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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계를 넘어 더 깊은 데로!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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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넘어 더 깊은 데로! (눅 5:1-11) 


1. 한계상황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Karl Jaspers)’라는 사람은 “한계상황(限界狀況)”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한계상황이란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던 문제나 일들이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직면할 수밖에 없고, 그 어쩔 수 없는 벽에 부딪쳐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나이가 들어가는 것과 나이가 들어가는 흔적이 몸과 마음에 하나 둘 생기는 것, 그래서 몸은 점점 약해져가고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져 가는 것, 그리고 인간이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 등으로서, ‘이래서 나는 인간일 수밖에 없구나!’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입니다. 

도널드 맥컬로우 목사(Donald W. McCullough)는 자신의 책 『모자람의 위안』에서 사람이 만나는 한계상황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습니다. “몸의 한계, 관계의 한계, 지식의 한계, 성취의 한계, 도덕성의 한계, 영성의 한계, 로맨스의 한계, …, 자신감의 한계, 인정의 한계, 돈의 한계, 경쟁심의 한계, 책임의 한계, 자유의 한계, 즐거움의 한계, 감각의 한계, 시간의 한계….” 어디 사람이 가지는 한계가 이것들 뿐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끼셨는지요? 도무지 여러분의 뜻대로 자라주지 않는 자녀들에게서 한계를 느끼셨습니까? 요즘 들어 부쩍 느껴지는 건강 문제 때문에 한계를 느끼셨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으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불가능한 일을 만났을 때였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가지는 한계상황은 정말 많지만,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 한계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벽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한계상황은 우리를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한계상황을 만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가 만난 한계상황은 도리어 그를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한계는 도리어 복된 자리가 되었지요. 오늘은 바로 그 사람을 통하여 여러분의 한계는 어떤 것이며, 그 한계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를 기대해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한계상황에서 주님을 만나다!

1) 한낮의 물고기 풍어 사건

오늘 본문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요. 구약시대에는 “긴네렛 못”이라고 불렀는데, “긴네렛(Kinneret)”이란 ‘하프’란 뜻으로 갈릴리 호수가 ‘하프’라는 악기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바벨론 포로 후에는 “게네사렛(Gennesaret)”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도 “게네사렛 호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갈릴리 호수는 길이가 21 킬로미터, 폭은 13 킬로미터인 꽤 큰 호수로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초창기로 보이는 어느 날 아침,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이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는 어부들과 그 곁에 있는 배 두 척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대뜸 그 어부들의 배 중 하나에 오르신 주님은 “배를 바다에 조금 띄우라”고 명하신 후, 그 배를 강단 삼아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 배의 주인인 베드로는 자신의 배에 올라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을 그가 하시는 대로 묵인하고는 그 곁에서 묵묵히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는 자신의 형제 안드레를 통하여 예수님에 대해서 들은 바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은 그물을 정리하고 예수님은 배에서 호숫가에 늘어선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는데, 그날 아침 자신의 가장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에게 너무나 큰 감동이 되었습니다.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해서 다른 날보다 훨씬 피로도 더하고 심한 허탈감에 빠져 있었는데, 그런 가운데 들은 주님의 말씀이 마음 속 깊은 곳에까지 스며들면서 온 몸까지 평안해 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모르긴 해도 감성이 풍부한 베드로는 그물을 씻다가 몇 번이나 감동적인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런 베드로를 유심히 보셨을 것이고요. 

갈릴리 바닷가 선상에서의 아침 식사 없는 ‘조찬 예배’를 마치신 예수님은 자신이 타고 설교하신 배의 주인인 베드로에게 느닷없이 명령을 하나 내리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아무리 베드로가 그 순간까지 감동적으로 말씀을 들었다고 해도 예정에도 없는 이 명령은 베드로와 곁에 있던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당황한 것은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➊ 누가가 자세하게 기록은 하지 않았지만, 이때가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때로 보이는데요. 그렇게 처음 만난 사람이 다짜고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지금 막 갈무리를 끝낸 그물을 다시 바다로 내리라고 명령하는 것에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➋ 그리고, 그 명령을 받은 상황도 애매했습니다. 대부분의 어부들이 바다에서 돌아와 내일을 위하여 그물 정리를 끝낸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야고보와 요한 같은 친구들을 비롯한 베드로의 知人들도 많았는데,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다가는 그 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런 멍청한!” “네가 잘 알지도 못하는 예수, 바다나 물 질에 대해서 잘 모르는 예수가 그물을 내리란다고 이 시간 그런 곳에다 그물을 내리니? 정말 바보 아냐?” 

여러분, 상식적으로 그 시간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는다는 것은 무모한 행동입니다. 일반적으로 고기는 낮에는 주로 얕은 곳에 수초가 있거나 바닥에 우묵한 웅덩이가 있는 곳에 있고, 밤에는 주로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물고기는 새벽이나 밤중에 이동하고 밝고 뜨거운 낮에는 거의 이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아무리 먹이를 입 앞에 갖다 주어도 입을 대지 않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밤에는 고기떼가 어느 곳으로 모이고, 새벽녘에는 어느 곳으로 모이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밤중에는 그물을 깊은 곳에 던져야 하며, 반대로 새벽녘에는 그물을 얕은 곳에 던져야 한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지난 밤 그 인근에서 밤새도록 작업을 한 결과 그 부근에는 고기가 없음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명령은 “안 됩니다”라고 거절할 수밖에 없는 요구였습니다. 그 요구에 따랐다가는 둘러 선 사람들에게 웃음을 살 일이었지요. 

➌ 그러나 그렇다고 매정하게 거절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큰 감동을 받고 있었는데, 만약 자신이 그의 명령을 거절하면 예수님의 권위나 지금까지 들은 말씀의 감동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거절할 수도, 순종할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➍ 예수님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명령이 당혹스러운 네 번째 이유는 베드로 자신이 지금 너무나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이 잘 풀리고, 수확이 많으면 그 일은 별로 힘들지 않지만, 잘 안 되는 일, 결과가 나쁜 일일수록 피로도는 더하기 마련입니다. 한 숨도 자지 못하고 밤을 새는 것만으로도 피로한 일인데, 밤새도록 그 힘든 그물 질에도 불구하고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으니 더더욱 피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싫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일을 시작하라는 것은 정말 난감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속으로 수많은 갈등을 했을 베드로는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는 순종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는 심한 무력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밤이 새도록 그물 질을 했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를 자기 안마당처럼 훤하게 알고 있었고, 철에 따라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어떤 어종이 어떻게 잡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지난 밤은 왜 그렇게 고기가 잡히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은 간 밤의 허탕친 일과 피로를 말끔이 가져가 버리는 신기하고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명령하실 때, 그 부르심과 명령에 대해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권위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한 것이죠. 

베드로는 배를 저어 깊은 곳으로 갔습니다.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조업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친구들이 웅성거리면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비웃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명령을 도저히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 해보고도 싶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출신 어부로서의 물과 고기에 대한 感, 평생을 그물 질하면서 갖게 된 經驗, 自尊心, … 모두 다 버리고 오직 말씀 하나만 의지하여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물의 길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짧게는 몇 십 미터에서 백 미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깊은 곳 어느 지점에서부터 내리기 시작하여 끝까지 다 내린 후, 다시 첫 자리로 돌아와 그 그물을 끌어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여러분!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죠? 밤도 새벽도 아닌 벌건 대낮에, 얕은 곳이 아니고 깊은 곳에서, 분명히 고기가 없어야 할 곳에서, 엄청난 고기들이 그물에 걸렸을 뿐 아니라 그물이 찢어 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잡혔든지, 저 뭍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동료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배를 가지고 오라고 하여 그 배까지 가득 채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기적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상식과 경험과 감을 뛰어넘는 일이 벌어진 것이죠.

2) 베드로의 자기 발견

그런데 여러분, 이 사건은 사건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사건의 중심에 있던 베드로를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던 베드로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불가능한 시간, 불가능한 장소, 대부분의 고기들이 바닥이나 수초 사이에서 잠자듯이 멈추어 있는 그 시간에, 이렇게 많은 고기를 잡은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세대들에게서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뭍으로 오자마자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으로서는 이런 일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분이 자신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 그리고 자신은 너무나 많은 한계를 지닌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물을 내리기 전까지는 “선생”이라고 불렀으나 이제는 “주여”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베드로의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이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주여”라고만 한 것이 아닙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 무슨 뜻입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뵌 후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라고 했지 않습니까?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가지는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도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무서워 떨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을 감당할 수 없어 무릎을 꿇었고, 자신의 한계를 바라볼 때 견딜 수 없어 “나를 떠나 달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이 기적을 만들어내신 당신은 누구입니까? 갈릴리 바다에서 나서 자랐고 고기잡이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일보다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저를 이렇게 무기력한 인간임을 깨닫게 하신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왜 오늘 아침 저의 배를 타셨으며, 왜 제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는지요?’ 여러분, 이렇게 베드로처럼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 사람,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계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신학교 교수님의 설교에서 본 내용입니다. 5대째 예수님을 믿는 집안에서 나서 신학교에 입학한 그 분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성령을 체험한 것은 신학교 수업 중에 일어났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순간 그의 모든 생각은 멈추어 버렸습니다. 마치 뒤통수를 망치로 ‘쾅’하고 맞은 것처럼 순간적으로 멍해졌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캄캄해졌습니다. 사방이 조용했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환해지면서 자신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님이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옷을 벗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추하고 더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나 더러운지 너무나 시커먼 시궁창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몸에는 평소 자신이 숨기고 싶었던 죄성들이 모두 덕지덕지 붙어 있었습니다. 수치스러운 모든 죄가 다 보였습니다. 갑자기 무섭고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그의 앞에 주님이 서 계셨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겁이 나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때 그는 외쳤습니다. “주여,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바로 알았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거룩한 척, 바른 생활하는 전도사인 척, 모범적이고 똑똑한 척 했는지 …,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온갖 욕심과 죄로 남을 정죄하고 더러운 생각을 해 왔는지 ….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베드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을 만들어 낸 예수님 앞에서 비로소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갈릴리 바다가 안방과도 같다고요? 물고기의 생태와 이동에 관한한 박사라고요? 오늘 이 근처에는 고기가 없다고요? 심신이 지치고 낙심한 터에 위로를 받아 감동 받는 척 해주었더니 다짜고짜 명령을 내린 사람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었다고요! 아닙니다. 

그 순간 베드로가 경험한 것은 한 인간의 한계였고, 그 한계를 뛰어넘은 한계 없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이것 밖에 안 되는 구나!’ ‘그런데, 이 예수라는 분은 정말 놀라운 분이지 않는가?’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한계를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요? 그리고 한계가 없으신 주님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자신의 한계를 알면 알수록, 그리고 한계를 뛰어넘어 계신 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 지식이 여러분을 복되게 만들 줄 믿습니다.

3) 갈릴리 어부 집단 실종 사건

벌건 대낮의 물고기 豊漁 事件과 베드로의 大悟覺醒! 이 두 가지의 연결된 사건은 또 다시 다른 한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갈릴리 어부 ‘집단 실종 사건’입니다. 물론 제가 여러분의 주의를 끌기 위하여 붙인 제목이지, 실제로 갈릴리 어부들이 누군가에게 납치되었거나 실종된 것은 아닙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날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물고기 豊漁 事件’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그 사건에 참여했던 적어도 네 명 이상의 어부들을 어부 일을 그만 두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갈릴리 바다를 떠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어떠함과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베드로, 그리고 자신 앞에 계신 분은 그 모든 한계를 초월해 계신 분임을 알게 된 베드로를 향해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10절,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마태복음 4장 19절에서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또 다른 명령은 무슨 의미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너희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잘 난 척 하고, 아무리 가진 척 하고, 아무리 높은 척 하고, 아무리 있는 척 해도 자신이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한계를 알려주는 역할을 해 다오!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다오! 인간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으신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다는 것을 외치는 역할을 해 다오! 그리고 나를 믿고 따르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능력을 누릴 수 있다는 소식을 알리는 역할을 해 다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습니다. 그 부자는 재산이 늘어나는 재미에 빠져있었습니다. 자신의 농지에서 엄청난 수확을 거두어 현재의 창고로는 더 이상 곡식을 쌓아 둘 수 없게 되자, 넘쳐나는 곡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즐거운 고민을 하던 중, 현재의 창고를 헐고 더 크게 짓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부자를 향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 자신의 한계와 그 한계를 넘어 계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이 그가 “어리석은 자”라고 불린 이유였고, 결국 자신의 수고한 것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이 그가 어리석은 이유였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어리석은 부자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부자와 같은 사람들에게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보내시려고 하셨습니다. 비록 물고기를 잡는 일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그러나 한 사람이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지를 아는 자리로, 사람들을 세상의 한계 안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만드는 일을 하라고 부른 것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던 베드로는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주님의 명령 역시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명령을 받아들여 고기 잡는 일을 그만 두고 갈릴리 바다를 떠난 것입니다. 

3. 한계의 파도를 타도 더 깊은 데로 …

연세가 드신 분들은 옛날 극장에서 보았던 광고 하나를 기억하실 겁니다. 전국 극장에서 광고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온 광고가 “종로5가 피보, 피보, 피보 약국!”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피보 약국의 피부병 특효약은 전국 곳곳에서 날개돋힌 듯 팔려 나갔고, 약사 김광석 씨는 지방의 고객들을 위해 지방 약국에 자신의 약을 위탁 판매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었습니다. 한창 잘나가던 1979년 어느 날, ‘보건 관리법 위반’에 걸려 구속영장이 발부되었고, 벌금 8억 원이 선고되었습니다.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액수였습니다. 아마 요즘으로 환산한다면 100억쯤 되지 않을까요? 그 일은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서 그를 시기한 한 사람의 밀고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설마 그 사람이…’ 그는 배신감과 억울함과 절망으로 전국을 떠돌며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피신한지 6개월 째, 그는 경남 양산에 있는 어느 암자에 있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였습니다. 절을 지어 바쳤고, 신도회 회장도 맡았으며, 그의 어머니는 승복차림으로 절에서 지내는 날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절을 찾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그 암자의 작은 골방에서 숨어있던 그가 우연히 누렇게 바랜 신문 한 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래 된 신문이라 지저분했지만, 그래도 6개월 만에 보는 신문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 신문에 “무허가 약사 벌금 8억여 원 선고.”라는 제목이 있는 것을 보고는 피식 웃었습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또 있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러면서 신문을 집어 들고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읽다보니 그 기사는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렇게 오래 된 신문을 그 방에 갖다놓은 것일까요? 도무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인생을 섬세하게 조율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를 악기처럼 다루는 그 조율사는 누구인가?’ 그러는 순간, 그는 하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오, 하나님!”이라는 외마디를 외쳤고, 그리고는 ‘불교 신자인 내가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도 그 하나님께 수많은 질문을 쏟아 냈습니다. ‘하나님, 지금 저를 시험하고 계시는 겁니까?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시험이라면 이 시험을 통과하면 하나님께서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실 거지요? 이 시험이 끝나면 저도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이런 질문과 함께 갑자기 눈물이 솟구쳤고 문밖에서 여명이 쫙 비치면서 순간적으로 자신을 관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가슴속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렸고, 그 안으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것이 통과하면서, 가슴속에 꽉차있던 분노, 억울함, 증오, 서러움, 불안, 걱정 근심이 자디잘게 부서져 쏟아져 나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평강과 희락이 채워졌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몸이 눈물과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용기와 자신감이 새롭게 솟구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경찰서를 찾아가 자수했습니다. 불교신자인 그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틀림없었습니다. 그 후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고, 1984년에 참존 화장품회사를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참존 화장품의 김광석 회장, 그도 한계상황에서 주님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비록 한계상황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으로 인하여 도리어 축복의 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을 만난 분은 없습니까? 어떤 일에 대해 해도 해도 도무지 안 될 때, 잘 해 오던 일이 어느 날 갑자기 꽉 막힐 때, 자신으로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일을 만났을 때, 그런 절망적인 상황이 아마 여러분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적인 상황은 “절망”이 아닙니다. “한계상황”은 “한계”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그것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도록 여러분을 인도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한계상황이 능력의 주님을 만나도록 여러분을 인도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역설적인 진리가 무엇입니까? 절망이 깊으면 깊을수록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얻는 즐거움이 크다는 사실입니다. 한계상황이 크면 클수록 주님의 더 놀라운 능력을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지 베드로가 주님을 만난 그 갈릴리 호숫가처럼 여러분을 만나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자리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으로 인하여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보시고, 아직도 자신의 한계에 갇혀 꼼짝 못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경험한 그 놀라운 복을 전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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