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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히 여기자 (사 5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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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히 여기자 (사 58:9-14)
   

목사가 한 주간 좋은 책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시간이요, 영혼의 양식을 풍성히 쌓은 것 같고, 부자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이란과 이스라엘에서 몇 년간 살았던 주부이며 전문작가인 린 바압여사가 쓴 “즐겁게 안식할 날”이라는 책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학자인 아브라함 헤셀이 쓴 “안식”이란 책이었습니다.  미국 리전트 신학교 교수이신 마르바 던 교수의 “안식”이라는 책은 전에 읽어본 것인데, 한 번 더 훑어보았습니다.   

마르바 던의 ‘안식’이라는 책에는 ‘그침’, ‘쉼’, ‘받아들임’, ‘향연’이라는 주제로 안식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폴 쥬이트가 쓴 “주일의 참뜻”이라는 책도 참고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안식일에 대한 교훈과 예수님이 이해하고 있는 안식일, 그리고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면서 성경을 보았습니다. 

린 바알은 중년에 목사가 되었는데, 그는 “즐겁게 안식할 날”에 “우리는 존재로서의 인간인데, 일하는 인간인 듯이 살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 보다는 무엇을 하는가가 더 중요한 것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도록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자신을 되찾아갈 기회가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존재로서의 인간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결코 일하는 기계가 아님을 알아야겠습니다. 

여러분 일중독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어느 주부가 상담하는 말을 보았습니다.  “남편이 일에만 몰두하여 걱정이 됩니다.   대기업에 다니다 일 년 전부터 소규모로 자기 사업을 시작했는데, 귀가 시간은 거의 자정을 넘기고, 주말이나 주일에도 걸핏하면 집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회사의 자료를 보며 일합니다.  하루에 수면 시간이 너덧 시간 밖에 안 되어 늘 피곤한 기색이 역력합니다.가족모임이 있는 날에는 저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경우가 많아 부모님의 걱정도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언제 아빠와 놀이공원이라도 갈지 기다리다 지쳤고, 저도 남편의 끊임없는 질주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소연합니다.  

전문가들이 말을 빌리면 일중독증이란 “오직 일만이 정신적으로 지탱할 힘이 되는 상태”라고 합니다. 한 주간에 60시간 이상 일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지만 일중독에 빠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중독증이라는 말은 1980년대 초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라고 합니다. 일중독증 자체는 정신과적인 병명은 아닙니다.  일중독증의 여러 원인이 있지만 보통 경제력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 완벽을 추구하거나 성취지향적인 사람, 자신의 능력을 과장되게 생각하는 사람, 배우자로부터 도피하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 등에게 나타나는 경향이라고 합니다.  이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외로움을 느끼며, 자신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자기가 일중독증에 걸린 사람인지 아닌지 한번 판단해보세요.  나는 한 일을 맡았다 하면, 그 일을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나는 어떤 일을 맡으면 그 일을 마칠 때까지 정신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일이라고 하면 건강은 돌아보지 않고 밤에도 일하고 휴일에도 일한다.  나는 일을 하면 그 일에만 몰두하게 되는데, 퇴근한 후에도 일감을 가지고 집으로 와서 일한다.    나에게 한 주간 쉬고 오라고 하면 금단현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허전하고 무엇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나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하는데, 함께 놀아주지 않는다고 말할 때에는 짜증이 난다.  이런 생각이 나에게도 있다고 하면 이 사람은 일중독증에 빠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존재로서의 인간인데, 일하는 인간인 것처럼 살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말, 정말 귀담아 들어야 할 말입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무엇인가 일해야 사는 것 같고, 손에 일이 주어져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안식일 문제, 나아가서 주일에 대한 성서적인 명령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제목을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히 여기자”라고 정해보았습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라는 분은 유대인으로 유명한 신학자요, 통찰력과 영성을 지닌 시인입니다. 구약의 예언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헤셀은 193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대학교 교수가 되었는데, 유명한 마틴 부버의 후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나치 치하에서 폴란드를 이주하였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에 있는 유대신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으로 마틴 부버와 아브라함 헤셀을 가장 유명한 현대신학자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헤셀의 딸, 수제너 헤셀은 책의 서두에 장문의 추천서를 쓰면서 제목을 “존재론적 만남을 위한 시간의 성소”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헤셀은 “안식일은 영혼을 위한 날이기도 하지만 육체를 위한 날이기도 하다”고 하셨고, “안식일은 휴식과 축제의 날이라”고 하셨고, “안식일에 슬퍼하는 것은 죄라”고 가르치셨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헤셀은 그의 책 ‘안식’에서 “안식일은 시간 속의 궁전”이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은 엿새 동안의 좋은 시간을 완성하는 거룩하고 복된 시간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도쉬”라고 합니다.   ‘카도쉬’라는 말은 거룩, 구별, 분리라고 하는데, 신성의 신비와 위엄을 잘 드러내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처음 쓰여진 성경이 창2:2-3에서 “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3절에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을 써도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거룩함은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라는 의미로 거룩하십니다.  우리 인간과 전혀 다른 존재이심을 드러내주며, 신성의 신비함과 위엄을 잘 드러내주는 말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거룩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로서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거룩하게 되려고 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장소를 거룩하게 해야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사람이나 어떤 사물에 붙일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시간, 한 날을 거룩하게 만드셨고, 거룩하게 보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그가 사는 시간을 성별하고, 장소를 성별할 때에 그는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시간 사용에 있어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 시대에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로마인들이 경멸하였습니다.  로마역사의 기록을 보면 로마의 ‘유베날리스’, ‘세네카’와 같은 현인들을 “안식일이야말로 유대인들이 얼마나 게으른가를 보여주는 표지”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을 게으르기 때문에 안식일을 정하고 놀고 있다고 경멸한 것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우리는 휴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휴식은 목적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휴식은 활동을 위해서 존재하고 새롭게 쓸 힘을 얻기 위해 휴식이 필요하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안식일은 ‘생명을 위한 날’이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은 평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일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날이라고 합니다.  헤셀의 말을 그대로 빌려보면 “안식일은 막간(幕間)이 아니라, 삶의 절정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렛날에 쉬셨고, 이렛날을 복되게 하셨고, 그 날을 거룩한 날로 삼으셨습니다.  

헤셀은 “안식일을 시간 속의 궁전”이라고 했습니다. 헤셀은 일곱째 날을 광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시간 속에 궁전을 지을 수 있는 영의 보석들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보석은 시간 속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말씀드린 아브라함 헤셀 박사는 유대인이요, 유대교신학교의 교수요, 랍비입니다.  그런데 랍비들은 안식일을 영화롭게 하고 엄격한 준수를 강조하기는 해도 율법을 신격화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헤셀박사는 온건한 율법관을 가진 사람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안식일이 그대에게 주어진 것이지, 그대가 안식일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한 랍비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안식일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내려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2:27에서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헤셀은 말합니다. “토라(율법)에 의하면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조금이라도 생명이 위태로울 때는 모든 금지 계명을 무시해도 된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위해 계명(미츠봇)을 희생시켜야지 미츠봇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안식일은 인류가 하나님의 보물 창고에서 받은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안식일은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정말 필요한 날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3절을 봅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안식일은 내 성일이라,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날, 여호와의 성일입니다.  안식을 일컬어 즐거운  날, 존귀한 날입니다.  

네 발을 금하라고 하셨습니다.  발은 동작을 일으키는 수단입니다.  모든 동작은 발이 움직이므로 가능해집니다.  “네 발을 금한다”는 말씀은 일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은 우리의 쾌락을 위한 날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정체성과 민족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안식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은 지켜냈다”고 합니다.  참으로 귀한 고백이라고 봅니다.  

수제니 헤셀이 아버지 아브라함 헤셀과 함께 안식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금요일 저녁 해질 때에 온 집안 식구들이 일찍 퇴근하여 모여앉아 안식일이 시작되었음을 알고 함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책이 아니라, 경건한 책을 선택하여 읽었습니다.  그리고 잠에 드는데 다른 날보다 일찍 여유 있게 잠을 청하였습니다.  

안식일의 아침이 되면 유대신학교에서 거행되는 예배 의식에 참석하였습니다.  매주 예배의 설교는 졸업을 앞둔 랍비 후보생들이 담당하였습니다.  헤셀의 가족은 예배에 참석하여 랍비 후보생들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딸은 아버지와 함께 예배에 참석하고 차를 타지 않고 15분 정도 걸어서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그날 설교하신 분의 설교를 호되게 비판하기도 하였고 요점을 정리해주기도 하였고, 함께 토론하면서 천천히 오다보면 30분 정도 걸렸습니다.  

안식일의 점심 식사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느긋하게 식사하였으며, 점심 후에 낮잠을 즐겼습니다.    오후에는 강변 공원에 나와 산책하는데, 산책 나온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돌아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책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안식일은 차분히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라고 하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쉬고 있는 줄 생각하였는데, 영성과 지성과 육신의 건강을 위하여 알차게 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대인의 최고 학자요, 랍비 가정이 보내는 안식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주일을 보내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을 봅니다. 

우리는 안식일의 참뜻을 간직하면서 우리 주님이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 주의 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있었습니다.  행2:46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주간에 7일을 날마다 모이는 것을 한 동안은 가능한 일이지만, 생업에 큰 지장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는 안식일과 주일을 성별하여 모였습니다. 금요일저녁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지기 전까지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오늘의 주일에 모여 주님의 부활을 찬미하고 경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공인되는 주후 313년, 유대교와 완전히 결별하면서 2000년 전통의 안식일을 버리고 주일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이스라엘민족의 구원을 생각하면서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런 안식일 개념을 주일로 가져오면서 주일은 우리 주님의 날, 주님 예수가 부활하신 날이기에 이 날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안식일과 주일 중에 어느 날이 더 중요한 날이야 하고 논란이 일었습니다.  롬14:5-6에서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날을 중히 여긴다, 소중하게 여긴다, 더 귀한 날이라고 정하는 것도 주님을 위하여 하라고 하신 것은 간접적으로 주일을 지켜야 할 것을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아브라함 이후의 할례와 모세 이후의 안식일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다 완성하신 것을 이해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요한 칼빈도 “기독신자들은 안식일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의해 날들을 지키는 모든 의무에서 해방되었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을 말씀하시기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마 12: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구약의 안식일을 주일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초대교회로부터 교회는 주의 날에 정식 집회를 가졌습니다.   

행20:7에서 보면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라고 했습니다.   그 주간의 첫날, 안식일이라고 하면 그 주간의 마지막 날이지만, 주일은 한 주간의 첫날입니다. 그 주일에 떡을 떼려 하여 모였고,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습니다. 

고전16:1-2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매주 첫 날에 모여 예배드리면서 헌금하여 모으고 있었습니다.  매주일의 첫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기도하던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 환상을 보았습니다. 계1:10에서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에 보면 9절에서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기도 응답의 확신을 주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큰 확신의 말씀이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멍에를 메우는 일이나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손가락질, 허망한 말을 버리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을 격려하고 불쌍히 여기면 우리의 영혼에는 흑암 중에 빛이 떠오르게 됩니다.  우리의 어둠은 변하여 대낮과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주일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리의 신호등을 보면 빨간 불은 정지하라는 신호입니다.    주일에는 빨간 색으로 표시합니다.  물론 중세 시대의 달력에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하게 하려고 쓴 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빨간 색은 경고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던 일을 멈추고 주위를 잘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1913년 10월 17일 영국을 침공했다가 웰링턴장군에게 패하였습니다.   그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주일을 무시하고 전쟁이나 일삼는 자들은 하나님이 비웃으시고,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했다가 원자 폭탄을 맞고 패망하였습니다.  그날이 주일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도 주일이었는데, 그 날 김일성이 대한민국을 남침하였다가 연합군에게 밀렸고 그 경제적인 형편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주일을 무시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려야 하는 날에 전쟁이나 일삼고, 오락이나 일삼고, 사사로운 일이나 일삼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가장 우선해야 하는 일입니다.  수많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주일에 유원지에서 사고가 나서 수백 명이 죽는 참사 같은 것을 말씀드리면 협박하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주일을 지키면, 하나님도 우리의 일을 봐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지음 받은 존재요,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본래 지으심을 받은 창조성이 가장 최고조로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안식을 누릴 때에 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 광야에서도 우리의 영혼을 만족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뼈를 견고하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물댄 동산과 같이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태어날 자녀들로 하여 황폐한 곳을 다시 세우고,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다시 쌓을 것이며 무너진 데를 보수하고 길을 수축하여 사람이 살만한 사회로 만들어갈 것입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우리가 여호와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세상에서 누리를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신비한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우리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야곱이 누린 기업과 같이 축복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마음과 우리 주님의 부활하신 감격을 되새기면서 주일을 성수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로서의 인간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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