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죽음 그리고 그 후 (히 9:27)

  • 잡초 잡초
  • 474
  • 0

첨부 1


죽음 그리고 그 후 (히 9:27)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교회 게시대에 아름다운 죽음 준비 학교 현수막이 걸려 있고 이번 여름에 많은 생명이 재낭을 당함을 보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라는 수기의 저자 ‘채규철’씨가 있습니다. 서울 농대를 졸업하고 덴마크에 유학을 다녀 온 후 ‘청십자 의료 협동조합’을 세우고, 한국 농촌의 부흥을 위해 이곳저곳 계몽 강연을 다니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3도 화상을 입고, 몸 전체의 45%가 타 버리는 형용하기 어려운 처참한 재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 생사의 기로에 선 순간, 부모님보다는 아내의 생각이 먼저 떠올라 사랑은 피보다 더 진한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아내마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화상을 당하여 눈과 손발이 부자유스럽게 되자, 음식을 먹여 주고, 책을 읽어 주며, 부르는 말을 기록하여 주고, 전화의 다이얼을 돌려주던, 참으로 그에게 있어서는 분신 같은 아내였습니다. 

<그 소중한 아내를 공동묘지에 파묻고, 텅 빈집에 돌아온 나의 공허! 허무! 울어도 울어도 풀리지 않는 심장을 에이는 듯한 쓰라림은, 이 세상 아무도 달래 줄 수 없었다. 어느 누구로부터도 위로를 받을 수 없었다. 만약 인생이 죽은 후에 이대로 썩어 없어진다면, 나는 그 차가운 절망의 서글픔을 참고 참다가 끝내 이기지 못하고, 나도 그녀를 따라 그녀의 옆에 한 줌의 흙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잃고 난 나에게는, 부활이란 있다 없다는 문제가 아니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정말 사랑하던 사람을 잃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실감이 안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아픔을 맛보는 날이 누구에게도 올 것이고 또 온다.>라고 그의 수기 서문에 썼다합니다.
  
성결교회 이명직 목사가 지은“허사가”는 죽음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인생 일귀 북망산 불귀객 되니, 일배 황토 가련코 가이 없구나. 솔로몬의 큰 영광 옛말이 되니, 부귀영화 어디다 자랑해볼까. 홍안 소년 미인들아 자랑치 말고, 영웅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마라. 유수 같은 세월은 널 재촉하고, 저 적막한 공동묘지 널 기다린다.”

진시황제도 불과 49살에 죽고, 중국 낙양의 북쪽 북망산 공동묘지에는 호걸과 미인들이 줄줄이 묻혀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디오게네스가 뼈가 잔뜩 쌓인 공동묘지에 앉아서 뼈를 하나씩 하나씩 찾고 있었습니다. 이때 알렉산더 왕이 지나가다가 디오게네스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디오게네스의 대답은 "당신 아버지의 뼈를 찾고 있소, 아무리 찾아 보아도 도저히 어느 것이 당신 아버지의 뼈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요." 알렉산더 대왕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며 잠시 할말을 잃었습니다. 

이 말은 알렉산더 왕에게 죽으면 누구든지 모두 똑같은 뼈로 변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왕의 뼈든 평민의 뼈든 모두가 같아서 구별조차 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만 얼굴도 다르고 옷 모양도 다르고 키도 다르고 말씨도 다르고 권력도, 부도, 지식도 다르다가 죽으면 모두 하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뼈조차 찾을 수 없는 흙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육체에 찾아온 죄의 형벌(창 3:19; 롬 6:23)이므로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하고 안식과 형벌로 나누어 집니다
성도에게는 죽음이 더 이상 형벌이나 저주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재앙이 아니라 그것을 통과한 후에는 영원한 내세의 복이 있는 것입니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슬픈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몸은 죽음을 면할 수 없지만 우리의 영혼은 죽음에 이르지 않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 영혼을 맞아 주십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죽음은 잠시 장막 생활을 하다가 장막을 걷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을 이 장막에 있는 동안이라고 했고 죽음을 가리켜 '이 장막을 벗어날'(벧후 1:14) 때라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도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라고 하여 죽음을 영혼이 안식하기 위하여 더 좋은 집을 마련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에 대하여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 없이 슬퍼하는 자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잠이 쉼을 의미하듯이 죽음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제칠 일에 쉬고, 또한 낮 동안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잠을 잠으로 해서 평안함을 얻습니다.

그렇듯이 죽음은 일생 동안 수고하고 이제 평안히 잠을 자는 것과 같은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는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의 풍파에 시달려야 하고 생계 문제로 고민해야 하며, 멀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조롱과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식을 누리는 동안에는 더 이상 그러한 것들로부터 시달리거나 괴로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품안에서 사랑과 위로를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죽음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반면에 불의한 자들의 죽음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들의 죽음에는 안식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들어 하늘나라에서의 최후 심판을 교훈하셨습니다. 부자는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았지만 나사로는 병 든 몸을 이끌고 부자의 대문에서 구걸하며 살았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구걸할 뿐만 아니라 헌데를 앓으며 부자의 대문에 누워 있었습니다. 게다가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는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 땅에서 비참한 삶을 살던 거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 후에 부자도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부자는 이제 공정한 심판에 의하여 지옥에 떨어집니다. 지옥은 영원한 고통과 슬픔만이 있는 장소입니다. 지옥은 상상의 장소가 아니라 실제적 장소인 것입니다. 그는 지옥의 불꽃 가운데서 심한 갈증을 느끼면서 고통해 합니다. 

그리고 주님 오실 때 부활에 동참하고 영생복락과 영원 형벌을 받게 됩니다
  
(살전 4: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사도 바울은 죽은 자들 역시 하나님의 섭리와 주관 아래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부활한다는 사실을 말하며 죽은 자라고 말하지 않고 자는 자라고 말함으로써 성도의 죽음이 자는 것과 같은 것임을 말합니다

(요 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인정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현세에도 영생을 누리지만, 장차 무덤 속에서도 '선한 부활체'로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죽음은 마치 한 식구가 안방에서 같이 즐기다가 피곤해서 다른 방으로 옮겨가서 자다가 밝은 아침이면 온 식구가 다시 식탁에 모여들 듯이 예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 무덤 속에 있는 성도가 먼저 일어나고 땅 위의 생존자들이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하여 예수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결코 볼 수 없는 헛된 소망이 아닙니다.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예수께서는 죽으심으로 소망 없는 자 같았으나 3일 만에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렇듯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누차에 걸쳐서 약속한 것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이 따르게 됩니다

(살후 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살후 1: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한 네덜란드 시인이 꿈에 죽어서 저 세상에 갔습니다. 저 세상에 들어서니 한 천사가 그를 맞으며 금빛 나는 책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게 무슨 책입니까?" 
"그대의 삶을 기록한 것이지." 

좀더 가까이 다가가 책의 첫 장을 넘겨 보았습니다. 거기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대가 저지른 악한 행동들(acts)이지. 참 많구나." 

천사가 다음 장을 넘겼더니 거기엔 아까보다 더 많은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이건 그대 입에서 나온 악한 말들(words)이야. 아까 본 행동보다 많지? 
 사람은 본래 행동보다 말이 많게 마련이야." 

시인은 두려웠습니다. 
다음 장을 넘기니 거기엔 더욱더 촘촘하게 기록된 것이 보였습니다. 
"이건 무엇입니까?" 
"이건 그대 머리 속에 있던 악한 생각들(thoughts)이야. 엄청나구먼. 
 사람이란 말하고 행동하는 것보다 생각하는 게 많으니까." 

시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다음 장도 넘겨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천사가 그 다음 장을 넘기자. 아뿔사! 그것은 마치 칠흙같이 어두운 밤처럼 온통 검게 칠해져 있었습니다. 

"이건 그대의 악한 마음(heart)일세. 검은 마음에서 그 모든 생각이며 말이며 행동이 나오지."

(계 20:13-14)...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남은 날을 계수하며 죽음을 준비합시다

(시 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암 4: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이화대학의 최화숙 교수가 쓴 “아름다운 죽음의 안내서”란 책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죽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갑자기 의사의 사형선고를 받고나서야 당황하며 허둥대는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도 있고 지식도 있는 사람인데 죽은 다음에 꽃 한 송이 가져오는 사람도 없고 울어주는 사람도 없이 고독하게 죽어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며 부정직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 앞에서 “악하게 굴더니 드디어 죽고 말았구나” 하고 속 시원해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부디 정직하게 살고 불쌍한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이웃과 나누며 살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말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27: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헨리 나웬 이라는 분이 쓴 책  '죽음 가장 큰 선물이라는 책은 친구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죽음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쓴 책이라K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갑자기 다가오는 죽음을 어떻게 두려움 없이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책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헨리 나웬은 그 책에서 말하기를 "죽음이란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되는... 하나의 상실인 것은 틀림없지만... 동시에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고... 또 죽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며... 그리하여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죽음을... 저주로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길로... 우리를 안내해 준다고... 강조하고 있다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노인이 갑자기 염라대왕에게 불려 갔습니다. 노인은 당황하면서 염라대왕에게 항의를 합니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불러오면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요, 내가 정리할 것도 있고 죽음에 대하여 준비하였다가 와야 하는 거 아니요. 예고라도 해주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 말이오. 날씨도 예고 해주는데 왜 죽음은 예고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염라대왕이 하는 말 이 사람 기가 막힌 사람이군. 내가 5차례나 예고해 주었지 않았오. 먼저 눈 밑에 잔주름이 있게 한 것이 1차 예고요, 귀밑에 머리색깔이 희어지게 된 것이 2차 예고였소. 입가에 잔주름이 3차 예고 그리고 4차 목주름이 생기게 한 것이요. 그래도 더 이상 분명하게 예고하였는데 그것이 뱃가죽을 당기면 30cm나 늘어나도록 한 것인데 무슨 딴전을 피우고 되레 큰소리냐? 라고 호통을 치더라는 우스개 소리입니다.
  
야망을 품은 젊은이와 독실한 기독교인 성 필립 네리가 주고받은 탐색적인 대화 이야기가 16세기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젊은이는 흥분해서 필립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 드디어 제가 법률 공부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필립은 
"그 다음에는?" 이라고 간단하게 질문했습니다. 젊은이는 
"저는 변호사가 될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고 필립이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엔 많은 돈을 벌어서 별장을 사고, 마차와 말도 사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아갈 겁니다!" 다시 필립이 물었습니다. "

그럼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젊은이는 그제야 죽음과 영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젊은이는 자기의 계획 속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과 자기가 일시적인 가치를 위해 그의 삶을 세우려 했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부흥사 이성봉 목사는“인생모경가”(‘모경’(暮境)이란 늙어서 노인이 된 처지라는 뜻)를 작사하여 집회 때마다 스스로 부르고 회중에게 전파했습니다.
  
“주의 피로 이룬 샘물”(P. P. Knapp 작곡 266장 찬송)  에 맞추어 부르는 부흥성가입니다.
가사가운데 일부입니다

(1절) 꿈결 같은 이 세상에 산다면 늘 살까. 인생의 향락 좋대도 바람을 잡누나. 험한 세월 고난풍파 일장춘몽이 아닌가. 슬프도다 인생들아 어디로 달려가느냐.

(2절) 이팔청춘 그 꽃다운 시절도 지나고, 혈기방장 그 장년도 옛말이 되누나. 성공 실패 꿈꾸면서 웃고 우는 그 순간에, 원치 않는 그 백발이 눈서리 휘날리누나.”

이렇게 인생의 눈서리를 말하고 나서 인생의 소망을 주님 계시는 천국에 두어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6절)“근심마라 너희들은 하나님 믿으니, 또한 나를 믿으라고 주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 그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지요. 기쁘도다 주님 함께 영원히 함께 살리라.”

(7절) 강 건너편에 종소리 내 귀에 쟁쟁코, 보석성에 그 광채는 눈앞에 찬란타. 앞서가신 성도들이 주님 함께 기다린다. 어서 가자 내 고향에 할렐루야로 아멘.”

지구상에는 60억 인구가 살아가는데 매년 5천만 명씩 그리고 매일13만 6천 9백 명씩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1초에 2명씩 죽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이 통계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했으며 죽음에 대하여 3가지 모르는 것과 3가지 아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3가지 모르는 것은 언제 죽을지, 어디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를 모른 다는 것이며 3가지 아는 것은 꼭 죽는다는 것과 죽을 때 아무도 같이 가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사는 것은 사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기에 주님과 동행하다가 주님 안에서 죽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완전의 세계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남은 날을 계수하며 죽음을 준비하며 사명 감당 하며 영광 돌립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