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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개의 은혜 (시 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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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의 은혜 (시 51:10) 

  
시51편은 성경에서 회개에 대해, 가장 잘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오늘 말씀은 표제에 기록된 대로, 다윗의 시다.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나단 선지자가 그의 죄를 지적했을 때, 자기 죄를 뉘우치며, 기도한 내용이다. 

죄를 안 짓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성경의 인물들 중에, 다윗처럼 영성이 뛰어난 사람도 드물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는 쉽지 않다. 정말 다윗은 탁월한 영성의 소유자다. 그러나 유혹 앞에, 다윗은 죄를 짓고 말았다. 

따라서 우리도, 추악한 죄를 저지를 수 있다. 나는 추악한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유혹 앞에 약하다. 또 본능적으로 죄를 범하는 성질이 있다. 죄를 이겨야 하지만, 넘어지고 실패할 수 있다. 

죄는 울타리를 넘어갔다(하타아), 과녁을 벗어났다(하마르티아)는 말이다. 하나님 방식대로 살지 못함이 바로 죄다. (삼하11-12장)에 다윗이 나라를 다스릴 때, 왕들이 출전해야 하는(11:1), 전쟁이 일어났다. 군사들은 모두 전투에 참가했는데, 다윗은 출정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왕은 나가 싸워야 했는데, 나가지 않고, 저녁때 침상에서 일어났다. 벌써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는 죄를 지었다. 다윗은 왕궁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2). 그래서 그 여인을 알아보니, 전쟁터로 떠난 군인의 아내이기에, 그 여인을 자기 침실로 불러들여 동침했다. 

그 여인이 임신하자,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불러들여, 아내와 동침하도록 했다. 그런데 아내와 동침하지 않자, 그를 최전선으로 보내서, 싸우다 죽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았다. 죄는 이렇게 자라난다. 모든 일이 완벽하게 처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삼하11:27下)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다윗은 아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단 선지자가 와서, 어떤 사건을 말한다. 한 성읍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가난한 자는 암양 새끼를, 몹시 애지중지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부자의 집을 방문하자, 부자는 손님을 위해, 자가 양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의 암양 새끼를 잡아서 요리했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다윗은, 화를 내며, 이런 일을 행한 그를, 즉각 처단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나단 선지자는,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하였다. 

지적 받았을 때, 다윗은 눈물로 회개하고 구원받는다. 성경은 구원의 책이다. 구원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할 때 이루어진다. 회개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인 될 수도 없고, 구원을 얻을 수도 없다. 침례 요한은 사역을 시작하며,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설교했다(막1:4).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설교하셨다(막1:15).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양심이 찔린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했을 때, 회개하라고 하였다(행2:38). 회개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회개는 구원받는데, 꼭 필요한 첫 단계다. 

다윗은 온전한 회개한 사람이다. 온전히 회개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다윗은 회개의 은혜가 있었던 사람이다. 오늘 우리도, 회개가 요구되고 있지는 않나요? 이 시간 우리에게 회개의 은혜가 있시기를 바란다. 회개의 은혜가 있는 사람은 어떤가? 

1.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죄를 인정한다. 

죄가 있는 곳에는, 불화가 일어나고, 결국에는 같이 할 수 없다. 같이 죄를 지으면, 그들이 함께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죄인들 사이에도 죄가 들어오면, 갈라서게 되고, 원수가 된다. 

도둑놈이 마음을 같이 하여, 금은방을 털었다. 그런데 털은 물건을 서로 감춰두면, 이런 도둑놈과는 같이 일할 수 없다면서, 결국 다투고 헤어지게 된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죄가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의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롬5:10). 그래서 죄를 해결해야만 한다. 

성경은 감추지 않는다. 성경은 매우 솔직하다. 신앙의 위인들을, 허황되게 꾸미지 않는다. 위인들은 흠이 없다고, 과대 선전하지도 않는다. 성군 다윗처럼 훌륭해도, 죄에 쓰러짐을 보여준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위기 앞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도, 분노하여 사람을 돌로 쳐죽인 살인자라고 말한다. 복음을 들어도,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자신의 죄가 보인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짓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죄를 전혀 보지 못한다.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기에, 참 회개가 없다. 회개하지 않고, 교회만 나오거나, 성경공부를 하거나, 봉사나 헌신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거짓된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라. 회개가 있는가? 

거짓 사도들은 자신이, 어떤 위대한 일을 했다고 하지, 회개를 하지 않는다. 회개를 해도 거짓으로 한다. 신천지는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면, 거짓으로 회개한다. 자신은 전혀 몰랐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바로 이것이 거짓의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것을 모략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자기 죄를 인정함이 하나님의 은혜다. 다윗은 (1-5)에 '내 죄악' '나의 죄' '내 죄과' '내 죄'라고, 9번씩 거듭 시인하고 있다. 회개하려면 먼저 죄를 시인해야 한다.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참된 회개는 현재의 죄를 보게 된다. 거짓 믿음은 과거의 죄는 보아도, 현재는 보지 못한다. 거짓 믿음도 과거는 볼 수 있다. 과거 자신들의 죄를 회개했지만, 현재 영분력이 어두워졌기에, 하나님이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행한 일을 고백해야만 한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주께만 이라는 말은, 사람 앞에 죄를 부인함이 아니라, 특별히(  )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말이다. 

후회와 회개의 본질적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의 잘못을 깨달은 사람을 보고, 우리는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회개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음을 고백했다. 주님께 돌아가야 참 회개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달리 말하면,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저는 변명하거나 탄원할 생각이 전혀 없다. 변명의 여지도, 제 행동을 합리화시킬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다 제가 꾸민 일이다. 모두 제 잘못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시인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물론 다윗은 회개하기 이전에는, 은폐하려고 하였다. 밧세바와 간음하고 난 후에,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불러, 동침하도록 계획을 짰다. 

그리고 그 계획대로 안 되자, 자기의 죄를 은폐하려고, 우리아를 죽임으로, 완전범죄를 꾀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죄를 지적하자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시인하였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죄를 숨기고 감추려고 한다.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는, 바로 죄를 시인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잘못을 빨리 회개한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를 지적했을 때, 즉시 회개했다. 회개가 늦을수록, 자신에게는 손해다. 
하나님은 빨리 회개하기를 기뻐하시지만, 마귀는 돌아서는 시간을 늦추라고 한다. 죄를 사랑하는 우리 마음은, 시간을 끌기를 원한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보면, 어거스틴은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져 있었다. 그는 육체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돌아왔다. 

어느 날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를 이 정욕에서 건져주세요'라고 회개했다. 그런데 그 기도를 할 때, 동시에 마음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이 이렇게 기도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건져주지 마소서'라고 하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음성에 속고 있는지 모른다. 

회개는 지금 해야 한다. 지금 죄 속에 있는 분이라면, 당장 시인하고 회개해야 한다. 유혹을 느낄 때, 그것이 죄라고 생각되면, 요셉처럼 당장 끊고, 그곳에서 나와야 한다. 단칼에 끊어야 한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2. 자신이 죄를 해결할 수 없기에, 용서를 구한다(1-2).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죄를 지워 주시고, 죄를 깨끗이 제하여 달라고, 용서를 구한다. 누가 우리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하나님 외에는 없다. 공자도, 석가모니도, 그 누구도 우리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은 없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셔야만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다윗이 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죄악을 용서하시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사랑이다. '인자'(1)라는 말은,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뜻이다. 
나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나를 대하여 주신다.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은, 우리의 배신에도 계속된다. 우리의 변심과, 죄악 속에서도 계속된다. 다윗은 그 하나님의 인자를 알고, 믿었다. 그 인자하신 하나님을 알고 믿었기에, 다윗은 그 인자에 근거하여 용서를 구했다. 

(2)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은, 근거하여 용서를 구한다(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우슬초는 담벽에서 자라는 볼품이 없는 식물이라, 겸손의 식물이라 한다. 정결의식에 사용하였다. 

(요19:29)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께 주어진 우슬초는, 주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무한한 정화를 상징한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슬초와 같다. 우리가 더럽고 추해도, 예수님의 보혈은 정결하게 한다. 주님의 보혈로만, 정결하게 씻을 수 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씻을 수 없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다른 종교도 착하게 살라. 베풀며 살라. 멋있게 살라고 말한다. 다른 종교를 믿어도 착하게 살 수 있고, 재미있고 능력 있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만 가능하다. 

다윗은 왕의 자리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권세를 가졌지만,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보혈을 의지함을 보여준다. 자기 상태를 깨닫지 못한 채,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없다. 자식들이 죄를 알고도, 잘못을 구하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잘못이라 할 수 없다. 

이 시를 쓴 다윗은,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었다. 왕인 자신이, 죄를 용서할 수 없음을 알았다. 부유한 나라를 다스리는 막강한 왕이지만, 자기의 처지가 비참함을 깨닫고 난 이후로, 부귀영화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 평안을 찾기를 원했다. 

우리 죄를 진정으로 깨닫게 되면,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 나타난다. 그래서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죄악을 지워달라고 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자신이 부정하다고 여기기에, 더럽다고 여기기에, 깨끗해지기를 원한다. 

그런데 죄는 자신이 깨끗하게 할 수 없기에, 자신의 무력함을 알기에, 하나님께 호소한다. 다윗은 자신이 죄 앞에 무력함을 알았기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한다. (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윗은 부자였기에, 제사문제라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거짓된 믿음의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 철저히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성경을 연구하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율법을 지켰다. 그래서 누구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더 잘 믿는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사야 시대의 백성들도, 얼마나 철저하게 예배를 드리고, 얼마나 정성껏 희생을 드리고, 기도를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수한 재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냐 하셨다.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다.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다… 하셨다(사1:10-15). 

왜 마음이 없는, 형식만 있는 가짜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 하나님을 갈망하게 된다. 회개란 신약에서 '메타노에오'로, '메타'(후에)와 '누스'(마음)의 합성어이다. 즉 돌이킨 후, 마음이 바뀜을 말하며, '방향수정'이라는 용어가 적합한 의미가 된다. 

불신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을 믿고 따름의 방향수정이 곧 회개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정말 하나님은 제사보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원하신다. 

3. 다시 태어나야 한다(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진정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새 출발을 하겠다는 결심만으로 부족하다. 새롭게 거듭나고 창조되어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복도 받았고, 주님이 주시는 복도 누렸지만,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았다. 다윗은 옛 성품으로 절망적인 상태를,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래서 지금 이런 복과 기쁨을 다시 달라고, 또 자기 안에 정직한(확고한) 영, 믿을만한 영을 달라고 기도를 하였다. 

정직한 영은, 범죄의 욕구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의 성령이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만져주셔야, 죄악을 이기게 된다. 다윗은 옛 사람을 죽은 시체로 매장하고, 그 대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새로운 심령이나, 새 땅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구원은 성령님의 역사다. 사역도 전적으로, 성령님이 일하셔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성품 전체가 잘못될 것이다. 마음은 영혼의 키이며, 여호와가 그것을 조정하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다윗은 정결하게 해달라고 했다.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해 달라는 말이다.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임했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사울에게도 성령님이 임했지만(삼상10:10), 성령님은 떠나셨다(삼상16:14). 

신약에는 성령이 떠나시지 않는다. 소멸된다. 소멸된다는 말은, 뜨거운 역사를 이루는 불을 끈다는 말이다. 그래서 구원의 즐거움도 기쁨도 사라진다.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괴롭다. 다윗이 죄를 짓고 나자, 기쁨과 즐거움이 사라지고, 괴로움만 가득했다. 

그러나 회개한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친히 찾아와 주신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는, 영광스럽고, 풍성하다. 집을 나간 탕자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를 먹다가 아버지 집, 아버지 상의 진수성찬을 기억했다. 아버지와 함께 먹던 그 풍성함, 그 맛을 그리워했다. 

아버지의 자비하심, 아버지의 그 인자하신 음성, 그것이 그리워 아버지 집으로 달려왔던 것처럼, 지금 다윗도 그것을 갈망하고 있다. 지난날의 풍성히 즐겼던, 그 하늘의 은총을 거두어가지 마시고 다시 회복시켜달라는 말이다. 그러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어떤 삶이 있는가? 

(1) 자원하는 심령이 된다(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회개한 심령은 자기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겸손해진다. 그래서 이제,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붙들어 주실 하나님을 찾는다. '주님 내게서 떠나시면, 죄 중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제게 오셔서 저를 붙들어 주소서'라고 말하게 된다. 철저히 성령을 의지하는 자가 된다. 억지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자원하는 심령, 갈급한 심령이 된다. 

(2) 주를 찬송하면서 전파한다(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라고 하였다. 죄악으로 침체에 빠지면, 온전한 찬송 할 수 없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러나 회복되면, 찬송하여 주님을 증거하고, 전파는 삶을 살게된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셨다고 자랑하게 된다. 높여 드리게 된다. 주님을 전하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된다. 죄에서 회복 없는 찬송과 삶은 기쁨이 없다. 흥분된 모습이지 진정한 기쁨은 아니다. 

(3) 바른 예배를 드리게 된다(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예배드리면, 많은 예배를 드려도, 주님이 기뻐 받지 않는다. 

그러나 회개하면, 주님이 그 제사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 결국 다윗은 회개를 통해, 삶으로 회복되었다. 다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자로 회복되었다. 비록 그는 범죄 하였지만, 망하지 않았다. 

비록 그는 연약하여 실수하였지만, 실패하지는 않았다. 다시 주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되어, 승리의 모습이 될 수 있었다. 마음이 답답하나요? 삶이 답답하나요? 감옥처럼 어두움에 거하면서, 어둔 인생의 밤을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혹 있나요? 회개의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란다. 

청소하지 않는 집이 더러운 것처럼, 회개하지 않은 나의 마음, 나의 영혼의 집에도, 먼지가 쌓이고 더러워진다. 답답하고 기쁨이 없고, 의미 없는 무감각한 삶이 되고 만다. 회개만이 내가 사는 길이요 회복되는 길이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믿음으로, 진실한 회개를 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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