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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쓰러지지 않는다 (사 32: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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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쓰러지지 않는다 (사 32:15-20)


[그러나 주님께서 저 높은 곳에서부터 다시 우리에게 영을 보내 주시면, 황무지는 기름진 땅이 되고, 광야는 온갖 곡식을 풍성하게 내는 곡창지대가 될 것이다. 그 때에는, 광야에 공평이 자리잡고, 기름진 땅에 의가 머물 것이다. 의의 열매는 평화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 나의 백성은 평화로운 집에서 살며, 안전한 거처, 평온히 쉴 수 있는 곳에서 살 것이다. (비록 삼림이 우박에 쓰러지고 성읍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도,) 씨를 뿌리는 곳마다 댈 물이 넉넉하고, 어디에서나 안심하고 소와 나귀를 놓아 키울 수 있으니, 너희는 복이 있다.]

• 안일하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사르곤2세의 아들입니다. 산헤립은 아카드어로 신-아흐헤-리바입니다. 신(Sin)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숭배되던 달(月)신의 이름입니다. 산헤립은 ‘신이 그의 형제들을 증가시킨다’는 뜻입니다. 산헤립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전쟁을 치렀고, 팔레스타인 지역 원정에도 직접 나섰습니다. 

그는 파죽지세로 유다의 요새화된 성읍들을 점령했지만, 예루살렘만큼은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된 <산헤립의 기둥>에는 그의 팔레스타인 원정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자신이 예루살렘을 ‘둥지 안에 든 새처럼 포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것은 마치 그런 기록을 예상하기나 한 것처럼 이사야는 백성들을 이렇게 격려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새가 날개를 펴고 둥지의 새끼를 보호하듯이, 만군의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신다. 감싸 주고 건져 주며, 다치지 않게 뛰어넘어서, 그 도성을 살리신다.”(사31:5)

산헤립의 침공은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으로 말미암아 유다인들이 입은 피해는 심대했습니다. 아직 그 전쟁이 진행 중일 때 이사야는 예언자로서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합니다. 첫째는 그 상황의 처절함을 인식하지 못한 채 안일한 삶을 계속하고 있는 이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일이었고, 둘째는 낙심한 백성들을 일으켜 세워 새로운 역사를 예비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자족에 겨운 삶을 살고 있는 지도층 사람들에게 죽비를 날립니다. 굶주리다 죽고, 전쟁터에서 죽고, 희망이 없어 죽는 백성이 부지기수인데도 그들은 호사스러운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사정일 뿐 자기들의 현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 때 ‘우리에게 빵을 달라’는 군중들의 외침에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던 루이16세의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를 닮았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는 ‘안일하게 사는 여인들’, ‘걱정거리가 없이 사는 딸들’을 향해 “일 년이 채 되지 못하여 몸서리 칠 일이 생길 것”이고, “포도농사가 망하여 거둘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밭농사도 망치고, 사람들이 살던 땅에는 가시덤불과 찔레나무가 자랄 것이고, 기쁨이 넘치던 집과 흥겨운 소리가 그치지 않던 성읍은 적막하게 변할 것이고, 견고한 요새는 파괴되고 망대와 탑이 무너져 돌무더기가 될 것이니 차라리 가슴을 치라고 말합니다.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눈 밝은 이사야의 눈에는 훤히 내다보이는 현실입니다. 

• 주님의 영을 보내 주소서

그러면 절망의 노래를 불러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투르 드 프랑스 대회 7회 연속 우승 기록을 간직하고 있는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은 고환암으로 고생하면서도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난 달린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긴 합니다. 가능성이 80%가 되어도 주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시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해보지도 않고 지레 절망하는 것은 약자의 버릇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요 부정입니다. 

하지만 한번 무너진 마음은 일으켜 세우기 어렵습니다. 그때야말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때입니다. 시체처럼 널브러진 우리 마음에 주님의 생기가 주입되어야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바람 빠진 타이어로는 먼 길을 달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의 도움 없이는 선한 싸움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요엘 선지자의 말은 강력합니다.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욜2:28-29)

하나님의 영은 우리 가운데 희망으로 발현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계신 곳에서 생명이 깨어납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은 하나님의 바람을 만나 하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우리 영혼에도 하나님의 신바람이 불어오면 우리는 새 사람이 됩니다. 새 사람들이 이룬 삶은 축제가 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은혜 안에서 그들은 서로에 대한 경계심과 경쟁심을 버렸습니다. 의지적으로 버린 것이 아니라 저절로 사라진 것입니다.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하나가 되는 기쁨을 맛보았기에 그들은 유무상통하며 지냈습니다. 새로운 인류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사야도 같은 비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 높은 곳에서부터 다시 우리에게 영을 보내 주시면, 황무지는 기름진 땅이 되고, 광야는 온갖 곡식을 풍성하게 내는 곡창지대가 될 것이다. 그 때에는, 광야에 공평이 자리잡고, 기름진 땅에 의가 머물 것이다.”(15-16)

자라는 아이들을 보십시오. 아이들은 병을 앓고 나면 재주가 하나씩 늘어난다고 하지요? 이게 생명의 신비입니다. 이사야는 앗시리아와의 전쟁 이후를 내다보며 말하고 있습니다. 황무지가 기름진 땅이 되고, 광야는 곡창지대가 되는 꿈은 몽상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에게 값싼 위로를 제공하기 위한 립 서비스가 아닙니다. 예언자는 보는 사람(Seer)입니다. 황무지와 광야가 기름진 땅으로 바뀐다면 우리는 그것을 일러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기적이 있습니다. 억압과 착취와 악의가 가득하던 땅에 ‘공평’이 자리잡고 ‘의’가 머무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런 세계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런 세계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낡은 것들이 무너져야 합니다. 힘 있는 자들이 특권을 누리고, 약자들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세상이 끝나고, 공의가 물 같이 흐르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는(암5:24)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法이라는 한자는 축약된 것이라 합니다. 원래는 ‘갈 去’ 자 밑에 ‘외뿔 양’을 뜻하는 ‘록鹿’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신화적 동물인 이 외뿔 양이 마을에 정의를 훼손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뿔로 받아서 마을 밖으로 제거(去)한다고 믿었습니다. 왼편에 있는 ‘삼 氵’변은 법이 모름지기 늘 아래로 흘러서 평평해지는 물의 성격을 닮아야 함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불의의 제거와 공평함의 회복이 법 정신의 핵심입니다. 

• 의의 열매

이 땅에 공평과 의가 자리잡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샬롬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의의 열매는 평화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 나의 백성은 평화로운 집에서 살며, 안전한 거처, 평온히 쉴 수 있는 곳에서 살 것이다.”(17-18)

샬롬이란 모든 생명이 저마다의 생명의 값을 온전히 누리며 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전쟁, 테러, 질병, 가난, 소외감, 외로움, 불안감, 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사라질 때 우리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현실에 대해 불평불만이 많습니다. 부정적인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화를 잘 냅니다. 

그의 마음은 늘 외부 세계와 전쟁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생각을 중심으로 세상을 재구성하고 싶어합니다.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일단 경계심을 갖고 대하고, 힘의 우위가 분명하면 동화시키려 하고, 그렇지 않으면 도외시합니다. 그들은 어울리며 사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은 늘 복잡하고 무겁습니다. 평화가 없는 것은 바깥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나마스떼’ 하고 인사한다고 합니다. ‘당신 속에 있는 하나님께 인사드립니다’라는 뜻입니다. 현실의 삶에서 그들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사말 자체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평화는 이처럼 우리가 서로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낼 때 시작됩니다. 의와 공평이 자리잡은 세상에서는 누구도 차별을 받지 않습니다. 가문이 미미하다고, 배운 것이 없다고, 돈이 없다고 무시당하지 않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은 사법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가 시행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화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고후5:18). 어떻게 해야 화해자가 될 수 있을까요? 우선 상대방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차이가 크게 느껴질 때에도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친교를 지향해야 합니다. 이런 검질긴 힘은 우리가 신앙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잇대어 있을 때만 발휘될 수 있습니다.

• 절망 속에 피어나는 희망

20절은 15절의 반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굳이 반복을 하고 있는 까닭은 평화로운 세상의 이미지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본문은 19절에 앞으로 예상되는 시련을 조건절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비록 삼림이 우박에 쓰러지고 성읍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도…”. 이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희망은 오늘에 굳건히 발을 딛고 서서 미래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시련과 고통이 없는 평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없는 세상은 유토피아일 뿐입니다. 유토피아는 ‘없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현실 속에서는 없기에 사람들이 꿈꾸는 것이 유토피아입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누릴 수 있는 평화를 말합니다. 

파커 팔머라는 미국의 교육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미국의 교사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아주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분입니다. 그는 분주한 일상에 지칠 때마다 야생 딸기의 맛, 햇빛에 말라가는 소나무 향기, 해안을 철썩이는 바닷물 소리를 즐길 수 있는 바운더리 워터스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는 자연의 온전함 속에 머물다 돌아오면 자신의 불완전함마저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999년 7월에 불어온 허리케인은 바운더리 워터스를 참혹하게 파괴했습니다. 

20여 분간 휘몰아친 허리케인은 약 2천만 그루의 나무를 쓰러뜨렸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예년과 다름없이 순례 여행을 떠난 그는 소용돌이가 휩쓸고 지나간 처참한 광경을 보며 가슴이 찢기는 듯한 아픔을 느꼈고, 다시 그곳을 찾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몇 해 후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그는 자연이 어떻게 참화慘禍를 이용하여 새롭게 성장하는지, 느리지만 어떻게 꾸준히 그 상처를 치유하는지 보고 놀랐습니다(파커 팔머,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 18쪽)

파커 팔머는 그 광경을 통해 놀라운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삶의 온전함은 완전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짐을 삶의 불가피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는 자각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걷기까지는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우리도 온전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같은 과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와 고통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불가피하게 맞아들여야 할 길벗입니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그렇고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는 일직선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지 않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때도 있고, 뒤로 물러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시면 삶이 든든해집니다. 완전할 수는 없어도 온전할 수는 있습니다.

교회학교 유치부에 다녀온 아이가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셔?” “그럼 어디에나 계시지.” “우리 집에도.” “그럼.” “이 방 안에도?” “그렇다니까.” 갑자기 아이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불쑥 물었습니다. “이 컵 안에도?” 갑자기 대답이 곤궁해졌습니다. 주저하다가 “물론 그 안에도 계시지”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냉큼 컵을 두 손으로 꼭 붙잡더니 “잡았다!” 하고 외쳤습니다. 이 맹랑한 꼬마의 지혜를 배우십시오. 우리가 어디에 있든 하나님은 그곳에도 계시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곳은 하나님의 눈앞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 때 우리는 비애를 견딜 수 있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적습니다. 하지만 해야 합니다.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에 할 때 우리는 절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 속에 희망과 기쁨의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희망은 매일매일 선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공급되는 선물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없지 않지만 그것을 디딤돌 삼아 역사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사야의 비전이 우리의 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우리 모두 생기 충만한 희망의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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