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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율법과 은혜 (롬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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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은혜 (롬 7:1-6)


I. 나는 행복합니다.

몇몇 남자들이 모여서 아내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내는 예쁘지 않느냐, 우리 아내는 요리를 잘 한다. 우리 아내는 자녀교육의 귀재다. 우리 아내는 남편에게 너무나도 순종적이다.”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부지런히 칭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쪽에서 한 남자가 침묵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네도 뭔가 자랑을 해보게”라고 하자 드디어 자랑을 시작했습니다. “어젯밤도 여느 때처럼 내 아내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지. 이마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이고 내게 말했어. 너 침대밑에서 안 기어 나오면 죽는다.” 

인터넷에 떠있는 우스개 이야기이긴 하지만 부부관계가 한 사람 앞에서 무릎 꿇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한사람은 소리 지르고 한 사람은 억압받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여자 하와가 받은 벌 중에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리라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부부간에 한사람이 한사람을 지배하는 관계.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에덴동산의 저주였습니다. 죄의 결과였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남편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 율법이 지배하는 것이었지요. 이 율법이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자유 하는 관계, 행복한 관계. 서로 돕는 관계로 바뀌게 됩니다.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II. 율법씨 남편∙은혜씨 남편

오늘 본문에 보면 “크리스천”이라는 한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이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살게 되는데 이 남편의 이름이 Mr. Law - 율법씨입니다. 처음엔 반듯해 보이고 완벽해 보이는 신사 - 율법씨가 좋아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단 하루를 지내고 나니 그는 함께 살만한 사람이 못되었습니다. 그는 일종의 완벽주의자로 조그마한 실수나 허물도 용납할 줄을 몰랐습니다. 아무리 잘 해 보려고 노력해도 그의 요구엔 한계도 끝도 없었습니다. 이틀을 지나고 나니 그는 폭군으로 변했습니다. 자기가 정한 규칙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부인을 때리고 비난합니다. 마침내 아내 “크리스챤”은 만사에 자신감을 잃었고 삶의 의욕마저 상실했습니다.

잘 해 보려고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 큰 실수를 낳고 맙니다. 깊은 열등감에 사로 잡혔고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으며 죽고 싶어도 죽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남편의 가혹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다 부르짖은 이 아내 크리스천의 절규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끔찍한 율법의 남편,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

이 여인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 사도 바울은 일찍이 못된 남편과 같은 율법씨 밑에서 고생하며 살아본 사람입니다. 지키고 순종해 보려 해도 끝이 없습니다. 자유도 기쁨도 감사도 행복도 없었습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잡아 죽이는 일에 압장 섰던 만남이었습니다. 

안식일 법 만해도 그렇습니다.

∙설교하다 넥타이가 풀어져도 그것을 고쳐 맬 수가 없었습니다.
∙오후 시간 시원한 그늘에게 책을 읽다가 소낙비가 와도 책을 들고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노동으로 규정되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자동차에 오일이 떨어져도 넣을 수가 없습니다.
∙어린 애기가 배고파 울어도 분유를 사 먹여서는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남편 율법씨에게 죽도록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지독한 남편이 죽었습니다. 처음에는 충격이 컸지만 한달 두달 지나는 사이 묘한 해방감마저 들었습니다. 얼마 후 이 여인은 “전”씨 성을 가진 “도자”라는 친구 즉 “전도자”를 통해 한 남자를 만나 재혼을 하게 됩니다. 이 새남편의 이름이 Mr. Grace - 은혜 씨입니다.

알고 보니 이 은혜가 바로 “크리스천” 여인의 첫사랑 “J”라는 그 청년이었습니다. 어릴 때 J - Jesus - 예수라 불렸는데 지금은 Mr. Grace - 은혜씨가 된 것입니다.

예수 - 은혜 씨는 크리스천이 에덴동산에서 만난 첫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첫사랑을 버리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율법 씨와 연애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새 남편 은혜 씨는 크리스천 여인을 사랑하며 이 여인의 모든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의 허물이 허물로 보일리 없었고 약점이 약점으로 보일 리 없었습니다.

그는 이해심과 동정심, 사랑과 긍휼과 이해로 늘 흘러넘쳤습니다. 크리스천 여인은 예수를 만난 후 삶의 활기와 자신감을 찾았고 잃었던 인생의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점차 매력적인 여인으로, 사랑스런 아내로 바뀌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율법과 은혜”에 관한 교훈」입니다.

III. 율법에 대하여 나는 죽었다.

결혼을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혼을 하게 되면 함께 일어나고 함께 살고 함께 잠을 잡니다. 함께 밥을 먹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함께 자식을 낳고 삽니다. 함께 재산을 공유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구속되며 소위 한 몸,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율법과 결혼하여 살 때는 율법과 함께 살며 율법이 나를 구속하며 율법의 열매를 맺습니다. 아무리 율법과 붙어살아도 율법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더욱 더욱 나를 비참하게 만들 뿐입니다. 율법은 마치 진단을 정확하게 잘하지만 전혀 치료 할 줄을 모르는 의사와 같습니다. 율법의사가 할 줄 아는 말이 꼭 한 가지 있습니다. 
“너의 병은 너무 중하여 너는 죽게 될 것이다. 너는 망하게 될 것이다.”
“너는 흉악한 죄인이고 결국 망할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존재야!”

프레드 브라운이란 사람은 율법을 치과의사의 거울에 비유했습니다. 작은 거울을 이마에 달고 치과 의사는 충치를 찾아냅니다. 그러나 의사는 거울로 충치를 치료하거나 임플란트를 심어주지는 못합니다. 율법은 죄의 문제를 들추어내지만 치료책을 주지는 못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이 폭군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꼭 한 가지  죽음밖에 없습니다. 죽음만이 율법과 갈라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기는커녕 일점일획 상처도 입지 않습니다. 이제 길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내가 죽으면 됩니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내가 죽는 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어떻게 내가 죽을 수 있을까요?
로마서 6장 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그의 죽으심을 나의 주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례는 나의 죽음 선언식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보십시오. 내가 십자가를 통해 죽음으로서 율법과의 결혼관계는 깨끗이 끝이 났습니다. 믿는 자는 율법의 모든 정죄와 구속과 저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그 안에서 그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 되었습니다.

이상의 말씀들이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옛 남편 율법과의 깨끗한 관계청산, 깨끗한 죽음선언입니다.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채 결혼을 하게 되면 결혼 후에도 옛 애인에게 매이게 됩니다. 신혼여행 가서도 옛날 애인 꿈을 꾸고 옛날 애인 만나러 다니고 - 이거 한심한 얘기 아닙니까? 옛 애인, 옛 남편과는 비교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두고 오늘 본문은 간음이라고 단언합니다. 율법에 매여 율법적 가치관, 공로와 행위의 안경으로 자기를 보고 남을 판단하는 삶은 신앙인의 간음인 것입니다. 걸핏하면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간음을 일삼는 사람입니다. 이혼한 율법신랑의 눈으로 자기를 보면 어떨 땐 꽤 괜찮은 존재인데 어떨 때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율법의 눈으로 내 배우자를 보고 아내를 보고 이웃을 봐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밖에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이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퇴근길에 아내의 무덤에 들렀다 지은 시가 있습니다.

당신의 무덤가에 패랭이꽃 두고 오면
당신은 구름으로 시루봉 넘어 날 따라오고
당신 무덤 앞에 소지 한 장 올리고 오면
당신은 초저녁 별이 되어 내 뒤를 따라오고
당신의 무덤가에 노래 한줄 남기고 오면
당신은 풀벌레 울음으로 문간까지 따라오고
당신의 무덤위에 눈물 한 올 던지고 오면
당신은 빗줄기 되어 속살에 젖어오네

착하고 고운 마음이지요. 그러나 죽은 후엔 가슴 아픈 사랑은 무의미 할 수 있습니다. 잊어주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더더구나 율법에 대하여 우리가 죽었는데 율법에 매여 사는 것은 백해무익이요, 그것은 영적인 간음이라고 본문이 말씀합니다.

옛날 궁중에 내시로 들어가게 되면 거세를 해버립니다. 남성 기능상실입니다. 주변에 아무리 예쁜 여자가 많아도 유혹이 안 됩니다. 남성으로서는 죽은 것입니다. 죽으면 유혹도 미련도 없습니다. 성도가 마귀로부터, 죄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 죽음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결국 내게 아직 유혹이 남아 있는 것은 아직 덜 죽어서 그렇습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답니다. 왜요? 덜 죽어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한 은혜 신랑과의 결혼생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풍성한 생활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미련 없이 죽어버립시다. 아니, 이미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불의한 자를 위해 필요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거쳐 은혜와 결혼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자원, 행복함, 풍성함,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었습니다.


IV. 행복한 결혼 생활의 열망

율법 씨와 함께 살던 결혼생활과 은혜 씨와 함께 사는 결혼생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도덕과 신앙의 차이요,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입니다. 그 둘의 차이를 규명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명제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이 율법 씨와 살던 열망이었다면, 6절은 새로운 결혼생활의 열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육신” “죄의 정욕” “사망의 열매”라는 말들이 나옵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 씨와 사는 인생의 비극입니다. 

그리고 6절을 시작하며 “이제는”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원문에는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런 비극적 삶을 살지 아니하고 은혜와 함께 사는 행복한 인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율법 씨는 맛난 반찬을 요구하지만 반찬 살 돈은 주지 않는 남편과 같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지켜야 할 까다로운 법을 제시하지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은 주지 못합니다.

M.R. 디한 박사는 율법과 은혜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7가지로 표현했습니다. 

(1)율법은 가장 선한 사람도 정죄하지만 은혜는 가장 악한 사람도 구원합니다. 
(2)율법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 말하나 은혜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라 말합니다. 
(3)율법은 죄의 빚을 갚으라 말하나 은혜는 이미 죗값은 지불했다고 말합니다. 
(4)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지만 은혜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합니다. 
(5)율법은 돌에 새겼으나 은혜는 마음에 기록되었습니다. 
(6)율법은 두려움을 가져오지만 은혜는 화평과 확신을 가져다줍니다. 
(7)율법은 복종을 강요하지만 은혜는 순종하는 능력을 줍니다.

인간은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최근 미국 사회에서 틴 에이저들에게 성교육을 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성교육이 오히려 청소년들에게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여 성적으로 더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를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성교육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부패성 때문에 성교육이 성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는커녕 성적 충동감만 자극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율법 가운데 있을 때 인간은 죄의 정욕 때문에 사망의 열매만 맺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은혜 신랑을 만나 첫사랑 예수와 신방을 꾸미기 시작하면서부터 새로운 열망이 생겼습니다. “죄의 정욕”이 아니라 “사랑의 욕구”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은혜의 신랑 예수를 만나고 보니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내가 율법 안에서 저지른 죄의 삯을 지불하기 위해 내 대신 죽음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도 내가 돌아오기를 오랜 시간 기다리고 또 기다려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큰 빚을 지고 집나간 아내의 빚을 다 갚으시고 그 아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어서 돌아로소 어서 돌아만 오오.

이토록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예수 신랑에게 죽음인들 아깝겠습니까? 이 몸, 이 마음 다 바쳐도 부족할 뿐이지요. 예수 신랑 만나고 나니 이게 생시입니까 꿈입니까? 여기가 낙원이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만 같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예수 신랑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양이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엄격하기만 한 법은 아무런 능력도, 열매도, 결과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넘치는 곳에 법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자식 낳은 어미에게 아기를 돌보라는 율법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자식을 사랑하라”는 법은 어머니들에겐 모욕 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머니에게 “자식을 먹여라. 입혀라. 위험에서 보호하라. 깨끗이 씻겨라.” 이와 같은 율법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그런 건 유모나 고아원 보모에게나 필요한 법이지요.

은혜 신랑과 사는 우리에겐 사랑의 열망만 있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또 불러도 모자랍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해도 모자랄 뿐입니다. 드리고 또 드려도 한없이 모자랄 뿐입니다. 

♪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이 몸밖에 더 없어서 이 몸 바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예수님과 그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또 섬겨도 늘 부족한 것뿐이요, 아쉬운 것뿐입니다.

♪늘 아쉰 마음 뿐일세! 

보고 있어도 보고 싶습니다. 
말씀 듣고 있으면서도 또 듣고 싶습니다.
예배드리고는 또 예배드리고 싶어 합니다.

V. 은혜신랑과 함께 사는 사람

우리의 신랑 예수를 향한 사랑의 열망이 일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하면 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전혀 다른 삶의 동기가 생겨납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뜨거워지자 율법 안에서 그렇게 노력해도 나타나지 않던 열매들이 맺혀지기 시작합니다. 거룩의 열매, 선의 열매, 의의 열매, 친절의 열매, 절제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저절로 착해지는 복을 받습니다. 여러부 저절로의 복을 아십니까? 저절로 기도가 되고, 전도가 저절로 되고, 펼치면 저절로 성경이고, 앉으면 기도가 저절로 되고, 용서가 되는  저절로의 신비를 아십니까? 

본문 7장 5절을 보십시오. “육신에 있을 때는 죄의 정욕으로 사망의 열매를 맺더니” 이제는 성령의 새로운 열매가 저절로 맺히기 시작합니다.  8장 4절에서는 “율법이 그렇게도 요구하던 그 열매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더벅머리 더러운 몸으로  늘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학교에서 선생님들의 골치를 썩이던 불량 청소년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회초리도 선생님들의 가혹한 처벌도 이 아이를 바꿀 수 없더니, 어느 날 이 소년이 한 여학생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머리를 깎고 옷을 단정히 입기 시작하고 그 여학생이 담배 냄새 싫어한다고 담배를 끊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법이 하지 못하던 것, 내 의지가 할 수 없는 것 - 그것을 사랑이 해냅니다.

이때부터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의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은혜의 법칙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살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거기는 용납이 있습니다. 허물이 들어나고도 아프지 않습니다. 어린 신앙인들이 더 사랑받는 곳이 교회입니다. 연약한 지체들이 더 보호를 받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에겐 법, 규칙 이상의 용납과 용서와 이해의 폭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머니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 어머니 품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어머니는 자식 얘기라고 하면 다 속아 넘어가 줍니다. 세상에서 제일 속이기 쉬운 사람이 어머니입니다.

저도 중학교 1학년 철없던 시절 어머니를 멋지게 한번 속여 보았습니다.  용돈이 필요해서 “영어 사전󰡓산다고 돈 타고, 그 다음날 ”딕셔너리󰡓 산다고 돈 타고 또 다음날 “콘사이즈󰡓산다고 돈 타고, 책 한권 사 놓고 세 번씩 어머니 주머니를 긁어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속아주십니다. 속아주는 어머니가 가여워서 그다음부터는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녀를 너무 공의와 법으로 다루는 집 아이들은 비뚤어집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밖에서 방황합니다. 그게 참 이상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한계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오스카 쉰들러가 독일군 장교에게 하는 말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무엇이 진정한 힘인가? 죽일 수 있으면서 죽이지 아니하고 때릴 수 있을 때 때리지 않는 것, 바로 은혜를 베풀 줄 아는 것 그것이 참된 힘이다.󰡓얻은 은혜보다 더 큰 힘은 없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하나님의 사람들! 그들은 좀 허술한 것 같아도 한 가지 삶의 원칙이 있습니다. 은혜로 살아갑니다.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용서로 살아갑니다. 

“빙점”의 저자 미우라 아야꼬가 자기 결혼생활에 대해 쓴 “부부 이야기”라는 글이 있습니다. 

「나는 가정생활에서 좀 칠칠치 못한 면이 많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오바코트도 모자도 머플러도 거의 제자리에 갖다놓는 법이 별로 없다. 코트를 어디에 놓았는지도 잊은 채 난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조금이라도 빨리 남편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이다.」

법을 몰라도 사랑을 아는 여인이다 싶지 않습니까? 질서가 없어도 참 행복을 아는 여인입니다. 이쯤 되면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이곳에 오실 때 예수 신랑 보고 싶어 셀레이는 마음으로 달려오셨습니까? 아니면 오늘 예배드리지 않고 오후에 놀러갔다가 차사고 날지도 몰라 하며 율법에 매여 오셨습니까? 

∙여러분은 진정 죄와 율법으로부터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죄에 매여 사는 것도 율법에 매여 사는 것도 영적인 간음입니다. 오직 우리는 은혜의 끈에, 예수의 사랑에 매여서 살 뿐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영광스럽고 존귀한 예수신랑의 신부입니다. 그와 함께 더불어 살아갑니다. 잠을 자고 그와 함께 일어납니다.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낳습니다. 
∙예수와 함께 기뻐하고 예수와 함께 슬퍼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풍성함과 부요함이 당신의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여러분은 존귀한 주님의 자녀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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