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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심 (삼하 8-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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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심 (삼하 8-10장) 
 
 
사무엘서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상반되는 인물들의 대비가 두드러졌습니다. 사무엘상 1-7장에서는 엘리와 사무엘이, 8장부터 사무엘하 5장까지는 사울과 다윗이 비교되었지요. 사무엘하 8장부터는 다윗 한 사람의 순종과 불순종이 대비됩니다. 그의 삶 속에서 이전에 언급되었던 엘리와 사무엘과 사울과 다윗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지요. 본문은 다윗의 순종과 그 결과에 대한 기록입니다.

1-14절은 다윗이 정복한 나라들이 언급됩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하게 강조되어 있고 한 가지 사실이 은밀하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음을 분명하게 강조합니다. 1절에 “블레셋 사람”을 쳐서 승리한 사건 이후로, “모압”(2), “소바”(3), “아람과 모압과 암몬”과 “아말렉”(11)을 정복했지요. 이 모든 사건들을 간략하게 소개한 후에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14)고 마무리했습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이지요.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힘써 싸운 것은 다윗인데 왜 이 모든 승리를 여호와의 은혜로 돌리는 것일까요?

솔로몬은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전 9:11)고 했습니다. 다윗은 최선을 다해 싸웠겠지만, 인생사를 보면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요. “시기와 우연”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기 때문에 이긴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손에 붙이시지 않으셨다면 최선을 다할지라도 한 사람도 손에 붙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승리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놀고먹는 혜택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땅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서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고 가르칩니다. 학생이면 힘을 다해 공부하고, 직장인이면 맡은 일에서 최선을 다하고, 주부라면 성실하게 살림하는 것이 마땅한 자세라는 것이지요. 다윗의 승리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그 은혜는 놀고 있거나 대충대충 싸우는 다윗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힘을 다해 싸우는 다윗에게 임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힘을 다는 자세가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표징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두 번째는 다윗이 하나님께 전리품들을 드렸다는 것이 분명하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금방패”(7) “매우 많은 놋”(8) 등 직접 빼앗은 전리품뿐만 아니라, 그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요람이 보내온 “은 그릇과 금 그릇과 놋 그릇”(10)을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드렸다고 했지요(11a). 그것과 함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11b-12)고 했습니다. 마치 신하가 전리품을 왕에게 바치듯이 다윗 왕은 계속해서 승리의 결과물들을 하나님께 바쳤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을 고생하며 얻은 수확물을 왜 하나님께 드렸을까요?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힘과 능을 주시나니”(시 68:35a)라고 했습니다. 이겨서 전리품을 뺏을 수 있는 힘과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고백이지요. 다윗은 마음속으로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신 8:17). 바쳐진 재물들은 나중에 솔로몬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성전을 지을 때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왕상 6-7장). 승리의 때에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던 사울과는 대조되지요(삼상 15:12).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분입니다(사 40:29).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셋째로 다윗의 승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은밀하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모압”과 “에돔”(13)의 정복은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그 원수 에돔은 그들의 산업이 되며”(민 24:17b-18a)라는 말씀을 성취했습니다. 다윗의 승리는 “유브라데”(3) 강 유역까지 미쳤는데 “내가 이 땅을 …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라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였지요.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거나 수정되지 않았습니다. 때가 이르자 한 말씀 한 말씀 차례대로 성취되어갔습니다. 역사의 흥망성쇠는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행되는 것이지요.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의식하고 행한 적극적 순종이었는지 무의식중에 약속을 성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명백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거 일백 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4b)던 일 역시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신 17:16a)을 명하셨던 하나님의 명령에 부합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많은 전리품을 얻었으나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신 17:17) 않고 여호와께 드렸던 것도 하나님의 말씀과 맞았습니다. 다윗은 더 많은 병거와 병력들을 확보해서 죽을 때까지 영토를 확장해 갔던 역사의 대정복자와는 구별된 모습이었습니다.

다윗이 승리를 얻어가던 시대에 남쪽의 애굽은 21왕조 시대(1085-945 BC)였는데, 국외로 손을 뻗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북쪽의 앗수르 제국도 겨우 태동을 시작하던 때라 세력이 미미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의 승리와 더 많은 확장을 허락하지는 않았습니다. 승리하여 재물을 얻고 영토를 확장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님의 나라를 드러내기에 합당할 만큼의 승리와 영역만을 주셨지요. 그 사명을 위해서 대제국이 될 필요는 없었습니다. 다윗이 의식했던 의식하지 못했던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당신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해 가셨고, 적절히 제어하시면서 친히 당신님의 왕국을 세워가고 계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승리들이 성도들로 하여금 승리만을 열광하도록 고무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형통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고 했습니다. 다윗에게는 형통함을 주셨지만, 욥처럼 곤고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고 당신님의 나라를 드러내실 수도 있습니다. 형통과 곤고 중에 무엇이 우리네 장래에 닥칠지는 아무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 닥칠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15절의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할새”라는 말씀에서 “공”(fP;v]m, 미쉬파트)은 공정한 재판을 의미하고, “의”(hq;d;x, 체다카)는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된 행위를 뜻합니다. ‘공과 의’는 한 구절로 표현할 수 있는 다윗 통치의 특징이었는데,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면서도 교만해져서 마음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공정한 판결들을 내리는 왕으로 살았습니다. 이어지는 9장과 10장에서는 하나님의 언약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의 언약도 기억하고 인애를 베푸는 통치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은혜를 뜻하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헨’ ‘라촌’ ‘헤세드’가 있는데, 이 중에 ‘헤세드’는 언약에 충실한 사랑을 뜻합니다.

먼저 9장에서는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9:1)했습니다. 사울의 종 시바를 통해 요나단의 절뚝발이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내고 그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했습니다(3).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을 때 므비보셋이 5살에 불과했는데(4:4), 이제 “미가”라고 하는 “젊은 아들 하나”를 둘 정도가 되었으니(12), 요나단과 언약한 후 최소한 15년 정도는 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동안은 전투하느라 경황이 없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은혜 베푸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는 자세였지요.

다윗의 열악했던 시절은 지나갔습니다. 주위의 동료들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 없는 사람과의 접촉이 단절된 왕궁에서 열악한 처지의 사람들을 생각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은혜를 베풀기 위해 애써 대상자를 찾았습니다.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7)는 제안에 대해 행여나 발생할 수 있는 반란의 불씨를 미연에 막으려고 므비보셋을 부드럽게 궁중에 연금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전 왕조의 후손들은 씨를 말려버렸던 역사적 사례들과 비교하면 대단히 은혜로운 처분이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던 사람이 출세하여 권력과 부를 가지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열악한 처지에 사는 자들의 심정을 잘 알고 그들을 위한 정책을 베풀 것으로 기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너무도 가난했기에 그 시절은 기억하기도 싫고 아직도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태도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가진 자들과 함께 그들이 세운 세상을 더욱 견고하게 구축하려는 태도를 가지기 쉽지요. 다윗의 삶에서 하나님 종으로서의 귀한 열매는 그가 많은 민족들을 정복한 일보다 열악했던 날들의 약속을 기억하여 지키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베풀고 공과 의를 행했다는데 있습니다.

10장은 하나님의 은총을 표현한 다윗의 헤세드를 악하게 해석하고 오해했던 암몬 왕 하눈이, 은혜를 지극히 모욕하고 악으로 갚았다가 멸망하는 내용입니다. 은혜를 거절한 자에게 남는 것은 멸망뿐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은혜에 감사하며 순종하는 생활, 그리고 은혜 베푸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지극한 은혜를 베푸신 분의 성품을 잘 드러내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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