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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누구입니까? (엡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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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입니까? (엡 2:1-7)
  

조선 25대 임금인 철종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임금이 되기 전 강화 도령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강화도령으로 살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의 증조 할아버지가 아버지 영조의 손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입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을 때 아들 셋이 남아 있었습니다. 세자빈에서 태어난 장남은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조 임금이 되었고, 다른 아들 둘은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들은 당시 천주교인이란 사실이 발각되면서 유배지 강화도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되고 후손들은 모두 강화도에서 왕가와는 관계없는 비참하게 살게 됩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조선 왕조에 왕가에 대가 끊기게 됩니다. 새로운 왕을 옹립해야 되는데 권력을 쥐고 있던 세도가들은 똑똑한 왕을 원치 않았습니다. 왕이 똑똑하면 왕권을 강화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권력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왕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왕조가 전주 이씨의 나라였기 때문에 이성계의 피를 타고난 사람 중에 왕을 세워야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오래 전 강화도로 유배를 떠난 이 집안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강화도령 철종은 이성계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왕이 되는데 기본적으로 하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다는 것과 왕답게 산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는 왕이 되었으나 전혀 왕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가 왕답게 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어떻게 국방을 튼튼히 하고,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의 발전을 도모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살게 할 것인지를 배워야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술이나 마시고 궁녀들 꽁무니나 따라다니면서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철종형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으나 전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성도로서 살아 갈 때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항상 감격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는 바로 나 한 사람의 영향력이 세상에 미칠 엄청난 파장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나 하나의 존재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찌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구원의 그 가치를 안다면,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먼저, 신앙의 감격과 능력을 회복하려면 우리의 처지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장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은 크게 두 문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1-3절, 두 번째 문단은 4-10절입니다. 먼저 전반부 석절에서는 구원받기 전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신앙의 감격을 잃어버렸는가? 왜 감사가 넘쳐나지 않는가? 왜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가? 사도 바울은 구원 받기 이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이전에 우리가 어떤 상태였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구원 받기 이전에 우리가 처했던 그 절망적인 상황을 마치 입체적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로서 능력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원받기 전의 내 환경이 얼마나 암담했던가를 하나님 앞에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체험 가운데서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신학생 시절에 강원도 영월의 동강에 자원봉사를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8월의 하늘은 그 당시 불을 토해내는 것 같은 더위 속에 잠시 휴식을 갖게 되었고 우리 일행은 삼옥 2리라는 곳에서 수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참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남자 학생들이 강을 다 건너는 것입니다. 나는 별로 수영 체질이 아닌데 다 가고 나 하고 몇 사람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학생들이 수영하는 남자들을 격려하고 야단입니다. 도저히 그 자리에 있지 못하겠더라구요. 그래서 물갈퀴를 가지고 그냥 물속으로 뛰어 든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강을 중간 쯤 가다가 두려움이 온 것입니다. 몸이 굳기 시작하더니 강 한 복판에서 강물에 휩쓸려 내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저의 친구 전도사 한분이 나를 보고 튜브를 가지고 헤엄을 쳐서 나를 건진 것입니다. 챙피도 하고 미안도 했는데 그 당시 저를 건져준 친구에게 큰 고마움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영월을 가서 그 현장을 보게 되었는데, 얼마나 끔직한지 모릅니다. 당시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씻벌건 황토물이 되어서 소용돌이를 치며 내려가는 그 광경을 본 순간 가슴이 메어지게 되었습니다. 물에 빠질 당시는 잘 몰랐는데 범람하는 물줄기가 급류를 타고 내려오는데 만약 그 때 내가 거기서 죽었다면 하는 생각에 미처 깨닫지 못한 죄송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건져준 친구에게 지금도 밥을 사라면 두말 하지 않고 삽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신앙의 감격을 회복하기 위해서 먼저 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에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를 말해주기 위해서, 사도는 우리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절을 살펴봅시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우리가 구원 받기 전의 상태를 “죽었던” 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경의 진단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구원 받기 전의 사람들은 모두 죽은 것입니다. 산송장입니다. 교회 밖의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습니까? 얼마나 똑똑한 사람들이 많습니까? 얼마나 착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그들을 향해 감히 죽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단입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표현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요즘엔 목회자들이 시신을 직접 다루지 않고 장의사들이 대신합니다. 그러나 제가 전도사 시절만 해도 대부분의 시신을 목회자들이 직접 알코올로 닦았습니다. 저도 시신을 닦아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신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 번째 특징은 무반응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앞에 갖다 놓아도, 아무리 얘기를 하려고 애써도 반응이 없습니다. 두 번째 죽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부패합니다. 장의사가 시신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시신의 모든 구멍을 막습니다 시신이 부패해서 나쁜 균이 밖으로 나오거나 빨리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미국에서는 장의사에게 돈을 좀 주면 사람이 죽자마자 사람의 내장을 다 들어내서 방부제를 넣고 깨끗하게 화장을 해 줍니다. 그래서 화장을 잘 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살아있을 때보다 죽었을 때가 더 예뻐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영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구원 받기 이전에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우리는 죽어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사망한 자였습니다. 저 풍성한 하늘의 축복과는 전혀 관계없이 죽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하늘의 축복을 받지도 못하는 반응이 없고 썩어져 가는 존재, 그야말로 죽어 있었던 자들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어 있었다는 말을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까봐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의 세 가지 특징을 2절에서부터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3) 

여기 보면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의 인생은 세가지의 지배를 받으며 산다고 말합니다. 이 세가지는 인생의 3가지 영적인 적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가 세상, 둘째가 마귀, 셋째가 육체입니다. 먼저 2절에 보면 “세상 풍조에 따르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은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에게 세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죽은 인생은 세상의 영향을 거부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세상의 풍조를 따라 다닙니다.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을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2절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귀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마귀는 저 위로부터 영적인 존재들을 거느리고 우리를 공격하고 있으며,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겉으로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마귀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영적으로 죽은 자들의 특징이 3절에 나와 있습니다. 

육체, 여기서 육체라는 말은 영어로 (soma)로 번역되지 않고 (sarxs)로 번역됩니다. 이것은 신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자리잡은 아담에게서부터 물려받은 인간 본연의 타락한 성품, 곧 부패성’을 말합니다. 3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육체 혹은 육신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우리를 내부로부터 부패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거듭나지 않았던 지난 날의 모습들입니다. 인간의 마음 전체가 이 타락의 영향아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지성도 감성도 의지도 철저하게 다 타락한 것입니다. 칼빈은 이런 상태를 “전적인 타락” 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저와 여러분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고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하나님의 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어 있었기 때문에 세상풍속을 좇아 마귀의 종이 되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 수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내가 그러한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십시오. 

4절은 본래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을 합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이것이 생략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셨다’ 여기 ‘살리셨다’는 이 단어는 그 당시에 동물의 출생이나 식물의 자라남을 표현할 때 사용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명을 주는 행위인데, 죽어 있던 우리에게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분의 변화를 말합니다. 

지난 날, 마귀에 종노릇하던 우리가 세상에 풍속을 ?아 육체의 소욕에 사로 잡혔던 바로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를 새 생명으로 신분의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6절에 보면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기 ‘일으키셨다.’ ‘앉히셨다’는 바로 우리의 수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은 그 순간 우리에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어요. 부활의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 같지만,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그뿐만이 아닙니다.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앉히셨다”는 말은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을 다 끝내시고 하늘에 앉으셨습니다. 모든 원수들을 발아래 굴복시키시는 권세를 가지셨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놀라운 특권을 가진 자가 바로 예수를 나의 구주로, 주님으로 모신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장차 영광의 하늘 보좌에 앉히신 그 소중한 존재가 나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지난 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한 나를, 죄를 밥 먹듯이 저지르면서도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를, 그리고 나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짓밟고라도 모든 것을 성취하려는 형편없는 이 한심한 내가 도대체 누구이길래,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게 했냐는 말입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의과대학의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여기 한 부부가 있는데, 남편은 매독에 걸려있고 아내는 심한 폐결핵에 걸려있다. 이 가정에 아이가 넷인데 폐결핵에 걸린 한 아이는 며칠 전에 죽었고 나머지 셋도 폐결핵에 걸려 별로 살 가망이 없다. 그런데 그 폐결핵에 걸린 어머니가 임신을 했다. 어떻게 하겠는가? 이 정도면 낙태할 충분한 이유가 되겠는가?” 의과 대학생들에게 의료적인 윤리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대로 태어나기도 힘들지만 태어난다고 해도 이미 태어난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별반 살 가망이 없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일어나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낙태해야지요.” 그러자 교수님이 그 학생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방금 베토벤을 죽였네!” 아버지는 매독이었고, 어머니는 폐결핵 중증이었으며 형제 중 하나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었고, 나머지 셋도 살 가망이 없었는데 그 상황에서 그 어머니가 임신한 아이가 바로 베토벤이었습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 하여 함부로 판단하고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우리가 보는 것만큼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정말 오묘하게 운행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은 기적을 만들어 가실 때가 많습니다. - 바로 그 은혜 앞에 선 자가 내가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이 지금 아직도 구원의 그 엄청난 은혜를 깨닫지 못했다면 이 시간 성령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영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나 하나를 당신의 자녀 삼기 위해 쏟으신 그 사랑은 우리의 입으로 다 표현할 수 조차 없는 엄청난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그 은혜를 바로 알고 그 능력을 의지하고 힘있게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뭐, 예수 때문에 오는 어려움이 있다고, 또 좀 희생할 자리에서 그것을 외면하는 삶을 언제까지 살아가야 합니까? 새는 날개가 아무리 무거워도 그것을 떼어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개 때문에 날아 오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배는 돛이 아무리 무거워도 그것을 잘라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돛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나아 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아직도 철종형 그리스도인처럼 예수님의 보혈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으나 전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내 남은 인생을 ‘죽어도 좋은 목숨’처럼 나를 받아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빚진 자의 심정으로 갚으며 살아가시겠습니까? 여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풍성한 은혜를 드러내기 위함이 7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복음을 온 땅에 증거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2005년 3월 중순경에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새벽 2시경 아틀란타 동북쪽 조용한 주택가 주차장에서 아파트로 들어서던 애슐리 스미스(Ashley Smith)라는 이름의 한 여인에게 갑자기 무장괴한이 총을 들고 다가서서 집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이 괴한은 브라이언 니콜스(Brian Nichols)라는 이름의 남자로 아틀란타 풀턴 카운티 법정에 출두하여 재판을 받던 중 그를 지키던 감시자의 총을 빼앗아 법정 판사를 비롯한 4명을 살해하고 도주한 죄수였습니다. 그리고 무려 7시간 동안을 이 여인은 자기 집에서 이 괴한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손발이 묶였지만 그리스도인이었던 이 여인은 침착하게 기도한 후 그와 더불어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 무거운 총을 들고 서 있지 말고 거기 앉아요. 내가 맛있는 아침 식사를 만들어 드릴테니 이 줄을 풀어 달라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건넵니다. 탈옥수는 이상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 너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라? 나 무섭지도 않아? 이 때 이 자매가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가니까 걱정이 없어요. 또 당신이 우리 집에 온 것도 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라고 믿어요. 그렇다면 뭔가 깊은 뜻이 있을테니까 당연히 무서워해야 할 필요가 없지요. 그리고 당신도 이런 신앙의 기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군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예수님 믿고 구원 받으세요” 차분하게 말하자 마침내 그녀의 말에 감동을 느낀 그가 이 여인의 묶인 것을 풀어 주게 됩니다. 애슐리는 그를 위해 팬 케이크를 구어 주었고 눈물을 글썽이는 그에게 애슐리는 자수를 권하며 오늘 당신과의 만남에도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얼마 후 다른 곳에 가있던 딸을 만나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여 허락을 받고 그녀는 집을 나서게 되고, 이어서 그녀의 신고로 이 집에 도착한 경찰에게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항복하여 체포됩니다.이 실화 속에서 우리는 control(장악)과 power(능력)가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탈옥수는 총이 있어서 자기가 그 집을 control(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정작 그 상황을 이끌어 가는 power(능력)은 누가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 힘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로부터 순간 순간의 삶에 있어서 공급받는 영적인 힘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를 다 청산케 하시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 능력있는 인생으로 한 생을 살게 하신 그 능력 앞에 세워진 자가 우리입니다. 아-멘. 이제 무엇이 무섭습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고 염려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이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각자 피의 보혈로 ?셔진 주의 자녀들입니다. 이제 교회가 가을 사역에 열매를 맺기 위해 지난 주 교역자들이 기도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사역을 준비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깨달은 우리가 주께서 나에게 맡긴 일을 기쁨과 감사로 감당하는 역사가 풍성하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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