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베레스 웃사 (삼하 6:1-11)

  • 잡초 잡초
  • 437
  • 0

첨부 1


베레스 웃사 (삼하 6:1-11) 
  

지난 주 국민일보에 탈레반에 희생된 국제지원단 (IAM)소속 10명의 의료선교사에 대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참혹한 땅 아프간을 위해 그들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면면을 보면, 안과의사 톰 리틀(61)과 댄 테리(64)는 항상 식염수병을 들고 다니다가 탈레반 병사들이 눈이 아프다고 하면 식염수로 눈을 적셔 고통을 완화시켜주던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치과의사 토마스 그램스(51)는 부르카를 입은 무슬림 여성들의 치아를 치료하기 위해 협상하는 법을 배울 정도로 열성적인 선교사였습니다.
영국인 캐런 우(36)는 결혼을 앞둔 여성으로서 연봉 15만 달러(1억 8천만원) 의사직을 포기하고 카불로 갔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이 섬겼던 사람들에 의해 피살되었습니다.
기사를 보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의 손과 발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헌신되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저 자신을 뒤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한 다윗은 두 번에 걸친 블레셋과의 독립 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였습니다.
또 그동안 가나안 부족의 지배 아래 있던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통일 이스라엘의 새로운 수도를 삼음으로써 정치 군사적으로 안정적 기반을 확립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무엘 하 5장에서 배운 내용이지요?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다윗은 엘리 제사장 당시 아벡 전투에서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가 반환되어 바알레유다의 아비나답의 집에 약 70년 동안 방치되었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여 다윗성에 안치하고자하였던 것입니다.
‘법궤’라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성물입니다. 

왜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고자 했을까요?
이스라엘은 정치 군사적으로 안정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에게는 그 민족을 향한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진정으로 하나님 중심의 나라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그 가시적 표식으로서 법궤를 왕국의 수도로 옮기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옮길 때 지은 시가 시16, 24, 68편입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왕으로 모시고 싶어 하는 다윗의 마음이 잘 녹아 있습니다. 

몇 군데 인용해보지요.
시16: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24:7-8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시68:19절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런데 운반하는 도중에 책임자였던 웃사가 법궤가 땅에 떨어지려고 하자 손으로 잡았다가 그 현장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7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오늘 설교 제목인 ‘베레스 웃사’란 말은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다윗왕도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오기를 두려워하고 주저하였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을 섬기려는 열심이 대단하였지만 그 방법은 자기 식대로 였습니다.
본문이 다윗이 사용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장황하게 기술한 것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1절에 보면, 무리 3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3절에 보면, 새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5절에 보면,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 등 각종 악기로 연주했습니다.

거창하고, 대단했습니다. 
다윗의 열심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자기식대로입니다.
그래서 웃사가 죽었던 것입니다.

이때 가드 사람 ‘오벧에돔’이 그 법궤를 자기 집으로 옮겨감으로 크게 축복받았습니다.
11절 “여호와의 궤가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법궤가 3개월 동안 머물러 있는 동안 오벧에돔이 받은 축복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오벧에돔은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12절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② 오벧에돔은 잉태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본문과 병행구절인 대상26:8절에 보십시오.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그들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 하는 자이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이 명이며”

보십시오.
똑같이 법궤를 옮겼는데 웃사는 죽었고, 오벧에돔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똑같이 교회에서 봉사했는데 한 사람은 축복을 받았고, 한 사람은 죽고 말았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지 않아요?
본문을 묵상하면서 너무도 귀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겨야 하는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오늘은 웃사가 죽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섬김을 점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웃사가 죽게 된 것은 법궤를 수레에 싣고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편리주의’라고 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자들은 이 편리주의를 주의해야 합니다.
4절 “그들이 산에 있는 아바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에 의하면 법궤는 거룩한 것으로서 그것을 옮길 때에는 선택받은 레위지파 중에서도 특별히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도록 되어있습니다. 
민 4:15절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민 7:9절 “고핫 자손에게는.......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 
그런데 웃사는 메고 가야 할 법궤를 수레에 싣고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편안하게 운반해보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요? 
어깨에 메는 것보다 수레에 싣고 가는 것이 훨씬 편하고 쉽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수레에 싣고 갔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까?’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내 입장에서 ‘편한 대로’ 하는 봉사의 태도를 경계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교회는 매년 당회 때에 10년, 20년, 30년 근속봉사 상을 수여합니다.
교회학교 교사를 하든지, 찬양대를 하든지, 속회 속장을 하든지, 차량 관리를 하든지 어떤 분야에서 사역을 하던지 10년, 20년, 30년 동안 시종여일하게 봉사한 교우들을 격려합니다. 
여러분! 10년, 20년, 30년을 봉사한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얼마나 많은 방해거리가 있었겠습니까? 
자녀들의 진학문제가 봉사를 주춤하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봉사할 마음을 싹 가시게 하는 시험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신앙적인 슬럼프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방해거리를 극복하고 시종여일 봉사한 교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교회가 이렇게 부흥되는 것은 어디 몇 사람의 수고로 가능하겠습니까?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내 입장에서 내 편한 대로 봉사하려는 유혹을 받는지 모릅니다.
좋으면 하고 싫으면 그만 둡니다.
시간이 있으면 하고 시간이 없으면 그만둡니다.
마음에 들면 하고 마음에 안 들면 그만 둡니다.
우리는 웃사의 죽음에서 편리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2. 웃사가 죽게 된 것은 이방인들의 방법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세속주의’라고 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이 세속주의를 주의해야 합니다.
삼상 6:10절 이하를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있으니까 각종 질병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법궤를 본처인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작정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법궤를 돌려보냈습니까? 
그때에 그들은 두 마리의 암소를 끌어다가 수레에 실어서 보낸 일이 있습니다. 

‘벧세메스로 향하는 암소’ 얘기 아시지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생각대로 방법을 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웃사가 이런 이방인의 방법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우마차에 끌고 갔던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봉사 동기는,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름 내기’일 경우가 많습니다. 
신문에서는 금액에 따라 활자크기도 다르게 이름을 내주고, 방송에서 현장 중계를 하여 얼굴을 비쳐줍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하나님만 알아주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람을 의식하고 봉사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만 의식하고 봉사합니다. 우리의 봉사가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들의 반응에 만감하고, 사람들의 박수소리에 신경을 쓰게 되면 이미 잘못된 봉사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알아주면 대만족이라는 고백 속에서 이뤄진 섬김이 참 섬김입니다.

마 6:2-4에 보면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기보세요.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는 웃사의 죽음에서 세속주의-이름을 내고,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듣는 봉사-를 극복하라는 교훈을 받습니다.

복음성가-당신의 그 섬김이

3. 웃사가 죽게 된 것은 손으로 하나님의 궤를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합리주의’라고 합니다. 
6절 “그들이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그랬더니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언뜻 보면,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소들이 뛰므로 법궤가 흔들려 떨어질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대로 가만히 놔두면 법궤가 떨어져 박살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손을 뻗어 법궤를 붙잡았을 뿐입니다.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생각 있는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까?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가 아닙니까?
누가 보더라도 타당한 행위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법궤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웃사를 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진리는 ‘합리적인 것이라고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합리적인 생각들을 모아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입니다.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백미는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

주님은 합리적인 인간의 뜻이 아니라 비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드렸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웃사의 죽음에서 합리주의를 뛰어 넘을 것을 교훈 받습니다.

이제 말씀을 바치겠습니다. 
여러분의 봉사의 눈물과 땀은 하나도 헛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어떻게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죽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봉사가 축복이 되려면,

① ‘나 편한 대로’라는 편리주의를 뛰어넘어야 하고,
② 사람의 칭찬과 박수에 신경을 쓰는 세속주의를 뛰어넘어야 하고, 
③ 사람의 생각대로 하려는 합리주의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에게 봉사의 기쁨, 봉사의 축복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