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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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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빌립보서 4:4-7)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나의 사랑, 나의 기쁨, 나의 면류관이라고 부르며 사랑을 고백한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여인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서로 하나가 되라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멍에를 함께 한 동역자에게 이 두 여인이 서로 한 마음 되도록 도와주라는 부탁을 덧붙였습니다.  누군가 중재자가 되어 서로 하나가 되게 도와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유오디아나 순두게는 그 이름이 있는 생명책에 있는 하늘나라 시민들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빌립보 교회의 여성 지도자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을 내고 있었지만 두 마음으로 나뉘어 교회 전체에 끼치는 영향은 좋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면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보서의 중심 메시지는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관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두 마음으로 나뉜 빌립보 교회가 선택하고 따라야 할 것은 유오디아의 마음도 순두게의 마음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라도 변하고 오염될 수 있습니다.  유오디아도 순두게도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유오디아나 순두게가 복음을 위하여 힘써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더 이상 개인의 고집과 주장을 붙들고 있지 말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함께 가져야 했습니다.  내 생각, 내 주장을 잠시 내려놓고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질문하고 그 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길만이 서로 하나되게 할 수 있고 교회를 평안하게 세워가는 해결책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간곡히 부탁합니다.  그리스도의 낮은 마음, 십자가를 지신 희생의 마음,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과 하나가 되는 그 마음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가져야 할 마음이며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곧이어 오늘 읽은 구절에서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이 그리고 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나될 수 있는지 실천방안을 제시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기쁨, 관용, 염려, 기도, 감사 그리고 평강 이런 용어들이 오늘 말씀의 중심주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들도 사랑하는 말씀이지만 설교자가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말씀은 언제 읽고 묵상해도 늘 은혜롭고 위로가 됩니다.  기쁨은 바울의 편지들에서 자주 언급되는 그리스도인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앞부분에서 밝힌 빌립보서 전체 내용에 근거합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감옥에 갇힌 노사도 바울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나이도 많고 건강도 좋지 않은데다 언제 사형선고가 내릴지 모르는 상황에 교우들은 마음을 졸이며 바울의 석방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중이었습니다.  바울을 위로하고 돕기 위하여 선교헌금을 모아 에바브로디도를 대표로 보냈었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을 잘 아는 바울은 하루 속히 사람을 보내어 그들의 걱정거리를 덜어주고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가 돌아가는 편에 이 기쁨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울이 선포한 이 기쁨은 주 안에서 얻는 기쁨입니다.  하늘에 시민권을 둔 사람들이 누리는  여유로움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기다리는 기쁨이며, 한 마음으로 섬기는 따뜻한 교우관계에서 얻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기쁨이며 나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의 이런 배경을 무시하고 ‘항상 기뻐하라’는 한 구절만 가지고 무조건 기뻐해야 좋은 믿음이라고 해석하면 바울이 본래 전하고 싶었던 의도와 거리가 멀어지고 맙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잃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염려하는 마음, 나누어진 마음을 기쁨과 감사와 기대감으로 바꾸라는 권고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한 바울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하였습니다.  관용은 친절하고 넉넉한 마음, 이치에 합당하게 대하는 마음 그리고 너그럽게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을 감시하는 로마 군인들 중에 바울이 어떤 사람임을 알고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도 있고 거칠게 대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며 어찌하든 그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나를 괴롭게 만드는 사람을 용서하고 너그럽게 대하는 힘이 어디서 나올까요?   내 속에 가득 차있는 기쁨이 이웃에게 관용을 베풀 여유를 줍니다.  삶의 문제로 고민하고 허둥대며 살고 있으면 내 마음이 불편하고 조급해져 남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집니다.  때로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모함을 받기도 합니다.  뒤에서 수근거리고 숙덕거리는 말들이 들려옵니다.  이럴 때 내 마음이 조급하고 여유가 없으면 더 큰 상처를 받고 맞서 싸우고 싶은 생각만 듭니다.  오직 땅의 것에 집착하여 눈에 보이는 환경과 어려움만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맘이 오그라들고 조급해지고 작은 일에도 섭섭함을 느끼며 즉시 억울함을 표현합니다.  나를 비방하고 조롱하는 사람에게 보복하려고 한데 어우러져 진흙탕 싸움을 벌입니다. 용서와 이해라는 단어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기어코 다투며 함께 망가집니다.

그러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가지면 사소한 어려움은 모르는체 지나갑니다.  내가 기쁠 때 다른 사람에 대한 여유도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집안의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산 농부는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집도 가재도구도 다 팔아 남은 것이 없지만 그보다 더 귀한 보화를 얻었으니 그런 것들은 잃어도 문제가 아닙니다.  참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은 그리스도인은 이런 기쁨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알고도 모르는체 하고 듣고도 못들은 척하고 지나갈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근거없는 수근거림이나 비난에 일일이 반응하고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여유로움은 천국시민이 가지는 특권이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의 관용을 알게하십시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넉넉한 마음을 알게 하십시오.  특히 주 안에서 한 마음으로 섬겨야 할 믿음의 가족들에게는 더욱 그리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가까이 오십니다.  형제자매를 판단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다시 오실 주께서 선과 악을 분별하시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형제들을 판단하고 분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대신 너그러움으로 서로를 돌아보고 주 안에서 하나가 되십시오.  주님이 오실 때가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기쁨은 나의 죄를 용서받음에서 나오고 그 기쁨은 남을 용서하고 품어주며 불쌍히 여기는 관용을 나타내 보입니다.     

바울은‘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하였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은 모든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깁니다.  ‘아무 것도’라는 말이 어디까지 해당이 될까요?   말그대로 아무 것도, 그 어떤 문제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일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빌립보서 전체의 내용을 배경삼아 이 말씀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형편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면서 그저 지나가는 말로‘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세요.  모든 일이 잘 될겁니다’하는 말은 아무 위로도 힘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형편을 잘 아는 사람이‘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일이 잘 될겁니다’하는 말은 ‘당신의 염려에 나도 한 마음입니다. 당신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형편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세요’ 하는 말은 서로 공감하고 있는 그 문제라는 이해가 있으며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기쁨의 편지를 쓰는 바울은 편지 속에 염려하는 마음 또한 드러나 보입니다.  유대교 율법주의와 이단이 교회를 미혹하여 분열시키고 성도들이 믿음에서 떠날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교우들이 서로 한 마음이 되지 않아 불편한 관계로 지낸다는 말을 듣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교우들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 바울은 왜 염려하는 모습을 보일까요?   무엇을 염려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고 애써 태연한 척 아무 문제도 없다고 큰 소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믿음이 좋을까요?  속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거리를 두고 고민하면서 염려하는 모습을 보이면 약점을 잡힐까 두려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애써 태연한 척하는 모습이 더 애처롭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염려할 일이 없을까요?   설교하는 목사는 아무 것도 염려할 일이 없다는 말인가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설교하는데 그렇다면 아무 걱정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살면 된다는 말인가?  도대체 그것이 가능할까? 반문하는 분도 있을겁니다.  바울도 빌립보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요지는 이렇습니다.  나의 어려움을 염려하는 여러분 뿐 아니라 여러분을 염려하는 나 바울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 염려하는 대신 기도하자는 권면입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주저앉아 무책임하게 지내는 것보다 염려하는 것이 적당한 긴장감을 주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빨리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염려하는 행동 그 자체만으로 무슨 일이 해결되거나 발전되지 않습니다.   앉아서 염려하는 대신 몸으로 움직이고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할 일이 있지만 기도하십시다.  믿음의 기도, 감사의 기도가 우리의 기쁨을 배나 더하게 하고, 우리를 관용의 사람이 되게 하며, 염려를 평안으로 바꾸어줍니다.  시험을 앞둔 학생들, 졸업을 앞두고 취업과 진로문제로 고민하는 젊은이들, 자녀의 학업과 진로 그리고 신앙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님들, 친구관계, 결혼문제, 건강의 문제, 재정문제 등 우리에게도 염려할 일들이 날마다 생깁니다.  걱정거리가 너무 많아 입맛을 잃고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럴 때 염려만 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기도할까요?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아룁시다.  감사의 기도, 이것이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구하십시오.  아무 일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감사로 기도하라는 말은 댓구형식입니다.  예수께서도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하셨습니다.  내가 아무리 고민하지만 나의 생명을 한 시간이라도 연장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염려만 하면 얼마가지 않아 짜증이 치밀어 올라오고 불평이 입에서 튀어나옵니다.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고 내가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인지 자신이 없어집니다.  염려해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식음을 전폐하고 고민하며 고행하는 사람들처럼 슬픈 얼굴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성도의 모습은 아닙니다.  

기도하되 하나님께 원망하고 투정부리듯 하지 말고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구하십시오.   지금까지 주신 것도 감사하고 지금도 베푸시는 은혜에 감사하고 앞으로 주실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함으로 기도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입에서 불평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순간은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잠시뿐이고 돌아서면 그 즉시 마음이 약해져 무엇을 먹어야 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두려워 불평하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염려는 불신앙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신뢰하지 못하고 내 힘으로 살겠다고 고집할수록 염려거리는 더 쌓아져 갑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이 염려로 충만한 나의 마음을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바꾸십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다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으로 우리를 지키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기대하였던 것 이상으로 더 좋은 것으로 채우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염려하는 나의 마음과 두려운 생각들을 지키십니다.  어떻게요?  로마 군사들이 감옥에서 바울을 철저하게 지키고 감시하는 것처럼 지켜주십니다.  로마 군대가 빌립보 성을 철통같이 지키는 것처럼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굳게 지키십니다.   

어둡고 축축한 감옥에서 항상 기뻐하라 말할 수 있는 바울의 확신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를 감싸고 있습니다.  죽으면 그리스도를 뵙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할 것이니 좋다는 담대함과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감옥을 나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 여러분의 믿음 성장에 유익하고 여러분에게 기쁨을 선물할 수 있으니 죽지 않고 살아 나가는 것도 좋다는 기대와 소망이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신 분이 그리스도시니 내가 죽든지 살든지 나에게는 모두 좋다는 바울의 적극적인 신앙고백입니다.   바울의 기쁨과 평안은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이 기쁨은 바울이 억지로 꾸며내 보이는 기쁨이 아닙니다.  세상사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와는 또 다른 기쁨이며 평안입니다.  내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것은 내가 수련하고 노력하여 얻는 기쁨입니다.  ‘내 얼굴 모양은 내 힘으로 결정할 수 없지만 내 얼굴 표정은 내가 결정할 수 있다. 오늘의 날씨는 내가 결정할 수 없지만 내 마음의 기상은 나에게 달려있다’는 말은 내 마음의 주인인 내가 마음 먹기에 따라 내 삶을 결정할 수 있다는 불교의 설법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하늘의 기쁨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찬송가469장) 하고 부르는 찬송처럼 내가 노력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은혜로 주어진 기쁨입니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많지 않지만 허탄한데 마음을 두지 아니하고 내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를 위해 지금도 간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신뢰함으로 얻는 선물입니다.  기쁨의 근원이 내 마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과 평강이 여러분의 것이기 바랍니다.

만일 은혜로 얻는 기쁨과 평안이 나에게 없다면 그 이유와 원인을 나에게서 찾아봅시다.  누구의 탓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불편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비뚤어지고 틀어집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비방하며 뒤에서 수근거리는 사람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 상처난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함이 옳습니다.  미움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께 구하기 바랍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주장하고 계십니까?  내가 주인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까?   시민권을 하늘에 둔 천국시민입니까?   이 땅의 것에 얽매인 사람입니까?   나의 모든 이해와 감각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염려하는 마음과 두렵고 근심하는 내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영혼 내영혼 평안해 내영혼 내영혼 평안해’(찬송 470장) 하고 부르는 찬송가사처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 가운데 오늘도 풍파 많은 세상에서 감사찬송을 부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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