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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인과 아벨 (창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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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 (창 4:1-7)
  

저는 두 명의 남동생과 막내 여동생이 있는데, 우리 4남매는 크게 분류해 볼 때 대조적인 두 가지 성격으로 쫙 나누어집니다.
저와 제 바로 밑의 동생인 석 장로는 대체로 어머니를 많이 닮았고 나머지 두 동생들은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는 대부분 석 장로하고만 같이 놀면서 자랐고, 막내 남동생이나 막내 여동생과는 별다른 어린 시절의 추억조차 남아 있지 않을 정도입니다.
  
형제자매는 '2촌 관계'로서 부부와 부모자식 관계 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사이입니다.
자연히 얼굴 모습이나 성격도 비슷한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러면서도 또 어떤 경우에는 서로 형제자매 같은 표가 전혀 나지 않을 정도로 딴판인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사실 형제라고 해서 꼭 닮으라는 법은 없다는 것은 인류 역사의 첫 형제부터 나타난 사실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분명히 형제이면서도 정말 너무나 다른 형제였습니다.
얼굴 생김새나 성격이 아니라, 그들의 본질적인 됨됨이, 근본적인 영성(靈性)이 너무나 극과 극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첫 형제의 탄생과 성장에 대하여 본문 1절과 2절에 "1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은 '얻음'이라는 뜻으로서 자식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고 있으며, 반면에 "아벨"은 '허무'라는 뜻인데 어쩌면 이때 즈음에 가서 아담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어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두 형제는 각각 고유의 직업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
목축과 농사는 둘 다 인간의 생존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산업으로서 그 자체에 무슨 귀천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의 생활환경이 이제는 더 이상 에덴동산이 아니라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는 냉정한 현실로 바뀌었음을 보여 주고 있음은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가인과 아벨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둘 다 먹고 살기 위해 직업에 종사하는 것까지는 똑같았지만, 영적으로는 너무나도 크고 심각한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이들은 인류 역사상 첫 형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고 종내에는 영원히 나누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혈연적으로 가깝고 사회적으로 비슷하게 사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완전 딴판의 인생을 살게 되고 결국 정반대의 내세로 갈라지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릴 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가 같은 형제들까지도 각각 전혀 딴 사람으로 만듭니다.

3절부터 5절 상반절까지 기록하기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a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말은 '한 절기가 지난 후에'라는 뜻입니다.
농사짓는 일이나 목축업이나 둘 다 계절에 따른 사이클이 있는데 가인과 아벨은 그 한 절기를 지낸 후에 감사의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된 가장 기본적인 감사절의 패턴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었으므로 당연히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감사제사를 드렸고, 반면에 목축을 하던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역시 감사제사를 드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의외로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직접적인 설명이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추측의 해석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벨의 제사는 '피가 있는 제사'였고 가인의 제사는 '피가 없는 제사'였기 때문이라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제물'이라는 단어 자체가 레위기에서는 주로 '피 없는 제사'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형제들이 드린 제사는 피가 반드시 있어야 할 '속죄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사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업에서 얻은 산물에 맞추어 제물 종류를 선택한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진짜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먼저 외면적으로는 '정성의 유무'였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첫 새끼'였지만 가인의 제물에는 '첫 소산'이란 말이 없는데, 감사제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제일 처음의 것' 즉 가장 좋은 것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2절에서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지적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즉 가인은 자신의 곡식 수확물 가운데 가장 좋은 '첫 소산'이 아닌,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그것은 바로 '악한 행위'였던 것이었습니다.

둘째 이유는 내면적인 것으로서 곧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참된 신앙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습니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히브리서 11장 4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운 자'라고 증거해 주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예물'에 대해서도 증거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제물을 준비하는 정성은 곧 그 사람의 믿음의 유무와 정비례로 직결됨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서 '헌금을 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것 중에 하나인 헌금조차 바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믿음이 없는 것'이 진짜 문제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제물의 질'을 달아 보는 동시에 그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심령의 동기'를 동시에 평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에서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한 것처럼 사람 쪽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바치면 하나님께서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받아 주십니다.
  
반면에 잠언 21장 27절에서 "악인의 재물은 본래 가증하거든(역겨운 것이라면) 하물며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이랴"라고 증거하는 대로 '악한 뜻'을 품은 사람은 아무리 겉으로는 '드리는' 척 해도 하나님께는 더욱 '가증하게' 여겨질 뿐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제물을 바친다고 모두 다 무조건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동기를 함께 보시는, 아주 틀림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특별한 평가 방법을 통해서 그 두 형제의 제사를 각각 '달아 보신' 후에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지만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이 성경 본문에 '아벨의 제물'이나 '가인의 제물'이라고 소유격을 쓰지 않고, '아벨과 그 제물' 그리고 '가인과 그 제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가인'이라는 인격체와 '그 제물'이라는 물질을 둘 다 목적격으로, 즉 각각 당신이 '열납하실 대상'으로 보고 계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전 인격'과 '그 바치는 제물',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받으시든지' 아니면 '동시에 받지 아니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는 처음부터 '제물과 함께' 드려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자신의 가진 재물 역시 하나님께 제물로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예배 시간을 통하여 반드시 바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물은 속이고 빼돌리고 있으면서 그저 마음으로만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둘 다 같이 받으시든지' 아니면 '둘 다 같이 받지 않으시든지' 하시는 분이며, 사람 역시 '둘 다 함께 드리든지' 아니면 '둘 다 안 드리든지' 둘 중에 하나의 예배를 드릴 수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물질 둘 중에 하나만 바치는 예배란 실상은 둘 다 안 바치는 예배나 진배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은 바로 여기에서 둘로 완전히 갈라지게 됩니다.
이것은 흑백의 피부색이나 동서양의 문화 차이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며 철저한 차이가 됩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같은 신체 구조를 가지고 다 비슷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사는 것 같아도, 그 사람이 과연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릴 줄 아는 사람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그야말로 '아주 다른 두 종류의 인종'으로 쫙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예배당 안에 모여서 같은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몸은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 억지로 나와 앉아 있지만 '과부의 렙돈'과 같은 정성의 제물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 또는 형식적인 헌금은 드리고 있지만 그 심령에서는 아무 뜨거운 감사가 없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예배 시간 내내 하나님과의 아무 영적 교통은 일어나지 않고 있는 '가인 족속'입니다.
반면에 신령과 진정으로 사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격적인 예배를 드리며 동시에 온전한 제물 역시 정성껏 준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바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바로 '아벨 족속', 아주 특별하면서도 고귀한 족속인 것입니다.
이 땅에 살 동안 늘 마음과 함께 정성을 다 바쳐 올리는 참된 예배를 통하여 진실로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살아가는 최고 상류사회에 속한 족속,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며 사랑해 주시는 정말 복스러운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가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라 해도 영원히 다른 길로 가게 만듭니다.

5절 하반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에 "5b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자신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신 것을 알게 된 가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주객전도 그 자체가 아닙니까?
지금 진짜 화를 내어야 할 쪽은 하나님이신데도 오히려 자기가 더 길길이 뛰면서 분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인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꾸짖으셨습니다.
여기서 '낯을 들지 못한다'라는 말은 자기가 한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스스로 기분이 틀어져서 인상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 즉 머리는 숙이고 있지만 제풀에 흥분하여 얼굴은 벌겋게 되고 속으로는 씩씩거리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인더러 '네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바로 했다면 왜 그처럼 인상을 쓰고 있느냐?'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자기가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화를 내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본인의 신앙생활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전혀 자각할 줄 모르기 마련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똑바로 살고 있다면 교회생활하면서 다른 교인들 앞에서 무안해 하거나 어색해 할 일이 무엇이 있겠으며 화를 내거나 불만을 토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본인의 신앙생활은 형편없는 사람일수록 교회에 대하여 매사에 불평이 많고 교인들 앞에서 걸핏하면 토라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가인 족속'의 대표적인 현상인 것입니다.

그처럼 실제로는 "선을 행치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했습니다.
이 '문에 엎드린다'는 표현은 사나운 맹수가 먹이를 덮치려고 노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문을 열자마자 죄가 그 사람을 덮치려고 웅크린 채로 도사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선을 행치 않으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늘 불평불만만 가득한 사람이야말로 죄가 유혹하기에 딱 좋은 먹잇감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라는 말씀은 '죄를 짓고 싶은 욕망은 어느 사람에게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 육신을 즐겁게 하고 자기 정욕을 채워 주는 죄를 짓고 싶어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원래부터 완전타락한 죄인으로 태어나는 까닭에 아무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철칙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엄명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죄의 욕망을 눌러 이겨야' 함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유혹에 속절없이 넘어가는 약골이 되지 말고 죄와 적극적으로 대항해서 이기려는 의지를 자꾸 연습하고 단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귀찮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간을 정해 놓고 헬스클럽에 다니면서 부지런히 운동을 하듯이, 경건생활도 부지런히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면서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열심히 해야만 더욱 튼튼히 자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습을 통한 단련이 없으면 배가 나오고 몸이 둔해지듯이 신앙생활 역시 자꾸 문제가 생기고 재미가 없고 고질병을 앓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땀 흘려 운동을 한 사람만이 잘 가꾸어진 자신의 육체미를 보는 만족감을 얻게 될 것이며, 각고의 노력 끝에 몸무게를 줄이고 날씬하게 된 사람 역시 성취감과 동시에 새로운 자신감까지 얻게 됩니다.
이처럼 '육체의 연습'도 '약간의 유익'이 있다면 '경건의 연습'은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경건생활의 연습을 통하여 점점 더 아름답게 가꾸어지고 '육체의 욕망'을 눌러 이기는 훈련을 통하여 더욱 거룩하게 성화되어 가는 자신을 보게 되는 기쁨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는 그처럼 스스로 '죄를 다스리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교인은 결코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두 번째 기회'를 분명히 주셨습니다.
가인은 자기가 온전치 못한 제사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화를 내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당장 벌주지 않으시고 그 대신에 이처럼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을 차근차근 일러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7절 다음에 보면 가인 쪽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즉 가인은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무반응이고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그와 같은 자상한 '회개 촉구'에 대하여 오히려 자기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써 대답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잘못을 깨우쳐 주실 때 어떻게 하십니까?
성경이 나의 양심을 찌르는 말씀을 할 때에, 목사의 설교가 꼭 나를 가리켜 하는 말처럼 들릴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목사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말하는 것이 듣기 싫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목사는 절대로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설교하지 않습니다.
목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세로써' 설교를 할 뿐입니다.
그 설교조차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는 교인이 과연 다른 어떤 시간에 얼마나 열심히 성경을 읽고 얼마나 잘 스스로 깨달으면서 살고 있겠습니까?
목사의 인격과 입을 통해 전달되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조차 도무지 달갑지 않다면, 도대체 그 어떤 다른 방법을 통해서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며 살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가인처럼 반응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야말로 그저 '무반응'이고 '묵묵부답'입니다.
설교 후의 기도 시간에조차 회개의 입이 열리지 않고, 은혜 받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말씀을 순종하여 변화되는 생활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시는데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떻게 '점잖은 자세'이겠습니까?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교만이요 신성모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는 자리에서 아무 회개 기도가 나오지 않고 그저 '얌전히' 앉아 있는 것이 진정 무슨 '겸손'이겠습니까?
입으로는 아무 소리 하지 않으면서도 속으로는 무언가 깊은 불만에 꽁하고 빠져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묵묵부답하는 가인'의 모습을 자기 속에서 발견하게 될 때에 정말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지막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리는, 영영히 다시 회복할 기회가 없는 저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무서운 징조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소원이 네게 있는 줄을 안다.'라고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시면서 '그러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함으로써 '죄인의 길'을 떠나 '의인의 회중'에 영원히 함께 참예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최초의 형제는 이렇게 갈라졌습니다.
그것은 인종 차별 때문에 나누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직종이 다르거나 돈 버는 액수가 다르다고 나누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학력의 고하나 성격의 차이 때문에 나누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줄 아는가 모르는가?' - 바로 여기서부터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인'과 '아벨'로 나누어져 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히 회개하고 순종할 줄 아는가 모르는가?' - 비록 한때는 가인 쪽으로 갔던 죄인이라 할지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에 대한 반응에 따라서 사람은 끝내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는 '악인' 쪽으로 혹은 구원을 얻게 되는 '의인' 쪽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한 지붕 밑에서 자란 형제였지만 그렇게도 '다른 사람'으로 나누어졌었고, 결국 금세의 남은 인생뿐 아니라 내세에 가게 될 곳까지 영원히 갈라지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역사에 존재하는 모든 개인은 바로 이 완전 딴판의 두 종족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이 60십 억 인류가 다 똑같이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똑같이 코로 숨 쉬고 살고 있다고 해서 절대로 같은 인생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낮에는 직장 생활하고 저녁에는 집에 들어오는 일상을 비슷하게 반복하다가 누구나 다 때가 되면 죽는다고 해서 별 차이 없는 인생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다 소수의 '아벨 족속' 아니면 다수의 '가인 족속'으로, 금세와 동시에 내세에까지 반드시 갈라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바로 이 엄연한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지 않으셨습니까?
바로 마태복음 24장 40절과 41절에서 "40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똑같이 밭에서 일하고 있던 '두 남자'였지만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똑같이 맷돌을 갈고 있던 '두 여자'였지만 그 중에서 '한 명은 천당으로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 명은 지옥으로 버림을 당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매주 엿새 동안 같은 직장에서 책상을 맞대고 일하는 동료라 해도,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기 위하여 교회에 나가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결국 그 두 사람 중에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게 됩니다. 
밤마다 베갯머리를 나누면서 같이 자는 부부라 해도, 그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새 사람이 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그 둘은 실상 영원히 남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금세의 '아벨'과 '가인'이 결국 내세에서 '천당 족속'과 '지옥 족속'으로 철저히 나뉘고 될 그 한 날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 16:26)는 그날이 오기 전에, 이 땅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며 그 은혜로우신 말씀 앞에 회개하고 순종하는 '아벨 족속'이 됨으로써 영원히 '천국 권속' 가운데 반드시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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