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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존의 신앙(7) (왕하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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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존의 신앙(7) (왕하 20:1-7)

          
히스기야가 낮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라. 

어떤 택시 운전사가 뒷자리에 승객을 싣고 달리고 있습니다. 뒤에 탄 승객이 뭔가 묻기 위해 운전기사 어깨에 손을 대자 순간 기사가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놀라느냐”고 묻자 “손님, 제발 좀 장난치지 마세요, 나는 오늘 택시 운전 첫날이예요, 어제까지 장의사 차를 운전했거든요”하고 말했습니다. 

죽음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남의 죽음을 보는 것도 이렇게 무서운데 내 죽음의 시간이 다가온다면 어떨까요. 오늘 밤 잠을 자는데 꿈에 계시로 “이제 유언을 준비하라”고 하신다면 그때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처신하시겠습니까. 별 생각을 다하고 별 방법을 다 찾아 나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방법을 찾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신앙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런 경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은 유다왕국 제 13대 왕입니다. 그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지금 대를 잇지 못하고 있어 초조했습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큰 일 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동안 하나님 중심으로 통치하였고 백성에게는 충실하게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종교개혁을 단행해서 나라의 아세라 목상과 놋 뱀 신상들을 모두 파괴하였습니다. 선왕들이 친 앗수르 정책을 펴 왔지만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으로 탈 앗수르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 정도면 하나님이 마땅히 그에게 복을 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지가 이사야가 찾아오더니 “하나님께서 너는 병들어 죽을 것이니 유언을 준비하라 하셨다”고 전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그 말을 듣고 굉장히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침상에서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너무 급박하여 성전에 가지도 못하고 침상에서 기도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벽을 향하여 통곡하였다고 했는데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다는 말입니다. 히스기야가 어린 아이처럼 통곡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하나님 중심으로 선하게 살려고 애쓴 것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 기도는 절규였고 체면불구하고 부르짖는 통곡이었습니다. 

사람이 종말 앞에 서게 되면 몇 가지 태도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가장 많은 것이 허무와 후회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말기암환자 호스피스 전문가인 오츠 슈이치라는 분이 “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라는 책을 썼는데 종말 때 사람들이 25가지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못한 것, 친절을 베풀지 못한 것, 삶과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 하나님의 가르침에 깨닫지 못한 것 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숨만 쉬며 인생이 고작 이런 것인 줄 몰랐다고 허무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발광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선하게 산 내가 일찍 죽어야 하는가 하고 발광한다고 합니다. 

어느 대기업 회장은 죽음을 앞두고 크게 절규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살아보려고 수단 방법을 찾아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싼 약을 구하고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다니고 매사에 귀가 솔깃해 다니는 유형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 접어두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에 속합니까. 본문은 히스기야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아가는 모습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벽을 향하여 통곡하며 긍휼히 여겨달라고 애원합니다. 그 기도는 진실했고 순전했을 것입니다. 왕이 체면도 불구하고 백성들 보는 앞에서 금식하고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합니다. 사람은 종말 앞에서 모두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사람은 모두 종말 앞에서는 진실해집니다. 사형수들이 사형대 앞에서 진실해 진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의 기도가 응답되어 15년의 수명이 연장되는 은혜를 입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이야기 내용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종말을 어떻게 맞아야 하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때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때 가장 중요한 태도가 하나님을 향한 “의존도”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하나님을 별로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소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떠나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인생 전체가 평온할 수는 없습니다. 가끔씩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아무나 다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과 예수의 제자는 위기 때 대처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의존도입니다. 위기 때 곧 바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어야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일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감사하는 것 

살아가다가 좋은 일이 있을 때 제일 먼저 누구에게 알리고 싶습니까. 그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가장 반가운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제자의 삶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옮길 때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백성들 보기에 부끄럽고 창피한 것이 그에게는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삼하 6:14). 

다윗은 더한 것이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좋아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진정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도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진정 감사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진정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고 사도됨에 늘 감격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나의 나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이 감사가 곧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진정한 감사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생명은 곧 예배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근본이고 중심이고 뼈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배를 생명처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과 정상화 

정상화는 모든 면에서 다 좋은 것입니다. 사람과의 사이에도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정상화는 최고입니다. 그런데 이 정상화를 가로막는 것이 죄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고 살게 됩니다. 문제는 곧바로 해결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과의 정상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몸에는 많은 미세혈관들이 있는데 그것이 막히면 사람은 쓰러지게 됩니다. 아주 무서운 병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사건 이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눈물로 침상을 적시는 생활을 하였습니다.(시편 6편6장)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다고 고백하였고(시편 42편3장)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편 56편8장)하고 눈물로 살았습니다. 죄는 짓지도 말아야 하지만 지었으면 곧 바로 회개로 해결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함이 주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죄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없이 살려는 의지입니다. 하나님 없이 내 의지대로 살려는 생각이 죄입니다. 

오늘 현대인들 대부분은 혼자 내 의지로 살려고 합니다. 살아갈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고 생각 속에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없애려는 의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현대인들의 가슴에 무신론 바탕이 이루어져 있고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이 전무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교만입니다. 교만은 하나님 없이 살려는 마음입니다. 또 하나는 묻지 않는 삶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어떤 길로 가야 하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가는 도중에 기브온족속이 와서 화친하자고(여호수아 9장)제안하였습니다. 옷을 보니 남루하였고 그들 말대로 멀리서 온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냥 받아들여 화친조약을 맺었습니다(여호수아9장14절). 그런데 얼마 후 알고 보니 가까운 이웃에 사는 야만민족이었습니다. 왜 거짓말 했느냐고 물으니 죽일 줄 알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 이름으로 조약을 맺었으니 할 수 없이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결국 그들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평소 사무엘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자 불레셋과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가서 물어야 하는데 사울은 무당에게 찾아가 죽은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애원합니다.(사무엘상 28장)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은 사울을 전쟁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아합왕은 거짓 선지자들을 옆에 두고 정치를 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매번 평안과 길한 말만 하였습니다. 

선지자 미가야는 혼자 왕의 미움을 받으며 하나님 주시는 계시만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아람과 전쟁이 일어나자 거짓선지자들은 나가 싸우소서 하나님이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미가야는 나가 싸우면 반드시 패배하고 당신도 죽을 것이라고 불길한 예언을 합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께서 거짓 영을 시켜 저 거짓예언자들 입에 붙었다고 말합니다(열왕기상 22장). 

그러자 거짓 선지자중 두목인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치며 “여호와의 영이 언제 네게 그런 계시를 주시더냐”고 따집니다. 미가야는 “네가 골방에 들어가는 날에 알게 될 것(열왕기상 22장25절)”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골방은 네가 엎드려 깊이 기도하면 진실한 영이 계시를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시편 73편을 보면 악인들이 형통하는 것을 보고 나는 넘어질뻔 하였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 받는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시험이 되어 넘어질뻔 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는 언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가 하면 골방에 들어간 후에(16절-17절)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깊이 기도할 때 왜 악인들이 형통하는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살아가면서 궁금한 일에 직면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때에도 오늘 현대인들은 골방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의존도의 삶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다윗은 때마다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적이 위협하면 먼저 싸울까요? 말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 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 말은 옮기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먼저 하나님께 물었다는 말입니다. 제자의 삶은 철저한 하나님 의존의 삶입니다. 


절박 시 하나님을 

살아가다가 절박할 때 하나님을 찾는 일는 신앙인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과 사를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유언이나 준비하라는 통고를 받았을 때 순간 하나님을 찾아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영광 때도 제일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평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고 늘 기도하고 감사하던 사람도 위기의 때가 온다든지 중병에 처했을 때 하나님은 제2선으로 밀려나고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 동분서주 하거나 비싼 약을 사느라 돈을 물 쓰듯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초점이 맞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친구가 많을 때는 엄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엄마는 없어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면 엄마에게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건강한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 가는데도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면 잘못 된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거리의 아이들이고 가출소년들입니다. 정신이나 마음이 병들면 이렇게 됩니다. 신앙도 병들면 그렇게 됩니다. 아주 중요한 때에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리고 엉뚱한 조건을 찾아 돌아다니게 됩니다. 정말 좋은 신앙인은 위기 때 볼 수 있습니다. 

진정 건강한 신앙인은 위기 때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찾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위기의 때를 만나게 되는데 사울은 그때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그것이 사울의 한계 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입니다. 왕들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 애급으로부터 준마들을 사들였습니다. 

솔로몬은 절박할 때 이방여인들을 의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제자들은 절박할 때 모두 도망가 숨었습니다. 그래서 실패한 것입니다. 절박할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주님의 제자입니다. 과학자 뉴턴은 어떻게 많은 것을 발명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나는 연구가 벽에 부딪칠 때마다 골방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었던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은 절박하게 되면 세 가지 행동이 나온다고 합니다, 하나는 빽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애급에 준마를 사러갑니다. 동맹을 맺으려 갑니다. 사울은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또 하나는 자포자기입니다. 다 포기합니다. 무신론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아가는 유형입니다. 찾아가 체면을 놓고 부르짖습니다.  

어떤 사업가는 부도가 나자 부도는 남들에게만 있는 줄 알았는데 자신에게도 주어지자 앞이 캄캄해서 자신도 모르게 산으로 올라가더라고 합니다. 그때 자신에게 이런 신앙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산에 가서 부르짖어 그때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 후 고백하기를 “사업부도는 내 인생에 가장 큰 복이었습니다, 그 일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도 옛날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내 사업이 망함으로 하나님을 발견하는 복을 누렸습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자신이 쓴 “내 앞에 엎드려라”는 책에서 신앙의 세 가지 면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는 신앙생활의 기본은 하나님께 엎드리는 자아의 기본과 그에 따른 순종과 겸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엎드릴 때 응답이 주어지고 역사가 이루어진다. 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고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할 때 그 분의 도움은 시작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는 1%의 확률을 무시합니다. 그런데 기적은 그 1%에서 일어납니다. 수술에서 회복 확률을 10%라고 볼 때 사람들은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그 10% 확률은 굉장한 확률입니다. 물은 1도만 부족해도 끊지 않습니다. 불과 1도 차이인데도 물은 그저 물일뿐입니다. 그런데 그때 1도만 높이면 물이 끓어 수증기가 되고 에너지로 변합니다. 1도 차이로 증기가 만들어져 터빈을 돌려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1%의 확률을 믿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1% 안에서 행동하십니다. 제자의 삶은 그 1%에 목숨 걸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1%를 믿고 기도할 때 응답이 주어집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남을 의존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오늘 부모들은 늙어 자식들에게 의존하기 싫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고 건강하다가 죽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바람직한 고백이 아닙니다. 사람은 의존하여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끊임없이 부모를 의존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식들에게 불가불 의존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죽어보십시오. 아무리 신세지지 않겠다고 했어도 자식들에게 의존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어 축 늘어져 있을 때 누군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2절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가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나의 주님이시고 나의 구원자이시고 나의 목자이십니다. 내 인생의 수호자이시며 나와 동행자이십니다. 주님은 내가 의지할 100%의 의존자이십니다. 이 믿음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앙인이고 주의 제자들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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