를 주께 드릴 수 있는 것을 감사하고 ‘앞으로 가득 채워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가?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5절).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선하게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죄성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할 수 도 있지만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끝까지 선을 베푸실 것입니다.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인자(mercy)’는 내가 죄인이요 부족하고 실수를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처벌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오히려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절대 여러분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비가 영원하십니다. 내 실수마저 덮어주시고, 내 연약함과 내가 진토임을 아시고 나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그 자비가 영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성실하시고 신실하신 분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믿음, 성실하심, 신실, 충성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됩니다. 하나님에게는 일관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왔다 갔다, 잘했다 못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해 끝까지 선하시고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좋으신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을 깨닫고 느끼고 배우고 알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의 주연인 여러분이 예배 중에 여러분의 역할을 잘 감당하셔서 하나님 앞에 좋은 예배를 올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살아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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